213화 극의일로(極意一路) (4)
213화 극의일로(極意一路) (4)
갈유월이 금목환을 제외한 황금세가 직계들 중 그나마 친한 사람을 꼽자면 역시 금수린일 것이다. 용봉지회에서 잠깐 같이 지낼 때 안면을 텄으니 말이다. 실제로 갈유월은 금수린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금수린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금수린은 딱히 얼굴값을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이 어려운 갈유월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와 줬다. 물론 처음 친해졌을 때는 금목환의 누나라는 점이 엄청난 가산점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떼고 보더라도 좋은 언니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갈유월이 인사를 건넸고 금수린이 받았다. 그러나 금수린의 반응은 예전과 달리 시큰둥했다. 원래라면 손을 부여잡고 위아래로 흔든다거나, 더 예뻐졌다거나 같은 미사여구를 붙였을 사람이었다. 그 괴리감이 갈유월을 더욱 얼어붙게 했다.
“왜 왔어?”
금수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갈유월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 어차피 이제 더 부끄러울 필요도 없었다.
“걱정돼서요.”
“그렇겠지. 근데 걱정된다고 다른 세가의 안가를 막 들어오면 돼?”
금수린의 말은 완벽한 정론이었다. 갈유월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요.”
“안 되는 거 알면서 왜 들어왔어?”
갈유월은 말을 하려다 목구멍에 말이 걸렸다. 목구멍과 식도 사이에 애매하게 걸린 생선가시 같은 말이었다. 삼키자니 아플 것 같고, 뱉어내자니 안 나올 것 같은 말.
그러나 갈유월은 지금이 기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을 넘지 않으면, 계속 목구멍에 불편함을 매달고 있어야 했다. 지금까지 삼켜왔던 가시들을 처음으로 뱉는 순간이었다.
“···제가, 금목환을 좋아해서요. 후,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 말고, 이성적으로 말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제가 금목환을 사랑하고 있어요.”
갈유월은 이런 말이 본인 입에서 나올지는 도무지 생각하지 못했다. 이십 오년에 가까운 인생에서, 이런 부끄러운 말을 직접 꺼내게 될 거라곤 말이다.
그러나 수치스럽지 않았다. 한 번 뱉고 나니, 왜 이 당연한 마음을 긍정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어. 내가 그걸 모르겠니?”
하지만 금수린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장이었다. 갈유월은 흠칫했다. 그래. 지금부터는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지금 금수린은 갈유월이 아는 따뜻한 언니가 아니었다.
금목환을 만나기 위해 넘어가야하는, 설득시켜야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말하는 건, 기다릴 줄 알아야 된다는 거야. 넌 지금 세가 사람이 아니니까 막는 거고. 그걸 못 기다려?”
“네.”
갈유월이 냉큼 대답했다. 금수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금수린이 손뼉을 쳤다. 그와 함께 수풀에서 누군가가 나와 금수린의 앞에 떨어졌다. 그건 갈유월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금원대의 대주이자, 같은 삼봉의 일원, 설봉 한유림이었다.
*
처음 황금세가 직계들이 진법으로 나갔을 때, 마주친 사람은 갈유월이 아닌 한유림이었다.
한유림 역시 금목환을 찾다가 안가에 생각이 미쳐 찾아온 것이다. 처음 한유림 역시 갈유월이 들은 질문과 같은 걸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직감적인 선택이었다. 지금 한유림이 금목환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면 안 들여보내 줄 거라는 생각. 그래서 그녀는 본인의 마음을 충심으로 포장해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건 황금세가 직계들이 듣기에도 합당한 말이었기에 한유림이 들어온 거다.
그리고 한유림이 들어오자마자 또 다시 진법이 흔들렸다. 그 진법을 흔든 사람이 바로 갈유월이었던 것이다.
한유림은 뒤에서 들으면서 놀랐다. 가장 그런 말을 안 할 것 같았던 갈유월이 사랑한다는 말을 뱉은 것이다. 왠지 찔렸다. 한유림은 황금세가의 직계들을 속이면서 들어왔지만, 갈유월은 당당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유림도 여기서 내뺄 생각은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렇네요.”
한유림과 갈유월은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원래 그렇게 왕래가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전 금원대의 대주로써 아가씨의 말을 받들 의무가 있어요.”
“이해하죠.”
갈유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저도 뚫고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보세요.”
갈유월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유림에게서 묘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금수린의 명을 듣는 거라면 이런 적대감을 품을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갈유월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칼을 꺼냈다.
그때, 한유림이 바로 검강을 날렸다. 갈유월은 깜짝 놀랐다. 강기는 엄청난 괴력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를 터였다. 한유림이 몇 년간 천주성주, 검후에게서 옥녀단마신공의 수련을 받고, 태원지기를 단련했는지 말이다. 한유림은 이미 오룡삼봉의 수준에서 아득히 벗어나고 있었다.
또한 갈유월은 며칠 동안 진법에서 헤매며 진력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었다.
“흡.”
갈유월은 힘 대 힘으로 안 되겠다고 생각해 뒷걸음질로 기력을 해소시켰다. 한유림은 바로 땅을 박찼다. 갈유월이 눈을 깜빡해보니 어느덧 한유림의 냉막한 얼굴이 세 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순간 갈유월은 숨통이 완전 막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유림이 칼자루로 갈유월의 명치를 강하게 쳤기 때문이다.
“컥!”
갈유월은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느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은 땅바닥에서 거칠게 몇 번 구르다가 멈췄다.
“허억, 허억···”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갈유월은 바로 위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한유림은 자비 없이 날아온 갈유월을 쫓아온 거다.
쾅!
