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극의일로(極意一路) (2)
211화 극의일로(極意一路) (2)
갈유월의 눈이 빛났다. 정면으로 비도가 날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래쪽에는 철편(鐵鞭) 같은 둔기가 갈유월의 발목을 휩쓸고 지나갔다. 갈유월은 목을 꺾고 발을 띄워 유려한 곡선을 만들어냈다.
철퍼덕!
“아!”
물론 부지불식간에 피한 일이라 도약에는 실수가 있었다. 그녀는 등부터 철퍼덕 땅바닥에 떨어졌다. 등과 종아리에 축축한 진흙이 묻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개의할 시간도 없었다. 또 뭐가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후우.”
갈유월이 미궁 같은 진법을 돌아다닌 지도 삼주야가 지났다. 보통 무인이라면 배고픔과 목마름에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을 시간이었다.
허나 갈유월은 처음부터 황금세가의 진법을 만만하게 보지 않고 명석하게 대했다. 최대한 작은 행동으로 움직여서 힘을 비축하고, 수분의 유출을 막기 위해 땀을 관장하는 경맥을 내공으로 눌러버린 것이다.
그렇게 갈유월은 배고픔과 목마름마저 참아낸 채로 쌩쌩하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물론 이미 위장에 남아있는 음식물 따위는 없었고, 목구멍도 건조해서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배고픔과 목마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갈유월 본인의 전략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그녀의 몸 상태는 오히려 굶으면 굶을수록 더 좋아져 갔으니 말이다.
“이건 또 뭘까.”
실제로 진기를 돌려보면 기운이 더 세지고 맑아졌다. 이건 마치 굶으면 굶을수록 강해지는 것 같지 않은가. 갈유월은 그런 무공을 배운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면 실마리라도 잡힐 것 같았지만, 안가의 진법이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진법은 가면 갈수록 거세져갔다. 잠깐 생각하는 동안 갑자기 갈유월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위를 바라보니 암기들이 하늘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사천당문의 만천화우를 진법으로 재현한다는 건 갈유월에게 상징적으로 보였다.
갈유월은 당장 검을 빼어들어 얇은 검막을 만들었다. 강기를 포처럼 얇게 떠내어 본인의 머리 위를 보호했다. 장대비가 지붕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암기들이 튕겨져 나갔다.
그때였다. 갈유월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암기들 사이로 강력한 강기 한 줄기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곧장 갈유월은 검막을 겹쳐 덧대어서 그것을 막아냈다.
검막이 보수된 건 강기가 부딪치기 직전이었다. 갈유월의 손목에 강한 통증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윽!”
갈유월은 뒷걸음질을 치며 강기의 공력을 해소했다. 딱 봐도 보통 공력이 아니었다. 갈유월이 고개를 치켜드니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대공자님?”
“역시 갈 소저였군.”
갈유월과 마주한 사람은 바로 금월상이었다. 금월상은 갈유월을 알아봤음에도 불구하고 도를 거두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명각주가 올 거라고 장담하더니. 역시 와버렸군.”
금월상이 말했다. 갈유월은 흠칫 놀랐다. 중명각주라면 본인이 서한을 보낸 명재희가 아닌가. 명재희는 분명 황금세가의 안가를 찾지도 말고, 들어가지도 말라 하였다. 근데도 본인이 올 걸 예측한 것이다.
“오면 안 되는 곳인가요?”
“그럼. 황금세가의 사적인 공간이니 말이야.”
그건 금월상의 말이 맞았다. 사실 갈유월은 몰래 들어온 것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뻔뻔히 나가기로 했다.
“대공자님은 언제부터 오셨나요?”
“보름 전쯤 왔네.”
보름 전. 금목환이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즈음이다. 그렇다면 금월상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돈황의 안가로 찾아왔단 말인가. 하긴 그럴 수 있겠지. 세가의 사람이니까.
“금목환이 걱정되어서 오신 거 아닌가요?”
