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내일을 묻는다
199화 내일을 묻는다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진권이 벌떡 일어났다. 적유엽은 손을 흔들었다. 괜찮다는 건지, 안 괜찮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마치 누군가 팔을 들어서 움직여주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적유엽은 지금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움직이는 거였다.
오 년이란 사이에 이렇게 쇠약해지는 걸 보면 무인도 초인은 아니었다. 단순히 강한 사람인 거다.
“줄 게 무엇입니까?”
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적유엽은 침상 쪽으로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난 적유엽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가라 해.”
“네?”
귀에 내공을 잔뜩 씌워서 들었는데도 안 들렸다. 난 머리를 더 가까이 댔다.
“쟤 나가라고 해.”
“아, 네.”
난 곧바로 진권에게 머리를 돌렸다.
“나가라는데요?”
“뭐?”
진권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손을 흔든 게 괜찮다, 안 괜찮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나가라는 뜻이었다. 진권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한 것 같지만, 입만 오물거리다 그냥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나갔다. 그러자 방에는 적유엽과 나만이 남게 되었다.
“시끄러워 죽을 뻔했네.”
적유엽이 앓는 소리를 내며 윗몸을 일으켰다. 그의 단전에서 생기가 나오는 게 보였다. 물론 덮인 사기에 비하면 미약한 양이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아니, 죽을 때 다 됐지. 네가 오면 깨려고 귀식대법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쪼개서 써야지.”
적유엽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돌아왔다. 그렇게 말하는 적유엽의 눈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있지 않았다. 본인이 본인의 죽음을 얘기하면서 저렇게 초연할 수 있는지, 난 그럴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게까지 절 기다릴 이유라도 있었습니까?”“줄 게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그랬죠.”
“오랜만에 보니까 인간미가 좀 생겼구나.”
적유엽이 웃다가 거칠게 기침을 했다. 내가 진기도인을 해주려고 하자 적유엽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갈 몸이야. 네 말대로 굉장히 고통스러워. 내 장기는 이미 다 죽었어, 간신히 남은 선천지기로 버티고 있는 것뿐이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이 죽음을 거역한 대가는 커다란 고통이었다. 적유엽은 가장 거대한 순리까지 저버리면서 나한테 줄 게 있는 거였다.
“목환아, 초절정 위의 경지를 본 적이 있느냐?”
“초절정 위의 경지요?”
초절정 위의 경지라. 사실 경지란 그저 구분에 불과하고 절대적이지 않다. 만약 경지라는 게 절대적이었다면 살수와 독과 암기가 나오지 않았을 거다.
“제가 알기로는 강호에서 말하는 경지는 초절정이 끝인데요. 화경(化境)은 그냥 우스갯소리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겠지. 대개 그렇게 알고 있지. 초절정 중에서도 삼화취정, 오기조원, 등봉조극으로 나뉘고, 그 중 등봉조극이 끝이라고들 알고 있지. 당장 삼선이라는 작자들도 등봉조극의 경지니까.”
“그렇겠죠.”
“많은 사람들이 등봉조극 이후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지만, 진짜는 없어. 둘 중 하나야. 본인이 등봉조극을 넘어섰다고 착각을 하거나, 아니면 거짓말쟁이거나.”
“그렇게나 확신을 할 근거가 있나요?”
표본도 얼마 없는 등봉조극의 고수들에 대하여 적유엽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당장 적유엽도 오기조원에 이른 고수이지, 등봉조극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등봉조극을 넘어서면 등선(登仙)하거든.”
“등선이요?”
등선. 신선이 되어서 승천하는 걸 뜻한다. 그런 우화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적유엽은 하고 있었다.
“난 실제로 봤지. 지금 이 시대에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안 될걸. 너무나 오래 전 이야기니 말이야.”
“실제로 보셨다고요?”
