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설마요
207화 설마요
난 만년한철로 된 철인을 목검으로 두드렸다. 강기를 두르지 않으면 흉터조차 나지 않는 훌륭한 재질이었다. 만천조종검의 일 초식부터 오 초식까지 펼친다. 내공으로 관절을 보하지 않으면 여전히 무리가 왔다. 아직 완벽히 내 것이 안 됐다는 증거였다.
한 번 더 해보려고 했지만, 멀리서 사람이 오는 게 느껴져 목검을 철인 옆에 기대놓았다.
내가 볼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있는 안뜰로 향한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한유림이었다. 그녀가 내 거처를 지키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주님. 증원이 오셨습니다.”
“그래?”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또 증원이었다. 보통 증원이 오면 증원대장은 나를 보기를 원했다. 나한테 눈도장을 찍으려는 것이다.
“사랑방으로 모셔.”
그런 의도를 알아도 나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눈도장을 찍는 게 나쁜 일도 아니다.
아무튼 내가 격문을 보낸 후, 감숙에서 전력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증원이 되고 있었다.
내 격문으로 인해 감숙에 있는 옥문관에서 무언가가 일어날 건 자명해진 바. 불확실한 위험이라면 몰라도 확실한 위협에 문파들이 한 손씩 보태는 것이었다.
결국 감숙은 어느 때보다 강한 전력을 유지하게 됐다. 마교 입장에서는 골치 아프게 됐을 거다.
나는 훈련하던 걸 갈무리하고 사랑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유림은 다시 자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자리는 내 거처의 정문이었다.
난 사랑방 문 앞에 서서 문고리에 손을 대다가 멈칫했다.
원래라면 증원대장 한 사람만 있기 마련인데,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심상치 않았다.
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노인 셋이 눈에 들어왔다. 두 명은 졸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깼다.
“왔군.”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내가 들어와도 일어서지 않았다. 그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당금 중원에서 이들을 일어나게 할 사람은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약선님.”
난 먼저 중앙에 앉아있는 약선에 포권을 했다. 그 뒤에 있는 사람들도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약선 뒤의 두 명 중 하나는 선풍도골을 한 노인이었고, 하나는 거지꼴을 한 노인이었다. 그들이 품은 기세로 보았을 때, 난 그들이 누군지 쉽사리 알 수 있었다.
“검선님, 만리유유선님도 처음 뵙겠습니다.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입니다.”
“오. 우리를 알고 있군.”
뒤에서 가만히 있던 만리유유선 소취악, 검선 오유해가 작은 탄성을 뱉었다.
“어떻게 알아봤나?”
“품고 있는 기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눈을 가지고 있군.”
오유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날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마치 진열장에 놓인 상품이 된 기분이었다.
“오히려 내가 영광이지. 현재 중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만났으니 말이야.”
“과언(過言)이십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근데 어째서 오신 겁니까?”
“따지는 건가?”
“절 놀리러 오셨군요.”
“전보다는 재미있어졌는데.”
화종도는 껄껄 웃었다. 난 진심으로 그들이 왜 온지 궁금했다. 내가 아무리 중원합동회의를 만들어서 모든 이들을 품으려고 해도, 삼선이나 옛 선배들은 예외였다. 그들 중에는 은퇴한 사람들도 많았고 당장 전력에 도움 안 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옥문관에서 한 판 한다기에 말이야. 그래서 왔지.”
“그렇군요.”
그들도 역시 내 격문을 보고 온 것이었다. 이 정도면 정파 전력의 반 이상이 감숙에 몰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느냐?”
역시 오자마자 약선은 볼멘소리부터 했다. 나와 개인적인 연이 없는 정파 사람들이야 나를 멋지다, 화끈하다 이런 식으로 띄워줬지 개인적인 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장 우리 세가의 형제들, 스승님, 종리운, 갈유월 등 많은 사람들이 내게 서한을 보냈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그것들에 대한 답장은 아직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왜?”
“그래야 중원에 있는 폭탄마들을 부를 수 있었거든요.”
“솔직히 그 격문을 보고 오겠나? 자네가 세가의 명예를 걸고 혼자 있는다고 해도, 그들은 못 믿을 텐데.”
“올 겁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라면요.”
내가 딱 단정 지었다. 화종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있는지 알고 있다고?”
“네.”
“누군데?”
“소천마입니다.”
내 말에 화종도는 흠칫 놀랐다. 소천마는 정파의 입장에서는 어떤 정보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천마에게 아들이 존재하고, 그가 뒤이어 천마신교를 받을 소천마라는 것까지밖에 모른다.
“소천마를 알고 있나?”
“네. 애뇌산에서 봤죠.”
여기서부터는 더 말해도 그들이 모를 거였다. 천유현은 분명히 날 죽이고 싶어할 거다. 난 마교의 경향성이 묘하게 바뀐 것이, 소천마의 영향이라고 사실상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마교의 인물과 직접 접촉한 건 천유현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가 마교를 움직일 수 있는 자리라는 건 공교롭기까지 하다. 원래 전생에서 천유현은 강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 때문에 강경한 사람으로 변했을 거다.
“뭐, 어떻게 알았냐고 해도 안 알려주겠지.”
“아뇨. 알려드릴 수 있죠.”
“어? 그런가?”
난 화종도에게 내가 중원에 들어온 사람이 소천마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줬다.
간단한 추리였다. 오 년 전 천유현이 있던 애뇌산 부근에서 목내이 같은 시신이 발견됐고, 옥문관의 시신들도 목내이 같이 변해있다고 했다. 시체를 그런 식으로 만드는 마공이 많을 리가 없다. 결국 애뇌산에 온 사람과 옥문관을 통과한 사람은 동일인물이라는 거였다.
