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격문(檄文)
206화 격문(檄文)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사람들은 팽의석의 눈치를 봤다. 허나 팽의석의 눈은 오히려 아까보다 침착해져 있었다. 이미 벌써 그는 나를 상대로 인지하고 있는 거다. 상대라고 인지한 순간 방심은 없었다.
“모든 비무는 이기려고 하는 거긴 하지.”
팽의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칠존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가볍지는 않다네.”
“올해 바뀔 수도 있는 자리죠.”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은 도발적이었다. 오 년 전에 용봉지회가 펼쳐졌으니, 올해는 천하제일인을 가리는 선불지회가 열리는 해였다. 물론 마교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무기한으로 밀리기에 올해 할지는 불투명하지만 말이다.
규격화 된 건 아니지만 삼선이나 칠존 같은 별호들은 선불지회에서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선불지회에서 팽의석보다 도를 잘 쓰는 후학이 있다면 그에게 도존이라는 자리를 내줘야 할 거였다.
난 팽의석에게 십 년 전의 기량과 같냐고 질문한 것이었다.
“하북팽가가 도존이라는 자리를 놓친 적은 단 두 번에 불과하지. 사실상 도존이라는 자리는 하북팽가 내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어.”
팽의석이 나지막이 말했다. 얼핏 듣기에 오만한 말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중 도를 다루는 곳은 하북팽가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 아들들이나 손자 녀석들은 아직도 내게 인정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네.”
팽의석의 눈동자가 안광으로 가득 들이찼다. 난 직감적으로 비무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도가 내 어깨를 향해 찌르고 들어왔다. 어떠한 변화도 없었지만, 그 속도와 힘은 내가 중원에서 상대한 누구보다 강했다.
난 검을 종(縱)으로 늘어뜨렸다. 횡을 종으로, 종을 횡으로 막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수왕도와 송로가 부딪쳤다. 두 손목에 커다란 충격이 퍼졌다.
“선배님이라 삼 초식은 양보해줄 줄 알았는데요.”
“지도 비무라면 그렇겠지. 근데 자네는 그걸 바란 게 아니지 않은가?”
검과 도가 맞부딪고 있을 때 한 마디를 나눴다. 그리고 팽의석과 내 신형이 움직였다. 시야가 확확 돌아간다. 어쩔 때는 공중에 떠서 바닥을 바라보고 있고, 어쩔 때는 팽의석과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어쩔 때는 팽의석의 등 뒤를 본다. 팽의석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공터에는 호흡 소리조차 없이 칼과 검이 부딪치는 묵직한 소리만 울려 퍼졌다.
수왕도에서 푸른빛과 구름에 감싸진 천둥소리가 들렸다.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였다. 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도가 내 머리를 노리고 들어온다. 내공을 거꾸로 씌워 살수는 아니었지만, 일반 사람이 맞는다면 머리와 어깨가 같은 수평에 놓이게 될 일격이었다.
난 만천조종검을 펼쳤다. 대라회연의 세찬 곡류(曲流)가 내 몸을 감싸고 내 몸에 닿으려는 모든 것을 바깥쪽으로 흘려보낸다. 심지어 대기마저도. 잠깐 진공 상태에 빠져 소리조차 내 귀에서 벗어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눈이 튀어날 정도의 압력이 가해진다. 강한 물결의 문을 팽의석이 강하게 두드리고 있는 거였다.
쨍!
강한 강기가 부러지면 그런 소리가 났다. 난 그런 걸 처음 알았다. 대라회연이 팽의석의 혼원벽력도에 깨진 거다.
나를 감싸던 방패막이 깨지면서 밀어놨던 소리와 대기들이 내 몸 안으로 빨려들어온다.
“보이지도 않는군. 대체 어떻게들 움직이고 있는 거지?”
“도존님이야 그렇다 쳐도···”
구경꾼들의 소리가 들린다. 순간 정면의 도가 부채꼴처럼 퍼졌다. 수십개로 보이는 도의 잔상들이 모두 내게 짓쳐들어왔다.
“오호단문도!”
“저 정도면 살수가 아닌가?”
“스치면 죽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강하게 진각을 밟아 내 쪽 땅을 꺼뜨렸다. 강하게 밟아서 삼 척은 땅이 움푹 들어갔다. 팽의석과 나 사이에 하나의 층계가 생겼다.
