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시간을 거슬러
202화 시간을 거슬러
산화겸과 난 잠깐 거리를 뒀다. 산화겸은 당연히 내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이게 어떻게 송로라는 걸 알아봤죠?”
송로. 내가 무림맹에서 처음 받았을 때는 그냥 검병에 찢겨진 천이 감겨있는 허름한 검이었다. 그뿐인가. 날의 이빨도 군데군데 쌀알 크기로 빠져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송로는 달랐다. 장식이나 검병의 색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명검이라 불릴 정도로 강건한 칼날을 자랑하고 있었다.
“종남파의 사람이 그걸 못 알아보는 게 말이 안 되지. 사문의 보물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어찌 제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산화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도 역시 내 의문점을 알고는 있었다.
“벽리항 사조님께서는 그러셨지. 송로는 평소에는 은둔하다가 극성의 태을신공에 노출되면 서슬 퍼런 진신을 드러낸다고 말이야.”
“종남파는 알고 있었군요. 무림맹은 모르는 것 같던데.”
분명 종리운은 내게 이것이 명검이 아니라고 말하며 줬다. 산화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외인이 알 리가 없지. 사조께서 송로의 쓰임새를 본파에만 전해주고 갔으니 말이야.”
“쓰임새요?”
난 송로를 바라봤다. 사실 송로가 잘 드는 검으로 바뀌었다지만 내게 큰 영향을 끼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송로는 내 내공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검이었다. 아무리 칼날의 이가 빠져있다고 해도 내공만 잘 받아들이면 다른 검과 비교해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러니까, 어째서 이렇게 검의 형태로 바꿔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따라오게. 송로의 주인이면 딱히 검을 나눌 것도 없겠군.”
산화겸은 납검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송로의 주인을 제하고서라도 더 이상의 합은 의미가 없었다. 산화겸의 강기에서 그가 가진 내공의 심후함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산화겸은 본인이 파악당했다는 건 모를 거지만 말이다.
나도 따라서 납검을 하고 산화겸을 따라갔다. 산화겸은 구도전을 나가서 종남파의 내원으로 들어갔다. 많은 종남파의 제자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눈길을 끌만한 조합이기는 했다.
딱 봐도 산화겸은 종남파 내부에서도 괴짜 취급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외부인인 황금세가 가주와 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시선이 몰리는 거였다.
산화겸의 발걸음은 점점 더 인기척이 없는 곳으로 나아갔다. 모르긴 몰라도 비처로 나아가는 중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내 뒤를 정확히 밟게.”
“진법이군요.”
“그래.”
난 산화겸의 발자국을 완벽히 따라서 진법을 통과했다. 진법을 통과하니 커다란 절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특징도 없는 절벽인 줄 알았지만, 절벽 중앙에 세로로 난 작은 틈이 있었다.
“그건 본파의 비동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하는 검이야.”
산화겸은 송로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있어 오묘했다.
“왜 근데 그런 걸 무림맹에 맡기셨다죠?”
“글쎄. 그건 모르지. 기록에 따르면 사조께서는 미래의 일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군. 자네라는 사람이 나타날 걸 알고 무림맹에 안배를 해놓은 걸 게야.”
“예언이라.”
예언. 나도 주변에 비슷한 능력을 쓰는 사람을 알고 있다. 바로 천주성주다. 그렇다면 벽리항도 상단전이 열려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심지어 사조님은 본파에서 송로를 강제로 회수하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리셨다지. 그건 어떤 형태로든 자연스레 종남파로 돌아올 거라고 말이야. 결국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군.”
실제로 여기가 송로가 있을 곳이라는 걸까. 갑자기 송로가 웅웅하고 울었다. 난 검병에 손을 댔다. 손이 같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이 울렸다.
나는 송로를 뽑아 벽의 틈에다 꽂았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송로는 벽에 꽉 맞물렸다.
“더 밀어보게.”
산화겸이 말했다. 난 그의 말을 따라 검신이 안 보일 정도로 밀었다. 끝까지 밀어 넣었을 때 검극에 뭔가 눌리는 느낌이 났다.