갈유월이 순식간에 옆으로 굴렀다. 그녀가 있던 곳에 한유림의 발이 진각을 찍었다. 땅바닥이 반원형 모양으로 패였다.
쿵! 쿵! 쿵!
한유림이 계속 진각을 밟으며 왔고, 갈유월은 계속 구르면서 그것을 피하다가 간신히 일어나 피했다.
이제 진각으로 안 되겠다 판단한 한유림은 검을 금색 물결로 물들었다. 금음검법이었다. 금음검법에는 묘한 현기가 돌았는데, 그것은 옥녀단마신공의 묘리였다.
갈유월도 신속하게 자세를 잡고 신풍검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선수를 내주면 안 되겠다 생각해 이번엔 갈유월이 먼저 출수했다. 벼락같은 검격이 한유림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 검격은 한유림의 눈에 너무 뻔하게 보였다. 대놓고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격을 누가 맞아주겠는가. 막고 바로 공격하면 그만이었다.
방금 교환한 일수로 한유림은 갈유월이 자신보다 하수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이게 갈유월의 최선의 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날아오던 갈유월의 신형은 갑자기 땅바닥으로 거칠게 내려앉았다. 검은 여전히 위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갈유월은 검격을 따라 검을 날린 것이다. 실초는 갈유월의 체술이었다.
“···음!”
한유림은 당황했다. 갈유월이 바로 자신의 무기를 버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갈유월 역시 한유림과 일수를 교환하고, 지금 상태로는 이기지 못하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몸 상태가 제일 좋을 때 도박수를 던지는 것이었다.
퍽!
갈유월의 주먹이 한유림을 향해 날았다. 주먹에는 강기가 맺혀있어 맞으면 내상이 확실시되는 공격이었다.
“좋은 수였어요.”
그러나 갈유월의 주먹은 한유림의 손바닥에 막히고 말았다. 한유림도 바로 칼을 날려 갈유월의 검을 쳐내고 적수공권으로 전환한 것이다.
한유림은 손바닥을 쥐어 갈유월의 주먹을 움켜쥔 뒤 자신 쪽으로 당겼다.
“···읏!”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갈유월이 한유림에게로 딸려갔다. 그 다음부터는 한유림의 타격이 이어졌다.
파바바박!
갈유월의 손은 한유림의 손을 따라가지 못했다. 애초에 갈유월의 몸이 균형이 무너져 있는 상태로 한유림에게 끌려다니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한유림의 손바닥이 갈유월의 어깨를 치고, 팔꿈치가 허리를 치고, 손날이 갈비뼈 틈 사이로 들어갔으며, 손바닥이 가슴을 쳤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체술이었다. 마지막으로 한유림이 무릎으로 갈유월의 하단전을 쳐올렸다.
“아악!”
쿵!
갈유월의 몸이 붕 뜨는 듯하더니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윽.”
갈유월은 짧고 약한 신음을 남기고 쓰러졌다. 한유림은 그제야 갈유월의 주먹을 놔줬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갈유월이 땅바닥으로 무너졌다.
땅바닥에 엎어진 갈유월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져있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흘려져있고, 뼈가 골절된 곳은 부어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나온 금수린은 쓰러진 갈유월을 보면서 살짝 당황했다.
“···너무 세게 한 거 아니야?”
“괜찮아요. 그녀도 무인이니까.”
한유림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정도면 한 달 정도만 정양하면 금방 나을 것이었다.
“갈 소저는 제가 의원에 데려갈게요.”
“···뭐, 그렇게 해.”
금수린은 무인들의 이런 살벌한 싸움은 또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유림이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니, 금수린은 한유림을 믿고 안가로 돌아갔다.
한유림은 금수린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갈유월이 쓰러진 곳으로 갔다. 한유림은 쭈그려 앉아서 갈유월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걷었다. 눈을 감은 갈유월의 얼굴이 보였다. 역시 무한제일미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미안하네.”
어쩌다 보니 연적이라 수를 과하게 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불안했다. 갈유월 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저렇게 당당하게 마음을 고백할 정도면, 철가면을 쓴 가주도 흔들릴 것만 같았다. 한유림은 아직 그 정도 준비까지는 안 되어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냥 옆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기 때문이다.
“휴.”
한유림은 갈유월에게는 다음에 사과하기로 했다. 한유림은 갈유월의 팔을 이끌러 업으려 했다.
그때, 갈유월의 눈이 번쩍 떠졌다. 갑자기 한유림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갈유월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한유림도 익히 알고 있지만, 그건 엄청난 태원지기였다.
갈유월의 몸상태는 외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엉망이었다. 단전에서는 이미 내공이 완전히 빠져나갔고, 몸에는 힘이 완전히 빠져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유림과의 싸움은 갈유월의 힘을 끝까지 사라지게 했던 거다.
그리고 그 비워진 곳으로 태원지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한유림은 곧장 갈유월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갈유월은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알겠네요.”
갈유월은 또렷한 눈빛으로 한유림을 바라봤다.
“공격에 감정이 실린 걸 봤을 때, 당신도 금목환을 좋아하는 거네요.”
그 말에 한유림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대답했다.
갈유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금목환을 가까이서 보면서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갈유월 본인이 심각하게 콩깍지가 씌어있기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갈유월은 주먹을 쥐었다 펴봤다. 어느 때보다 힘이 충만했다. 비우면 채워진다는 것에 대한 묘리를 갈유월은 몸으로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녀의 태원지기는 온 몸 경맥, 세맥을 강렬하게 맴돌았다.
그녀들에게 별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갈유월과 한유림이 동시에 도약했다. 칼은 어차피 서로 던져놔서 둘 다 적수공권이었다.
갈유월과 한유림의 주먹이 공중에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