거기다가 칠존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조건까지 포함하면 범위는 더욱 좁아진다.
“근데 소천마 정도 되는 인물이 혼자 나왔을까?”
“뭐, 다른 사람이 붙어 있어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래? 자신있나보군.”
화종도는 입맛을 다셨다.
“그럼 괜히 왔는데. 걱정돼서 한 번 와봤더니 말이야.”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삼선님들께서 맡아주시면 아주 제가 편할 것 같군요.”
그 말에 삼선이 서로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 눈빛들이 내게로 모였다.
“뭔데?”
“별 거 아닙니다. 제가 옥문관에 가있을 때 정파의 지휘를 좀 맡아주셨으면 해서요.”
나는 아직 멍해 보이는 노인들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혹시나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뭐, 자네 부탁이니 잠깐 있는 거야 어렵지 않지.”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뭔가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화종도가 물었다.
“설마, 격문을 쓰면 내가 올 줄 알았다거나?”
“설마요.”
난 싱긋 웃음을 지어줬다. 화종도나, 오유해나, 소취악이나 모두 미심쩍은 표정을 했지만 그들이 아무리 고수라도 내 마음을 꿰뚫어볼 수는 없었다.
*
“이건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말이 많았던 박용한도 박용한이지만, 이번에는 정희수까지 같이 거들었다. 천유현은 혀를 찼다.
“막는 이유가 뭔데?”
“함정일 수 있습니다.”
“함정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혼자 있다는 건 진짜야. 그것만 있으면 충분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박용한의 물음에 천유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너희들이 말해도 모르지.”
대놓고 깔아보는 말투에 박용한과 정희수는 표정이 무너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실제로 칼을 맞대보면 알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이야. 그놈은 고지식한 놈이야. 내가 볼 때는 정파형 인간의 완성형이라고 해야 할까.”
천유현의 부연설명에도 박용한과 정희수는 잘 모를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지금 산동에서 감숙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절강으로 가서 빠져나가야 했지만, 계획에서 벗어나 천유현이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천마님의 명령과 배치되는 부분입니다. 저희는 비마진천만 시험하러 나온 것입니다.”
박용한은 계속 따라오면서도 잔소리를 했다. 천유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정희수는 그 미소에서 순간 싸늘함을 느꼈다.
순간. 정말 한 순간이었다. 번개처럼 천유현이 박용한의 머리로 손바닥을 뻗었다. 박용한이 워낙 거한이라 올려 뻗는 것이었다.
박용한은 머리를 뒤로 빼면서 천유현의 팔을 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천유현의 팔은 오히려 뱀처럼 박용한의 팔을 휘감아갔다. 그렇다고 박용한이 마냥 당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발바닥으로 천유현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천유현은 밀려나기는 커녕 박용한의 품속으로 더 뛰어들었다.
“뭐하는 짓입니까!”
박용한이 외쳤다. 하지만 천유현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박용한과 천유현의 손이 뒤엉키고 삼십 합을 나눴다. 천유현의 손에서 점점 보라색 기운이 나오고, 박용한의 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산서의 어느 관도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초절정 고수들끼리의 전투라 근처 바위들이 들리고 나무들이 뽑혀 날아다녔다. 정희수는 대경해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의 싸움을 보고 있었다.
“난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안 되는 부하는 필요 없거든.”
천유현의 말에 박용한이 입술을 씹었다. 박용한은 감히 소천마에게 살수를 날릴 수 없어 방어만 했지만, 천유현의 수는 살수들 뿐이었다.
박용한은 정말 천유현이 자신을 죽일 거랒는 생각에 가닿았다. 그도 무인이다. 진짜 살기와 가짜 살기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박용한은 바로 본인의 독문무공인 심마환상공을 펼쳤다.
천유현의 눈빛이 잠깐 다른 곳을 보는 듯했다. 눈빛의 초점이 흐려지는 것. 심마환상공이 먹혔다는 대표적인 증거였다.
박용한이 잠깐 숨을 돌리려고 했다. 심마환상공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언제 깰지 몰랐다. 그러나 이때를 틈타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검마! 이걸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박용한이 외쳤다. 허나 검마 정희수는 마땅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희수도 고민이었다. 갑자기 소천마와 마교의 장로급인 팔마가 싸우는데 누구 편을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때 정희수의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박용한의 뒤통수로 천유현이 손을 뻗고 있는 것이었다. 잠깐 박용한이 정희수에게 한 눈을 팔 때였다.
“환···!”
정희수가 외치려고 했지만 천유현은 이미 환마의 뒤통수를 잡아버렸다. 환마 박용한이 뭘 하기도 전에 천추마령신공이 발동했다.
“으아아악!”
그건 그야말로 영혼이 빨리는 것만 같은 비명소리였다. 눈과 코, 입, 피부가 천유현이 잡고있는 뒤통수로 몰려서 가는 것 같았다.
“이봐. 내가 그런 허접한 수작에 걸릴 것 같아?”
천유현이 살기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정희수는 깨달았다. 천유현은 심마환상공에 걸린 게 아니라 걸린 척을 했던 것이었다. 잠깐의 틈을 만들기 위해서.
“팔마를 한 번쯤 먹어보고 싶기는 했지.”
천유현이 낄낄 웃었다. 박용한의 굵직한 팔다리가 점점 말라가고 비틀어진다. 버둥거리던 박용한의 움직임이 곧 멈췄다.
“오, 한 번에 확 강해진 것 같은데.”
천유현은 그제야 박용한의 뒤통수에서 손바닥을 떼어냈다. 발로 차니 박용한의 시체가 우수수 부서졌다.
“이 정도면 만나러 가도 되겠는데.”
천유현이 정희수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웬만한 사선을 달려온 정희수도 그 웃음에는 소름이 안 돋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