쿠구궁···
갑자기 틈을 중심으로 좌우로 절벽이 열렸다. 그 웅장한 광경에 나나 산화겸은 잠시 말을 잃었다. 열린 절벽 끝으로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통로가 나왔다.
“가보죠.”
먼저 정신을 차린 내가 산화겸을 인도했다. 나란히 들어갈 수는 없는 크기라 내가 앞서고 산화겸이 뒤를 따랐다.
절벽 안으로 들어가니 어떠한 빛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길은 점점 좁아져서 몸을 숙여서 들어가야 했다.
“축골공이라도 배워놨어야 됐나.”
산화겸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뱉었다. 우리는 굴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흙을 갉아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나는 작은 토굴을 발견했다.
토굴에 들어가자 좁았던 시야가 확 트였다. 그곳에는 정좌 자세를 한 백골이 있었다. 그 백골은 툭 건드리기만 하면 부러질 것 같을 정도로 얇고 위태로웠다.
“말단후학이 고인의 안식을 깨웠습니다. 부디 노하지 마시옵소서.”
산화겸이 조용히 말했다. 이 토굴에 있으면 분명 종남파의 고인일 터였다. 산화겸도 그렇겠지만, 나도 그가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백골 앞에는 작은 책이 있었다. 딱 봐도 백골이 주인인 책이다. 나는 산화겸에게 비켜줬다. 허나 산화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송로의 전인이니 같이 볼 자격이 있네.”
산화겸은 무릎을 꿇고 내 앞에서 땅바닥에 있는 책을 넘겼다. 책도 너무 삭아서 세게 만지면 종이가 부서질 것 같아서 조심히 열어야 했다.
- 본인은 종남파 제22대 장문인 벽리항이다. 본인이 한평생 연구해 온 태을신공의 심득을 여기 남기느니라. 본디 태을신공은 자연의 순수한 기운을 받아들이는 무공으로, 가장 자연과 근접한 무공이라고들 할 것이다.
태을신공의 심득이라. 딱히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었다. 태을신공에 관한 얘기도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장에는 내 예상과는 많이 다른 글이 적혀있었다.
-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태을신공은 반대로 그 어떤 무공보다 인조적인 무공이었다.
“이건 뭔 소리지?”
산화겸도 당황했다. 태을신공이 자연과 근접한 무공이 아니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쭉 이어졌다.
-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연을 고결하다고 받들어왔다. 자연은 순수하고 순결하며 맑아야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은 그랬다. 자연이 곧 선(善)이니, 정기만을 받아들이는 태을신공이 자연에 근접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자연은 선도, 악도 아니었다. 세상에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으며, 선한 사람들만 사는 세계도, 악한 사람들만 세계도 없다. 그런 점에서 자연의 선한 부분만 받아들인 태을신공은 자연과 반하는 무공인 것이다.
- 진짜 자연의 기운은 따로 있었다. 무색무취한 기운. 난 상단전이 열리고 나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아무리 쌓여도 중압감이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산화겸은 이 구절에서 갸웃거렸지만 나는 이게 태원지기임을 알 수 있었다. 난 계속 읽어나갔다.
- 결국 태을신공과 자연의 기운은 상반된다. 아니, 모든 무공이 자연의 기운과 상반된다. 모든 심공은 자연에서 기를 추출하여 몸에 축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인들은 원래 죽어야 할 생명을 거스르고 더 오래 사는 것이다.
- 그러나 거스르는 것도 그 정도뿐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결국 자연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자연에 동화되는 것이다. 실제로 내 친우인 매화검존은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적유엽은 매화검존이 등선을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매화검존은 태원지기를 키워 자연과 동화되었다는 말인가.
난 책에 몰입된 채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러나 내용은 이어지지 않았다.
- 이제부터는 연자에게만 허락된 내용이다. 연자가 아닌 자는 조용히 덮고 떠나라. 연자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산화겸은 그 내용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내가 볼 책이 아니로군.”