“오!”
이렇게 피할 줄은 몰랐다는 듯 팽의석이 감탄해왔다.
팽의석의 도가 내 머리 위에서 웅웅 울린다. 등줄기에서부터 소름이 차올라 머리에서 찌르르 울렸다.
오호단문도와 혼원벽력도가 번갈아서 자유자재로 펼쳐졌다. 팽의석은 내가 파놓은 땅의 테두리를 맴돌며 내 쪽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칼과 검이 맞닿으면 맞닿을수록 조금씩 나는 땅 속에 묻혀간다. 이 위급한 와중에도 신발에 버석거리는 흙이 불쾌했다.
계속, 계속해서 밀린다. 이미 구경꾼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다. 팽의석은 내 위의 자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듯 계속 나를 압박해왔다. 땅바닥으로 깊이 들어가면 내 운신의 폭이 적어졌다.
“그만 항복해라!”
내 몸이 허리까지 파묻힐 때, 팽의석이 도를 일직선으로 내려찍으며 내가 있는 땅 밑으로 달려들었다.
이때였다. 내가 팽의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순간 말이다. 팽의석이 공격 일변도로 나설 때. 난 이 상황을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궁지로 몰아야 했다.
“어어?”
“위험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팽의석의 도가 너무 패도적이라, 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거였다.
난 검에 혼원지기를 불어넣었다. 회색 소용돌이가 내 검에서 휘몰아친다.
“···이상한 힘을!”
팽의석이 일갈했다. 나의 검극과 팽의석의 칼끝이 부딪쳤다. 팽의석의 강기와 내 혼원지기가 맞부딪쳤다. 팽의석의 눈이 크게 떠졌다. 회색의 혼원지기가 팽의석의 강기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원지기는 팽의석의 강기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커졌다. 혼원지기의 색깔이 강기를 흡수할수록 짙어졌다. 어느덧 혼원지기는 팽의석과 나를 완전히 삼켜버릴 정도로 커다랗게 팽창해있었다.
“이건, 대체···”
팽의석이 거대한 해일처럼 입을 벌린 혼원지기를 바라봤다. 거대하게 펴진 혼원지기가 일거에 팽의석을 덮쳤다.
콰콰콰쾅!
주변 땅이 갈라지고 뒤집혔다. 파장이 컸던지 저 멀리 구경꾼들에서부터도 비명이 들렸다.
*
사실 금목환이 오기조원에 이르렀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소문은 많이 퍼져나가지 않았는데, 너무 현실감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천재형 무인이라고 해도 이립은 되어야 삼화취정에 들고, 불혹은 되어야 오기조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금목환은 이립에서 다섯보다 적은 스물다섯에 오기조원에 이르렀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과장과 허풍이 일상인 중원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말 오기조원에 이르렀다고?”
“말도 안 돼! 매화검존도 그 정도는 아니셨는데?”
아직 모래먼지가 다 걷히지 않아 승패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보여줬던 금목환의 신위는 도저히 스물다섯의 그것이 아니었다.
“···도존님께 그런 말을 하는 게 오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군.”
“아무리 살수를 교환하지 않았다지만 대등해 보였어.”
“몇 초식을 서로 겨룬 거지?”
“삼십 초는 겨룬 것 같은데.”
숨 막히는 공방에 본인들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던 구경꾼들의 입이 그제야 트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그 회색을 띤 기운은 뭐지?”
“뭔가 오묘했어. 보기에는 도존님의 기를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기가 어디 있나?”
“의장님이 무공을 만드는 종사신 걸 이미 다 알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사람들의 왈가왈부 속에 모래먼지는 서서히 걷혔다. 사람들은 집중해서 모래먼지 안을 보려고 했지만, 강기가 뒤엉킨 모래먼지는 안을 보이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뭐야? 뭐야?”
“누가 이겼지?”
뿌연 모래먼지 너머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인영은 처음에는 하나처럼 보였지만, 두 개의 인영이 겹쳐서 그리 보인 것이었다.
두 개의 인영. 곧 먼지가 걷히고 금목환과 팽의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방금까지 과격한 비무를 펼쳤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행색이었다.
