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극의일로(極意一路) (1)
210화 극의일로(極意一路) (1)
천하진은 팔꿈치에 기대어 정희수를 바라봤다. 부복한 정희수는 감히 위로 올려다볼 생각도 못했다.
“유현이가 죽었다라.”
“네, 속하의 잘못입니다. 제 목숨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정희수는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천하진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무표정했다.
“어떻게 죽었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소천마님은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돌아가셨습니다. 황금세가 가주는 제가 감히 볼 수도 없는 경지에 이른 듯했습니다.”
“유현이가 조금의 반항도 못하고 죽었다라.”
천하진이 턱에 괸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두들겼다.
둘 밖에 없는 회랑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오로지 빛이 비치는 곳은 녹색 제단이 있는 곳뿐이다. 제단의 뒤에는 천마 천하진이 앉아있는 의자가 있고, 제단 앞에는 무릎 꿇고 머리를 박은 정희수가 있었다.
“왜 자네를 살렸는지 짐작하겠나?”
“그것에 대해서는 딱히 언급이 없었습니다.”
“죽여도 가치가 없거나, 언제든 죽일 수 있거나.”
천하진이 대답했다. 정희수는 몸을 살짝 떨었다. 천유현, 금목환이 워낙 괴물이라 그렇지 본인도 마교의 팔마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게 자존심이 안 상할 수가 없었다.
“따로 남긴 말은 있었나?”
“네.”
정희수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말을 멈췄다. 본인에게 남긴 말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말이 있었다.
“아니, 있었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 너, 내가 아는 사람들, 네가 아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 네가 모르는 사람들의 총합이라고 말했습니다.”
정희수의 말을 끝으로 고요가 감돌았다. 너무 고요하자 정희수는 살짝 고개를 들어서 천하진을 바라봤다. 천하진의 눈빛은 빠져들어간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칠흑같았다.
“정말인가?”
정희수는 다시 바짝 엎드렸다.
“네,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유현이가 왜 죽었는지 이해가 돼.”
정말 이해가 된단 말인가. 대체 어떤 부분에서 이해가 됐다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검마.”
“네. 천마님.”
“난 자네를 아끼네.”
천하진이 부복한 정희수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사막을 지났다는 걸 티라도 내듯이 모래가 머리카락 층층이 껴있었다.
“자네는 만악의 근원인 말이 없고, 맡은바 일을 열심히 하지. 신실함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자네보다 열렬한 마신님의 지지자는 본교 내에서도 찾기 힘들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황송합니다.”
“황송할 필요 없어. 자네는 훌륭한 사람이야. 이 제단 앞에서 말하는 거니 의심하지 않아도 좋아.”
초록색 단상. 이곳이 바로 마신께 드리는 제단이 있는 명효숭성전이었다. 저 빛은 마신님의 눈으로, 마신님의 눈앞에서는 절대 거짓말이 용납되지 않는다.
“영광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자네는 잘못한 게 없으니 고개를 들게.”
천하진의 말에 정희수가 고개를 들었다. 천하진의 안면에는 따뜻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정희수는 어리둥절했다.
천마신교는 규율이 엄격하고, 그만큼 처벌이 많이 이루어진다. 같이 나간 소천마를 잃었으면, 책임 여하에 따라서 무조건 죽는 거라고 봐야 했다. 정희수는 본인이 죽을 생각을 하고 온 것이다. 물론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는 본인이 죽을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하진의 말은 예상과 전혀 달리 흘러갔다.
“난 자네가 내 진전을 이어줬으면 하네.”
“···네?”
“성씨만 천으로 바꾸면 되지. 어떤가.”
정희수가 당황해서 뭐라 말을 못하는 사이 천하진이 말을 이었다.
“유현이도 내 친자식은 아니야. 내가 언제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봤나. 난 스스로 완전한 인간이야. 유현이는 그저 소천대(小天隊)에서 재능을 빛낸 아이일 뿐.”
충격적인 소리였다. 천마가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천유현이 천하진의 친자가 아니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천마에 대한 불경이라 느꼈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천마가 스스로 천유현이 친자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유현이 죽었어도 비감을 표하지 않은 것인지. 정희수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자네가 내 양자가 됐으면 하네. 난 자네를 계속 눈여겨보고 있었지.”
정희수는 얼떨떨했다. 천마의 양자가 된다니, 천마신교의 신도로써 그것보다 영광된 일은 없었다. 소천마는 부제의 역할을 맡아 마신을 직접 알현할 수 있는 위치였다.
“···제, 제가 감히 할 수 있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정희수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천하진은 껄껄 웃었다.
“그래, 자네 이름은 이제 정희수가 아닌 천희수일세.”
그렇게 천마의 아들, 천마신교 부사제직은 공백 없이 이어가게 됐다. 정희수 본인의 나이는 불혹을 넘었고, 천마의 나이는 지천명을 조금 넘은 걸로 알고 있었다. 천하진은 열 살 차이도 안 나지만 부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다.
늘 천마에게 느끼는 거지만, 천마는 본인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
- 격문(檄文) : 본 천마, 천하진은 본좌의 아들 소천마를 잔인하게 죽인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을 본교 제일의 적으로 상정하는 바이다. 뜻이 있는 중원인이라면 금목환의 수급을 들고 오라. 천마신교가 당신을 위해 영광스러운 자리를 준비해놓았다.