“맞소.”
“안에 있나요?”
“있지.”
금월상은 생각보다 쉽게 대답해줬다. 갈유월은 금목환이 안에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다시 설레임으로 마음이 차는 게 느껴졌다.
“제가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안 돼.”
금월상은 단호했다. 갈유월은 금월상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다가다 인사나 몇 번 했을 뿐.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갈유월은 금월상이 온순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완전 딴판이었지만 말이다.
“왜요?”
“세가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네.”
갈유월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황금세가 사람이라고 뻐기는 건가, 뭔가. 하긴 황금세가 사람이면 뻐길만 하긴 하다. 갑자기 황금세가 사람이라는 게 굉장히 부러워진다. 허나 갈유월은 금씨가 아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황금세가가 될 일이 없···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안주인이라는 한 가지 길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생각까지 하기에는 갈유월의 부끄러움 감수성이 버티지 못했다.
금월상은 갑자기 입술을 툭 튀어나왔다가 안쪽으로 물고,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졌다 하는 갈유월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뒤늦게 금월상의 눈치 챈 갈유월이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전 물러설 생각이 없어요.”
“그러면 쫓아내겠네.”
“그렇게 해보세요!”
갈유월은 그 말과 함께 바로 출수했다. 금월상도 갈유월과 마찬가지로 오룡삼봉의 일원. 방심할 수는 없는 상대였다.
찌르기 위주의 신풍검법이 금월상의 다섯 혈도를 노리며 들어갔다. 실초는 다섯 개, 허초는 스무 개. 맞서는 금월상은 검극이 스물다섯개로 보일 거였다.
“핫!”
금월상이 넓적한 도를 수직으로 세웠다. 날카롭고 신속한 검. 묵직한 중의 묘리로 싸우는 금월상과는 상극이었다.
그러나 상극이라고 다 같은 상극이 아니다. 물의 기운이 하나 있다고 불의 기운 세 개를 막는 건 아니니까.
금월상이 도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묵직했다. 도에 직접 직격하지 않아도, 도가 휘둘러지는 범위에 가면 내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갈유월은 모르고 있었다. 금월상 역시 황금세가의 사람이고, 금목환이 먹었던 영약 역시 같이 먹었다는 걸 말이다. 강운에게 배운 강뢰도법과 영약들, 금월상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져 엄청난 파괴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윽!”
보통 여류 무인들은 변, 쾌 중심으로 무공을 배운다. 그건 갈유월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둔중한 금월상을 잡기 쉬워야 하는데, 금월상의 강함이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하긴 스승님이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오 년 전 정해졌던 오룡삼봉은 역사적으로 기억될 기수라고 말이다.
금월상은 갈유월을 계속해서 압박해나갔다. 갈유월은 어쩔 수 없이 금월상의 도와 칼을 맞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손바닥 살갗이 벗겨졌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금월상은 도를 거꾸로 뒤집었다. 당연하지만 갈유월에게 더 이상 살수를 날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허나 금월상은 눈치 채지 못했다. 갈유월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형이 표홀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쉽게 쓰러질 것만 같았던 갈유월은 끊임없이 버텨댔다. 그 와중 갈유월은 본인이 본인 몸을 움직이면서 놀라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몸이 가볍지?’
갈유월은 모르고 있었다. 태원지기가 자연의 힘인 만큼, 몸이 화식(火食)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건 금목환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지금 갈유월은 태원지기를 직접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중원 최초로 고안해낸 것이다. 물론 그녀 본인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강함과 빠름에 적응하기 바빴다. 태원지기가 있는 갈유월은 인간의 힘을 비워내면 비워낼수록 태원지기로 가득 채워졌다.
갈유월의 검이 점차 속도를 더해갔다. 원래는 다섯 개밖에 넣을 수 없던 실초도 여덟 개로 변했다.