먼저 느리게라도 움직인 건 팽의석이었다. 그는 도를 갈무리하고 땅바닥에 꽂았다.
“가져가라.”
팽의석이 하북팽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봤다. 도를 회수하라는 뜻은 비무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금목환도 조용히 검을 집어넣었다. 사람들은 승패를 몰라 눈치를 보는 도중. 팽의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장.”
“네.”
금목환이 짧게 대답했다. 나지막한 소리들이었지만 침묵한 사람들이 듣기에는 충분했다.
“어떻게 한 달 만에 잡겠다고 하는 거지?”
“그들에게 기회를 줄 겁니다.”
“무슨 기회?”
“오 년 전에 못 잡았던 저를 다시 잡을 기회를요.”
팽의석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바로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정말 늘 내 생각을 뛰어넘는군.”
“칭찬이면 감사하게 듣겠습니다.”
“그럼 칭찬이지.”
팽의석이 웃었다. 방금까지 살기 넘치는 칼을 맞댄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애가 넘치는 웃음이었다.
“알아서 하게나. 자네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
“감사합니다.”
팽의석은 말이 끝난 듯 금목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본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하북팽가는 감숙에 있는다.”
그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
검은색 일색인 매가 하늘을 맴돌았다. 천유현이 머리를 하늘로 꺾었다. 천유현이 팔을 꺾어 낫 모양으로 만들자, 매는 그제야 천천히 활강해 천유현의 팔을 잡았다.
노란 발목에는 접은 종이가 묶여있었다. 천유현은 다리에 끈을 조심히 풀어 종이를 펼쳐봤다. 정희수와 박용한은 긴장된 모습으로 천유현을 바라봤다.
“감숙에 전력이 빠진 것 같지는 않다는군.”
천유현의 말에 정희수는 고개를 숙였고 박용한은 한숨을 쉬었다.
“며칠 전까지는 당장이라도 나갈 것만 같은 애들이 뭔 심경의 변화인지.”
박용한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당장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산동이라는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게 아니었다. 중원 내륙을 혼란스럽게 하면서 감숙의 전력을 빼고 습격할 예정이었다. 천마신교가 중원을 습격하는 데는 감숙만한 길이 없다. 청해는 고산지대고, 아니면 열악한 사막을 건너야 한다.
그 초석을 닦기 위해 정예인 혈사대(血嗣隊) 오백 명이 토로번(吐魯番)에서 대기를 하고 있기도 했다. 근데 지금처럼 전력을 안 빼고 있으면 혈사대도 쓴물을 삼키며 천산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반응이 있지 않을까요?”
“아니. 아예 갈무리가 된 것 같군.”
천유현은 그러면서 종이를 뒤집어 박용한과 정희수에게 보여주었다.
- 이틀 전 금목환이 감숙에 입성한 걸 확인.
“이제는 익숙한 이름이지.”
천유현이 말한 그대로 이제 금목환은 신강에서도 유명한 이름이었다. 중원합동회의의 의장으로 정파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또 금목환이 뭔가 수를 썼군요.”
“그런 것 같아. 그때 죽였어야 되는데, 참 아쉽지.”
천유현이 혀를 찼다. 박용한도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이렇게까지 거물이 될 줄 알았으면 천유현도 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죽였어야 했다. 그러나 과거를 아무리 후회한들 바뀌는 건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뭐, 돌아가야지.”
마탄의 시험 폭발만 떨어뜨리고 신강으로 돌아가면 된다. 천유현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때 저 멀리서 검은 매 하나가 쾌속하게 날아왔다. 그 매는 천유현의 머리 쪽에서 흰 똥을 찍 쌌다. 천유현은 바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비상인 걸 알리는 게 똥 싸는 것밖에 없나?”
매가 똥을 쌌다는 건 그야말로 시급한 사항이라는 뜻이다. 천유현은 매를 낚아채 다리에서 종이를 풀어냈다.
천유현은 종이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십니까?”
박용한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천유현은 이번에도 종이를 돌려 보여줬다.
- 격문(檄文) : 현재 중원을 어지럽히는 마교도들에게 고한다. 옥문관에서 만나고 싶다. 난 내 세가의 명예를 걸고 혼자 있을 것이다.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
그것은 금목환이 전 중원에 뿌린 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