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세가 절대무신-208화 (209/225)

208화 서쪽을 벗어나면 벗 하나 없으리니

208화 서쪽을 벗어나면 벗 하나 없으리니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위성의 아침비가 내려 먼지를 적시고,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푸르고 푸른 객사에 청신한 버들잎 새롭다

勸君更進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그대에게 권하니 술 한 잔 비우게나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서쪽 양관으로 떠나면 벗 하나 없으리니

*

돈황을 벗어나면 광막한 사막이 기다리고 있다. 모래폭풍이 내 몸을 한바탕 쓸며 가버린다. 순간 내 옷과 소매가 빵빵하게 분다. 내 몸 안에 있는 모래가 모두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손으로 혼원지기를 빼어들었다. 혼원지기의 회색은 옅어져 있었다. 모래바람이 내 몸을 뒤덮으면 뒤덮을수록 회색은 옅어졌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옥문관으로 향하는 방향만 정해서 일직선으로 쭉 걷고 있었다. 사막은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가웠다. 내가 그렇게 걷는 와중이었다.

한 무리의 표행을 만난 것은 말이다. 그들은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눈이 깊었으며, 코가 컸다. 서역 사람을 먼발치서 몇 번 봤지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그들은 보자마자 내게 강압적으로 느껴질 만큼 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봐, 이봐. 사막을 혼자 횡단하면 모래한테 집어삼켜질 수도 있다고.”

“괜찮습니다.”

그들은 중원말이 좀 어색했지만 아예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그들은 끈덕지게 날 따라왔다.

“저런, 나이도 어린 친구 같은데 왜 그리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건가?”

“원래 중원인은 본래 나이보다는 어려보여.”

“그래도 저건 너무 어리잖아.”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서역 상인들이 날 알아서 뭐하겠는가. 날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좀 흥미로웠다. 이제 중원에서 날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표물 수레를 이끌고 나를 감쌌다. 나를 둘러보며 마치 관상용 식물처럼 둘러봤다.

“거 참, 잘생긴 청년이네. 뭐 그리 세상이 힘들다고.”

“중원이 살기 힘든 곳이기는 하지.”

서역 상인들은 여전히 날 두고 왈가왈부했다. 자기들끼리 말하는 건지, 날 들으라고 말하는 건지 모를 이상한 화법이었다.

“전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갈 곳이 있을 뿐이에요.”

일단 난 그들의 오해를 풀어줘야 했다. 서역 상인들은 그래도 안 믿는 눈치였다.

“그 나이에 이쪽으로 올 일이 뭐가 있다고. 우리가 못 믿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

“자, 봐봐.”

서역 상인들은 한 모래 언덕을 가리켰다. 나도 눈치를 못 챘지만, 그곳은 모래 언덕이 아니라 백골의 언덕이었다. 모래에 덮여 백골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중원 사람들은 왠지 몰라도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던데. 그러니까 여기서들 많이 죽지.”

이른바 자살명소라는 걸까. 나는 그 백골들을 바라봤다. 사실 중원 사람이 서역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면 여기로 올 일이 없다. 서역 상인들이 오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서역 상인들은 자기들끼리 얘기를 시작했다. 침묵을 미덕으로 삼는 중원인들과 달리 서역인들은 말하고 표현하는 걸 미덕으로 삼는 모양이었다. 말할 때마다 손짓 발짓 섞어서 하고 반응도 뛰어난 걸 보니 말이다. 그걸 보니까 묘하게 재밌었다.

“중원인들은 좀 이상해. 가끔 죽음을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는 말이야.”

“그렇지. 그들은 멍청해.”

중원인 앞에서 중원인을 뒷담화하는 이들은 무슨 족속들일까. 아니, 이건 그냥 앞담화였다.

“생명이라는 건 인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축복인데, 그걸 모르고 있어. 너네 협객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말이지.”

서역 상인들은 낄낄 웃었다. 살짝 기분이 나빴다. 중원인을 관통하는 말이라면 당연히 의협일 것이다. 그 핵심을 비웃으면 중원인을 비웃는 거나 다름없었다. 난 그러나 그냥 듣고 있었다.

“세상에,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니. 그런 농담이 세상에 어디 있나?”

나는 그때쯤 되어서야 못 견디겠다고 생각해 한 마디 하려 했지만, 다음 말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근데 그게 우리가 중원에 오는 이유기도 하지.”

누군가가 말했다. 다른 서역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게. 내가 언제 안서를 통과한 적이 있었지. 그때 중원에 처음 상행을 왔을 때인데, 그만 사막의 비적들을 만나고 말았지. 같이 온 상인들 몇몇은 죽고, 수레 세 개 중 두 개는 불타고 말았지. 나도 꼼짝없이 죽겠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랑 전혀 상관없는 무인들이 우리를 도와줬어. 그때 감동이란, 참.”

“나도 그런 적이 있어. 그래서 내가 수레의 물품들을 보상으로 주려했는데, 한사코 받지 않더군. 난 그때 이해가 안 됐어.”

“어, 나도 그랬지. 나도 왠지 그게 멋있어서 고향에 가서 따라해 봤단 말이야. 욕만 먹었지.”

“뭔가 이상한 단어야. 우리 말에는 협객이라는 단어가 없거든.”

나는 잠깐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협객을 욕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협객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협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엔 한참 이해 안 되겠지만, 느낀 바는 있는 것이었다.

딱히 중원인에 대해 자긍심이 차오르지는 않았다. 중원인이라는 건 나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저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걸,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 인간을 초월하여 초인이 되면 자연을 거스를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겐 그런 잠재력이 있다.