감숙의 돈황에는 이런 격문이 나돌았다. 그 격문의 내용은 보름도 되지 않아 중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이 천마신교의 소천마를 죽였다!
그것만으로도 중원은 축제 분위기였다. 어떤 술집과 밥집은 손님들에게 밥값을 안 받기도 했다.
“흥, 의장님을 넘기라고? 마교 놈들이 드디어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대관절 중원 사람 중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중원 사람들의 금목환에 대한 신뢰치는 절대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금목환을 외쳤고 찾았다. 그러나 금목환은 두문불출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돈황에 있는 무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몇 시라고요?”
“어, 그게··· 오시였나, 미시였나···”
“똑바로 대답 안 해요?”
갈유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인이 움찔했다. 그는 바로 금목환을 마지막으로 본 무인이었다. 사실 무인의 잘못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금목환을 본 게 어찌 잘못이라는 말인가.
무인도 그걸 깨달았다. 자신이 이렇게 채근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살짝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소저는 의장님과 무슨 사이십니까?”
“···음.”
갈유월은 할 말이 없었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무한 무림맹에 있다가 금목환이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숙으로 온 것이었다. 딱히 어떤 사이를 상정하고 온 게 아니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치, 친구인데요?”
“친구? 친구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의장님이 누구한테 당할 사람도 아니고, 비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말이죠.”
갈유월은 움찔했다. 사실 갈유월은 명재희에게 똑같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한에서 감숙으로 나서기 전, 명재희에게 먼저 연락을 보내 금목환의 거취를 알고 있냐고 물었었다. 그러나 명재희는 방금 무인의 말과 똑같이 말했다. 그건 귀찮음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이 무인과 마찬가지로.
“알죠. 아는데···”
사실은 모르겠다. 금목환은 완벽한 사람이니까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냥 그에게 기대만 하고 있다.
왜 다들 금목환을 걱정하지 않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만 다른 세계에 사는 걸까. 평생 완벽하더라도 한 번 정도는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지 않은가. 왜 사람들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걸까.
“됐어요.”
이해를 못 받을 걸 직감한 갈유월은 무인들의 초소에서 나왔다. 깊은 곳에서 길어올려진 한숨이 돈황의 하늘로 날아갔다.
그러나 갈유월은 본인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같아도 본인을 굽히지 않았다.
갈유월은 마지막 수단으로 돈황에 있는 황금세가 안가를 들어가기로 했다. 사실 정말 뒤로 미뤄두고 싶었던 선택지였다.
- 안가는 접근 금지입니다.
명재희의 서한에서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냥 갈유월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다행히 무림맹의 정보담당인 비연각은 황금세가의 안가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갈유월은 명재희 몰래 안가의 위치를 받아놓은 것이다.
안가의 위치는 무인들의 초소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갈유월은 소매 속에서 지도를 펼쳤다. 지도가 알려준 곳을 따라가니 대나무숲 같은 곳이 나왔다.
“···맞아?”
대나무숲은 발 하나 못 들여놓을 빽빽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갈유월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이게 맞지.”
안가라면 비밀로 해야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위장술은 당연한 것. 또한 황금세가는 진법도 유명한 곳이다. 저번에 봤던 금목환의 누나, 금수린은 제갈세가 가주와도 진법을 논할 정도로 수준급의 진법가라고 했다.
그런 진법가가 있는데 안가에 진법 하나 덧씌우지 않았을까. 당연한 생각이었다.
갈유월은 발검으로 대나무숲의 대나무를 찔렀다. 순간 찔린 대나무숲에서 세로로 동심원이 퍼졌다.
“역시 인식 저해진법.”
사실 감숙 북쪽은 사막지대인데, 대나무숲이 웬말인가.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지나갔던 건 인식을 저해하는 진법이 걸려있어서 그랬던 거다.
대나무숲이 깨지고 나니, 어느새 갈유월은 울창한 숲에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왔던 길이 사라져 있었다.
“···하긴, 이게 끝일리가 없지.”
갈유월은 담담하게 본인에게 처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중원 최고 수준의 진법을 제 발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인식 저해진법은 일반인을 위한 것이고, 지금 이 숲은 침입자를 위한 것일 터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공격 기능이 추가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무림맹의 비연각도 안가를 알려주면서 걱정을 표했는데, 그건 명재희와 같은 이유였다.
- 거기 잘못 들어가면 죽어요.
팽!
순간 뒤에서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갈유월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갈유월의 굽힌 등 위로 쇠뇌가 날았다.
갈유월도 태원지기를 다루면서 삼화취정의 단계에 들어선 참이었다. 사실 초절정고수가 기관진식 따위에게 당하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런데 황금세가는 그게 말이 되게 했다. 실제로 갈유월이 조금만 경지가 낮았으면 등이 꿰뚫려 꼬챙이가 됐을 거였다.
다만 그 쇠뇌의 높이는 꽤 높았다. 애초에 조준용이 아닌 위협용이었던 거다.
“살벌하네.”
뒤를 돌아보자 빽빽했던 나무가 길을 비켜주듯 좌우로 갈라졌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왔던 길이 보였다.
“하.”
갈유월이 헛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제 갈유월도 본인의 감정을 알았다. 물론 아직 명확하게 직시는 힘들었다. 직시를 할라치면 부끄럽다는 감정이 물 밀 듯이 쏟아져내렸으니 말이다.
갈유월은 본인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평소보다 빠른 박동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건 진법에 대한 긴장이 아니었다. 금목환을 만나기 전 설레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