연자는 당연히 송로의 주인을 뜻하는 것이었다. 산화겸은 종남파의 고인 앞에서 강짜를 놓을 정도로 막나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산화겸은 딴청을 피우며 뒤를 돌았고, 난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난 넘긴 책장을 보고 얼어붙고 말았다.
- 이 장에 온 자는 연자라고 스스로 밝힌 셈이다. 연자여, 하나 묻겠다. 혹여 시간을 거슬러 오지는 않았는가.
*
붉은 천막을 걷었다. 모두의 입에서 탄성 소리가 났다. 네모난 유리 안에는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구체가 있었다.
“고생 좀 했겠구나.”
“아닙니다.”
“겸손도 떨 줄 알았더냐.”
천하진은 유리함을 깨뜨린 다음 구체를 손에 쥐어봤다.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사내는 기함을 했다.
“천마께 감히 아뢰옵니다. 그건 강한 폭발력을 가진데다가 불완전합니다. 조그마한 충격에도 터질 수 있습니다.”
천하진은 미소를 지었다. 산적을 닮은 사내는 말을 계속 이었다.
“비마진천보다 다섯 배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좌가 고작 벽력탄을 두려워하라는 말이냐?”
천하진이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수염의 사내는 그 미소에 바로 부복했다.
“전혀 아닙니다. 어찌 인간의 기물 따위가 천마께 해를 끼치겠나이까.”
“알면 더 이상 주제 넘는 얘기하지는 말도록. 터진다고 해도 다시 만들면 되지 않은가.”
부복을 한 사내, 철마는 다시 머리를 땅바닥에 쿵 박았다. 저 폭탄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됐고,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었는지 천마는 모를 것이었다. 그러나 천마는 몰라도 됐다. 천마는 유일하게 광오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 친구 이름이 뭐라고?”
“마탄(魔彈)이라고 지었습니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 재미없는 이름이야.”
“소천마께서 지으셨습니다.”
천하진은 옆에 있는 천유현을 바라봤다. 금목환을 만나고 온 다음부터 천유현에게 농담이 없어졌다. 여유와 거만함은 그대로였지만 농담 대신 진지함이 들이찼다.
천하진에게는 굉장히 기꺼운 변화였다. 재능에 비해 노력을 하지 않던 천유현이 그 이후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천유현이 천마신교에 기여한 바를 시간으로 따지자면, 정파 습격을 삼 년은 앞당겨준 셈이었다.
“이게 완성되려면 몇 번 더 시험되어야 할 것 같나?”
천하진이 물었다. 당연히 그 시험은 정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이었다. 삼 년 동안 지속되었던 폭탄 공격은 저 구체를 완성시키기 위한 실험 과정 중 하나였다.
“세 번이면 충분합니다.”
“좋아.”
“근데 요즘 방비가 삼엄하여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철마가 말했다. 천하진이 혀를 찼다.
“소제가 수를 썼군.”
처음에 금목환이 정파의 진두지휘권을 잡았다고 했을 때 천하진은 비웃었다. 앞뒤 꽉 막힌 노인네들 천지인 정파에서 약관의 꼬마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금목환은 실권을 잡자마자 천마신교의 간자들을 전부 색출하더니, 천산에서 중원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진법들을 길게 늘어놓았다.
또한 사람마다 고유한 신분 증빙패를 만들어서 중원인과 새외를 구분하기도 했다. 약관을 좀 넘은 어린 녀석의 머리에서 나왔다기에는 가히 비범한 정책들이었다.
물론 너무 비범하다보니 질시하는 노인네들도 있다지만, 대세에 큰 영향은 끼치지 않으리라.
“웬만한 사람으로는 침투하기도 힘들 겁니다.”
철마의 말에 천하진은 고민했다. 천유현은 천하진과 철마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갔다오죠. 중원 구경도 오랜만에 하고 싶군요.”
“네?”
철마가 되물었다. 지금 소천마가 천마신교에서 담당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어딜 간다는 말인가. 철마는 바로 천하진을 바라봤지만, 천하진은 천유현을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 년만에 천유현이 중원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