반면 금월상은 당황스러웠다. 몰아치면 몰아칠수록 약해지는 게 아니라 강해지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분명 힘을 숨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실제로 힐끗 보이는 손바닥은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고 있었고, 빨리 쫓아오던 눈도 느려졌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역전하기 시작하더니 빨라지고 강해졌다.
갑자기 금월상은 덜컥 겁이 났다. 갈유월이 선천지기를 터뜨린 게 아니라 걱정된 것이다. 분명 갈유월에게서 풍기는 힘은 무인이 일반적으로 축기하는 그것과 달랐다. 금월상도 선천지기를 터뜨린 걸 보지 못해 오해한 것이다. 태원지기와 선천지기는 명백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소저! 지금 뭐하는 건가?”
“왜요!”
“지금 나랑 생사결이라도 하자는 건가?”
“아닌데요?”
“아니긴!”
검과 도가 엉키고, 풀어졌다가 다시 엉켰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박투라고 볼 정도였다.
허나 시간은 갈유월의 편이었다. 시간이 곧 자연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쇅!
금월상의 도와 갈유월이 엇갈렸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간 거다. 그리고 그런 속도전에서는 당연히 갈유월이 금월상의 위였다.
“흡!”
금월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침을 삼키느라 움직였던 목울대에서 칼끝이 느껴졌다. 반면 금월상의 도는 갈유월의 목에서 세 치는 떨어져 있었다. 명백한 패배였다.
“대공자님. 이제 비켜주시죠.”
갈유월이 검을 거두지 않으며 금월상을 노려봤다. 금월상은 갈유월을 바라보더니 등 뒤로 도를 메었다.
“하.”
금월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갈유월을 바라봤다.
“목환이가 그렇게 좋소?”
금월상의 말에 갈유월이 순간 얼어버렸다. 갈유월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되물었다. 침착하자.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해야 한다.
“···아, 아, 아닌데요?”
“우리 가족 중에, 아니, 우리 세가 사람들 중에 소저가 목환이를 좋아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소? 평소에 적당히 티를 내고 다녔어야지.”
“제가 무, 무슨 티를 냈는데요?”
“눈 잘 못 마주치고, 얼굴 붉어지고, 목환이가 다른 곳 쳐다볼 때 몰래 쳐다보고···”
“그만, 그만하세요!”
갈유월은 소리를 치며 귀를 막았다. 무공은 이겼지만 논검은 완벽한 패배였다. 금월상은 그런 갈유월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행히 목환이는 모른다는 점이오. 그 아이는 감정이 거의 없는 아이요. 단순히 둔한 게 아니라, 절제되어 있는 것 같소. 우리는 그게 과거라고 추측하고 있지.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소. 우린 그게 뭔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지만.”
금월상의 씁쓸한 말에 갈유월은 내심 놀랐다. 금목환이 감정적으로 무던한 걸 넘어 무감각하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근데 그것에 대한 비밀을 밝혀보려고 한 적은 없었는데, 가족들은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던 거다.
문득 천주성에서 금목환이 본인 품에 안겼을 때 괴로워했던 게 기억이 났다. 대체 언제의 기억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힘들어했다. 아마 그 기억이 아닐는지.
하지만 정확하지 않으니 말을 아껴야 했다. 갈유월은 헛기침을 하고 말을 돌렸다.
“큼, 그러면 이제 앞으로 가면 금목환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아닐 거요.”
“네?”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무인끼리의 싸움에서 졌으니 당연히 비켜줘야 하는 게 상식이 아닌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나올 거냐고 성격이 나오려고 하기 직전, 금월상의 입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아끼는 막내를 주는 건데, 아무나에게 줄 수 없지 않겠나?”
금월상의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갈유월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가보게. 화청이가 기다리고 있을 게야.”
금월상은 갈유월의 어깨를 툭툭 쳐줬다.
“무력은 없지만 혀에 칼을 숨기고 다니는 놈이니, 너무 상처 받지 말게나.”
“···네?”
갈유월은 멍청하게 되물었다. 아직 그녀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