종남의 비동에서 봤었던 문구가 기억이 났다. 인간의 잠재력. 그 잠재력 때문에 난 시간을 건너온 거다. 내게 그런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잠재력을 난 사용했을 뿐인 거다.

나는 서역 상인들이 보이지 않게 혼원지기를 이끌어 내봤다. 아까 옅어졌던 회색이 다시 진하게 돌아와 있었다.

태원지기는 자연의 힘, 태을헌원신공은 인간의 힘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서역에는 협객이라는 단어가 없다라.

문득 생각이 났다. 증조할아버지가 내세운 가훈.

자신보다 강자 앞에서 약자의 편을 들 수 있겠느냐?

의와 협이 무너지는 곳에서 비통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해묵은 원한을 해결했을 때 공허하지 않을 자신이 있겠느냐?

믿고 있는 사람이 거짓 음해로 흔들릴 때 더 큰 믿음을 줘서 안심시킬 수 있겠느냐?

눈앞에 있는 사람을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로 판단할 수 있겠느냐?

절망은 희망 앞에 무력하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생각해보면 이건 상가의 가주가 외우기에는 과한 훈령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왜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먹힐 걸 예상하지 못하고 무력을 포기했나.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랬던가.

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얼마 되지 않아 싱그러운 느낌이 뺨에 스쳤다. 청신한 버들의 냄새였다. 사막에선 있을 수 없는 나무였다.

난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아들, 무슨 일 있느냐?”

난 뒤를 돌아봤다. 모옥을 둘러싼 각진 울타리들. 여기는 아버지가 갇혀있었던 적벽이었다.

난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어색한 중원말을 뱉는 서역 상인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이봐, 중원 청년! 모래 폭풍이 온다고! 빨리 숨어!”

까칠한 모래가 뺨에 부딪친다. 눈을 떴다. 난 고개를 꺾어 위를 바라봤다. 하늘과 이어진 모래 소용돌이가 보였다.

난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고요한 공기가 느껴졌다.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하얀색 호랑이와 녹색 용이 싸우는 그림이었다.

내 방이었다. 내 손은 펼쳐보니 아주 작아져 있었다. 손의 크기로 보아하니 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았다.

이건,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나한테 이런 능력이 생긴 걸까.

난 시간을 거스를 수 있었다.

*

중원은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목내이 같은 시체가 많아진 것이다. 정파 사람들의 오기조원에 대응되는 극마지경(極魔地境)의 마인의 수가 틀림없다고들 했다.

“벌써 당한 초절정 고수만 해도 백 여명, 절정고수만 해도 오백 여명이야.”

“흡성대법의 일종일까요?”

“그러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거군.”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중원 한복판에서 저런 짓을 하는지.”

무서운 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단 한 사람이라는 거다. 보통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면 습관 같은 흔적이 남는다. 같은 무공을 쓰더라도 습관에 따라 상흔이 달리 나니 말이다.

당한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에게 당한 것이었다. 중원에 마인 흡혈귀가 돌아다닌다는 얘기는 순간 모든 사람들을 얼어붙게 했다.

오로지 한 사람의 영향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는 옥문관으로 향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을 떠돌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없는 건가?”

“그런 걸 수도 있죠.”

“근데 이미 극마지경인데 자신이 없을 수가 있나?”

사람들은 추측했지만, 방 안에서 하는 추측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었다.

계속 천유현에 의해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고, 정희수는 그 시체들을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끌어다놓았다. 그래야 공포심을 자극한다는 것이었다.

“참 재밌어. 천추마령신공이 이렇게 빨리 오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정희수의 말에 천유현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사실 신강에서 천추마령신공을 수련하기는 힘들었다. 희생자가 꼭 필요한 무공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중원에는 눈에 걸리는 사람마다 모두 죽일 사람들이었고, 그에 따라 며칠 걸리지도 않고 극성을 달성한 것이다.

정희수는 천유현을 바라봤다. 지금은 갈무리하고 있지만 천유현의 마기는 본인이 느낀 어느 사람보다 강했다. 참고로 천마의 마기는 본 적도 없다.

‘이 정도면 삼선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삼선은 등봉조극의 영역이라고 했다. 등봉조극은 탈마지경(脫魔地莖)에 대응된다. 검마 정희수도 지금 극마지경인데, 지금 천유현을 이길 자신이 도통 없었다.

탈마지경을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극마지경인 정희수가 이 정도 위압감을 느낄 정도면 탈마지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립인데, 탈마지경에 들어왔던 거다.

정희수와 천유현은 청해를 돌아 감숙으로 넘어갔다. 섬서를 통해 감숙으로 가는 건 너무 뻔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넓디넓은 중원을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방어하기는 어려웠다. 고수 두 명이 빠져나가려고 하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실 청해에서 신강으로 바로 넘어가도 됐지만, 천유현은 굳이 감숙으로 갔다. 정희수는 잠깐 신강으로 돌아갈 걸 건의해볼까 했지만, 박용한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떠올리고 참았다.

“아주 티를 팍팍 내고 있군.”

천유현이 멀리 바라보며 웃었다. 옥문관 현판 꼭대기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당연히 금목환이었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금목환과 천유현의 눈빛이 마주치기는 충분한 거리였다. 심지어 대화까지 할 수 있었다.

금목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왔군.”

“혼자인가?”

“당연히. 당신은 아니군.”

“이 녀석은 안 끼어들 거야.”

“그래.”

짧은 문답이 오갔다. 순간 천유현의 발에서 보라색 기운이 동심원을 그렸다.

쾅!

순간 땅을 박찬 천유현이 하늘로 날았다. 극성으로 익힌 천추마령신공을 보여줄 때였다.

순식간에 맑았던 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하늘이 점점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금목환은 여전히 현판 위에 앉아있었다. 반쯤 눈을 감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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