“그래. 매화검존께서 실제로 사람들 앞에서 등선을 선보이셨지. 그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매화검존. 요즘 들어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다. 이백년 전 천하제일인인데, 적유엽이 봤다면 그때 기준으로 나이가 최소 백오십은 되었다는 얘기다.
“금시초문인데요.”
“당연하지. 발설금지 사항이었으니 말이야.”
나는 자세히 귀를 기울였다. 적유엽의 상단전을 보니 사기에 침식당해있지는 않았다. 미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분은 우리에게 화경으로 올라갈 단서까지 말씀해주고 등선하셨지.”
“그 단서가 저에게 줄 것이군요?”
“그래.”
“왜요?”
“네가 적임자기 때문이다.”
“적임자요?”
“당장 정파의 겁난을 해쳐나갈 사람으로서 말이다. 매화검존께서는 그럴 자격이 있는 자에게 단서를 주라고 했지.”
적유엽의 숨이 살짝 가빠져왔다. 난 묻는 걸 멈췄다. 일단 적유엽의 말을 듣는 게 우선이었다.
“중원칠종신기.”
“네?”
“중원칠종신기를 전부 모으면, 화경이 될 수 있다. 매화검존께선 그리 말씀하셨다.”
난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중원칠종신기. 내가 가지고 있음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물건들이었다.
내 목에 걸려있는 신옥주, 남궁세가에서 받은 혈기린반지. 벌써 난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근데 그게 초절정의 경지를 뛰어넘는 단서라니. 쉽사리 믿겨지지 않았다.
“제가 알기로는 숭산지약에서 나눠가진 걸로 아는데요.”
“맞아. 그렇게 흩어지게 됐지. 만약 그게 악인의 손에 쥐어지면 중원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그럼 이제 궁금하지 않느냐? 주인인 매화검존께서는 등선한 후인데, 누가 그 칠종신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적유엽은 날 놀리려는 듯 잠깐 숨을 멈췄다. 아까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고 해놓고, 나를 놀리는데 저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쓰고 있었다.
“바로 네 증조할아버지다.”
난 잠깐 멍했다. 난 증조할아버지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다. 황금세가의 초대 가주. 무력을 키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구파일방의 보호를 받아냈던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다. 그것 때문에 참 고생을 해서 바보 같다고만 생각했었다.
“중원칠종신기의 비밀에 관한 것도 숭산지약에서 오직 황금세가의 초대가주만 알고 있었지. 그 역시 매화검존께서 등선할 때 같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매화검존은 등선할 때 칠종신기를 황금세가에 맡겼지. 그 이유가 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가장 협객에 가까운 사람이었거든.”
협객. 협객이라···
아마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물어봐야 될 것만 같다. 지금 적유엽은 안 그런 척하고 있지만 사기에게 잡아먹히고 있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넌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협객에 가까운 사람이야.”
“···그런, 당치도 않습니다.”
나도 많은 의와 협을 팔았지만, 사실 그저 내 가까운 사람을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그리고 증조할아버지도 아직 이해 못하겠다. 이런 내가 협객이라고 자칭하기에는 좀 민망했다.
“지금 마교는 우리 세대의 마교와 달라. 옛날에는 간자들을 침투해 우리들을 흔들려고만 했지만, 이제는 직접 폭탄을 써서 타격하고 있지 않느냐. 그건 그들의 기조가 변화했다는 걸 뜻하지.”
“네, 그렇죠.”
중원합동회의에서도 나온 말이다. 마교는 확실히 달라졌다. 정파 타격에 적극성이 생긴 거다.
“미안하게도 난 먼저 떠나가지만, 넌 원래 혼자서도 잘하는 녀석이니까.”
“부담스럽네요.”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정파를 외면하지만 말거라.”
적유엽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급격하게 약해졌다. 적유엽이 눈을 감았다. 난 살짝 섬뜩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적유엽의 입은 조용히 열렸다.
“마지막으로 숨이 남아있을 때 제자놈과 이야기나 나누고 싶구나.”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나가서 곽진도를 불러와야 했다. 내가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적유엽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목환아.”
