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종남제일인
200화 종남제일인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 섬서라 그런지 검수들이 많았다. 원래 검이 만병지왕이라 제일 많이 쓰이는 무기기는 하지만, 여기는 그걸 감안하고 봐도 검을 찬 사람이 압도적이었다.
“아무래도 화산파와 종남파의 영향이겠죠.”
“그렇겠지.”
난 만두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앞에는 한유림이 앉아있었다. 한유림 앞에는 붉은 양념이 비벼진 면이 있었지만, 그녀는 먹는 둥 마는 둥해서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근데 종남파에 연통을 안 넣으시고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보물 가지러 간다고 말하기는 좀 그래서.”
나는 만두를 씹으면서 골똘히 생각해봤다. 두부, 고기, 부추, 양파, 재료들의 맛을 한꺼번에 음미했다. 생각보다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린 음식이었다.
“그냥 동네 객잔인 줄 알았는데 잘하네.”
“그것도 역시 화산파와 종남파의 영향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 명문에는 입이 까다로운 사람이 많고, 그런 섬서에서 살려면 당연히 손맛을 키워야할 테니까.”
나는 한유림의 물음에 대답해주며 만두를 하나 더 집었다. 주변에서는 과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한유림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듯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했으나, 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강서에서 섬서까지 오면서 정말 수도 없이 느꼈던 시선이었다.
“저기, 황금세가 가주 맞지?”
“여기서는 잘 안 보이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섬서는 무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앞의 미인은 누구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아, 설봉이군. 그럼 진짜 황금세가 가주님인 건가?”
“설봉이면 황금세가 대주 중 하나니까, 진짜인가본데.”
귀가 너무 밝은 것도 탈이다. 한유림도 들렸는지 상당히 부담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욕이든 칭찬이든 내 얘기를 뒤에서 듣는 것만큼 간지러운 건 없는 법이다.
슬슬 사람들이 일어났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의 근육은 엄청나게 긴장이 되어있을 것이었다.
한유림이 조용히 검병에 손을 댔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참 한유림도 어찌 보면 고지식한 사람이다.
“저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나왔다. 난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매화가 수놓아진 무복을 입은 사람과 정갈한 도복(道服)을 입은 남자 둘이 있었다.
그들은 열다섯, 그러니까 지학 안팎 나이의 아이들이었다. 난 그들의 얼굴을 보고 검집을 스쳐봤다. 수실에 매듭이 하나씩 있다. 문파의 막내인 삼대제자라는 뜻이었다.
“혹시 소제 금목환 대협 아니십니까?”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음이탈까지 났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대답한 건 한유림이었다.
“상대방의 신원을 물어볼 때는, 먼저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또 목적을 먼저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한유림은 서릿발 같은 말을 꺼냈다. 마치 얼음으로 된 비수가 저 꼬맹이들에게 날아가는 것 같았다.
“괜찮아. 아직 어린 애들인데.”
“가주님, 그래도···”
“검병에서 손 좀 떼고.”
한유림은 늘 이랬다. 누군가가 다가오면 진심으로 긴장해 검병에 손을 얹어 놨다. 그만큼 내 호위에 진심인 것이다.
그녀가 천주성에서 돌아온 지도 삼 년째. 그녀는 내가 놀랄 정도로 성장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내 옆을 지키고 섰다.
거의 내가 잠을 잘 때 빼고는 내 호위로 계속 돌아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유림에게 쉬라고 해도, 그녀는 금원대주의 할 일이라며 잡아떼고는 했다. 천주성에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한유림은 내게 오는 신원 불상의 사람들을 굉장히 경계하고, 또 쳐내려 했다. 지금 여기 아이들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한유림의 냉기가 철철 흐르는 말투에 허리를 바짝 세우며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화산파 삼대제자 유소응이고, 이 친구 역시 화산파의 삼대제자 곽정학입니다.”
“목적은?”
숨 쉴 틈도 없이 한유림의 공격이 날아왔다. 두 아이는 손과 발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희가···”
화산파의 유소응이라고 밝힌 아이는 한유림의 눈빛에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때 옆에 있는 곽정학이라는 아이가 외쳤다.
“저희는 무인으로서 오랫동안 금목환 대협을 흠모해온 사람들입니다! 무공도 걸출하시고, 중원에서 커다란 역할을 맡고 있으며, 협객으로 이름이 드높은 금목환 대협을 실제로 보니, 저희도 모르게 무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말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네.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래도 그 안에 한유림이 요구한 설명은 다 했다.
“그렇구나. 뭐, 그럴 수도 있지.”
난 한유림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샌가부터 이런 일이 좀 잦아졌다. 원래 강호에서 객잔은 시비, 싸움의 장소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그냥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만남의 장이라고 할까.
난 풀 죽은 아이들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아이들의 굽은 허리가 물 먹은 꽃처럼 꼿꼿이 펴지기 시작했다. 얼굴은 감동의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너희들은 단전에 기가 많이 모여 있구나. 아마 영약의 기운인 듯한데, 다음에 운기할 때는 몸에서 내공을 돌린다는 느낌보다, 단전의 내공을 퍼뜨린다는 느낌으로 해. 그러면 좋은 성과가 있을 거야.”
처음에는 나도 이런 걸 못했지만, 이제는 흉내라도 내게 됐다.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나, 좋은 말이라도 한 번 해주는 게 그리 대수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질리도록 듣는 내 목소리가 그들에게는 추억이 될 수도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대협!”
“이런 기연까지 주실 줄은 몰랐는데···”
아이들은 마치 필생의 은인을 만난 것처럼 눈물이라도 뚝뚝 떨어뜨릴 기세였다. 정말 눈물을 흘리면 부담스러울 것 같기에 난 그들을 보내줬다.
난 다시 밥을 먹으려고 했지만, 그러기는 힘들었다.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내게로 다가온 것이다.
“정말 황금세가 가주님이시군요.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금목환 대협을 보다니 필생의 영광입니다.”
사람들이 날 둘러싸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대개 무인들이었고 남녀노소가 고루 섞여있었다. 한꺼번에 몰려들어 한유림이 어떻게 막을 새도 없었다.
종남파로 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았다.
*
어쩌다 보니까 내 주변에 우르르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종남파의 제자들이었는데, 한 서른 명 정도는 됐다. 내가 종남파에 간다고 하니 앞다투어 길을 안내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딱히 한 사람만 따라가기도 뭐하고, 어차피 그들도 본산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기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점차 멀리 종남파의 커다란 현판과 대문이 보였다. 정문을 지키고 서있던 무인들은 우리가 시야에 들어오자 흠칫했다. 멀리서 보기에는 무리가 떼지어 오는 것으로밖에 안 보일 거였다.
우리가 앞에 설 때, 무인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나와 뒤의 동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황금세가 가주님이시네.”
“빨리 문을 열어라! 이 무슨 무례냐!”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종남파의 사람들은 성질부터 냈다. 그 무인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들이 말했기에 바로 대문이 벌컥 열렸다.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요.”
“금목환 대협께서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개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날 추앙하고 따라다닐 리는 없지 않은가. 명재희는 지금 내가 젊은 무인들의 상징이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했었다.
나를 추종하는 무리들 대문에 내가 종남파의 장문인을 만나는 것도 일사천리였다. 혼자 왔어도 장문인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종남파 무인들이 극성을 떨어서 좀 더 일찍 볼 수 있게 됐다.
종남파 장문인 구성회는 당황스러워 했다. 내가 연락 없이 찾아온 것도 찾ㅈ아온 거지만, 다른 종남의 무인들을 대규모로 끌고 왔으니까. 그가 객잔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리는 없었다.
“···어쩐 일이신가?”
장문인은 말을 꺼냈다. 당연하지만 종남파 장문인과는 구면이었다. 아직 명맥이 조금 남아있는 신단회에서 많이 봤다.
“그냥 주변에 와서 한 번 들러봤습니다.”
구성회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많이 보기는 했어도 우리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근데 중간에 들렀다니, 그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게 분명했다.
“정말이오?”
“부탁도 있고요.”
“그렇겠지.”
구성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개 나를 불편해했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안다.
무인으로서 보면 까마득한 후학이지만 지금 중원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내가 더 중요했다. 당장 황금세가가 중원에서 자금의 흐름을 막는다면 중원은 곧장 말라죽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황금세가의 무력이 약한 것도 아니니, 전통의 강호였던 자들이 눈치를 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오?”
구성회는 내 눈치를 봤다. 무슨 말이 나올지 계산을 해보는 눈빛이다. 그러나 그가 내 목적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청라보패를 좀 가져갔으면 합니다.”
“···응?”
난 최대한 별 거 아니라는 듯 얘기했지만, 당연히 구성회는 바보가 아니었다. 구성회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다. 쉽게 이해가 안 될 것이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원칠종신기, 청라보패를 얘기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구성회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가 보기엔 내가 굉장한 양아치처럼 느껴질 거였다. 하지만 난 뺏으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불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잠깐만. 내가 지금 너무 급작스럽게 들어서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난 구성회에게 시간을 줬다. 구성회는 나를 이상한 놈 보듯이 바라보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계산이 끝난 듯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청라보패는 지금 내 소관이 아니라네. 그래서 답변을 주기 힘들구먼.”
“장문인의 소관이 아니라고요?”
이건 또 무슨 신선한 소리일까. 종남파의 보물이 장문인의 소관이 아니라니. 대충 이해는 됐다.
내 말을 바로 거절하기 그러니까 돌려서 거절하는 것일 테다. 왜냐하면 이미 황금세가는 중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까. 당장 종남파에 철을 공급하지 않으면 그들은 허접스런 무기를 가지게 될 거다.
“그럼 누구 소관입니까?”
“지금 청라보패를 연구하고 있는 장로가 있네. 그이 소관이지.”
“그 분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구도전(求道殿)에 있을 걸세. 여기부터 동북쪽 끝에 있어. 붉은 지붕을 가지고 있으니 찾기 쉬울 게야.”
“그렇군요. 그럼 제가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구성회는 얼떨떨하다는 듯이 받아줬다. 그의 입장에서는 삥 뜯기는 기분이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볼 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청라보패보다 훨씬 가치 있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종남파에게는 말이다.
*
“···나 참. 이해할 수가 없군.”
구성회는 어이가 없었다. 대뜸 와서 중원칠종신기에 해당하는 보물을 달라니. 남들 같았으면 경을 치고 내보낼 일이었다. 정말 황금세가 가주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처한 거였다.
당장 황금세가의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구성회가 보기에 금목환은 물질을 탐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불합리하게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상응하는 가치라고 했으면 분명 상응하는 가치가 맞을 거였다.
허나 왠지 가진 건 주기 싫었다. 그냥 홀라당 주는 건 종남파 장문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황금세가 가주의 부탁을 본인이 거절하는 건 보기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 주지 않을 사람에게 돌려보낸 거다.
“산 장로가 사람 눈치 안 보고 고집 센 걸로 치면 종남제일인이지.”
구성회는 껄껄 웃었다. 산화겸 장로. 장로지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그 장로가 청라보패를 연구하는 장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