“네.”
“넌 정파의 내일이야. 그걸 잊지 말거라.”
방이 잠깐 고요해졌다. 나는 적유엽이 누워있는 곳으로 절을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적유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곽진도를 위해서 아껴두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점점 좁아지는 틈 사이로 적유엽이 점점 사라져갔다.
*
장례식은 진부하게도 비가 내렸다. 내가 해남에서 회의를 소집했으니 조문객은 많았다.
듣기로는 곽진도가 적유엽의 방에 있었을 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곽진도가 처음 호상이라고 할 때는 공감가지 않았는데, 제자의 손을 잡고 죽었으면 호상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나는 조문을 마치고 나왔다. 건물을 나오니 처마 밑에서 검은색 장삼을 입은 곽진도가 뒷짐을 지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 상심이 많으시겠습니다.”
“강호에서 칼침 안 맞고 죽었으니, 얼마나 반길만한 죽음이겠냐.”
“그런 걸까요.”
곽진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가만히 있자 먼저 곽진도가 입을 열었다.
“넌 이제 슬슬 올라가야지?”
“그래야죠.”
“난 상주 노릇 더 하다 세가로 돌아가야겠다.”
“그렇죠.”
해남파 장문인 정도의 죽음은 적어도 백일장이라고 했다. 조문 올 사람이 많고, 또 멀리 있으니 말이다. 곽진도는 삼 개월 동안 적유엽의 옆을 지키고 있을 거다.
곽진도는 여전히 날 바라보지 않으면서 말을 했다.
“궁금하지 않느냐?”
“뭐가요?”
“내가 마지막에 스승님하고 무슨 얘기를 했을지 말이야.”
“그런 게 왜 궁금하겠습니까. 개인적인 일인데.”
곽진도는 흐흐,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보니 적유엽의 웃음하고 좀 닮은 느낌이었다.
“네 얘기를 했다면 좀 궁금하지 않겠냐?”
“제 얘기요?”
왜 굳이 둘이 있을 때도 내 얘기를 했을까. 적유엽은 내게 할 말을 다 하지 않았던 걸까. 난 잠깐 멈칫했지만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제 얘기를 했더라고 해도, 궁금하진 않습니다.”
“잠깐 멈칫했군. 네가 나한테 속내를 들킬 때도 있구나.”
곽진도의 말에 난 움찔했다.
“장문인도 네가 인간미가 생겼다고 좋아하더구나. 그래, 감정이 있어야 사람이지.”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될 거면 그냥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다. 내가 요즘 많은 사람들한테 표정을 들키는 걸 자주 까먹곤 한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요?”
곽진도는 그제야 날 바라봤다. 뭔가 장난기가 있는 표정이었다.
“네 파문을 얘기했다.”
“파문이요?”
“그래. 해남파는 공식적으로 널 파문하기로 했다. 장문인과 해남파의 장로 대우인 내 의견이 합치했으니 넌 꼼짝없이 파문이야.”
“허.”
난 잠깐 할 말이 없어졌다. 갑자기 뭔 파문이라는 말인가. 곽진도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넌 그 나이에 벌써부터 강호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됐다. 네가 해남파 제자로 계속 남으면, 그건 네게도 제약이 되고, 해남파에게도 힘이 쏠리는 불균형이 발생한다.”
“그런가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어차피 전 황금세가의 가주입니다.”
“그런 건 은근히 무시 못해. 네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니까.”
사실 해남의 제자라고 해도 지금 나는 해남의 무공을 바탕으로 다른 무공을 만들었기에, 따로 일가를 이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해남파에서 굳이 적을 뗄 이유가 없었는데, 그냥 해남에서 파문을 시켜버릴 줄은 몰랐다.
“그런가요. 전 그럼 해남파의 제자가 아니군요.”
“그래, 썩 나가야 될 외부인이지.”
나는 내 검에 묶인 파란색 매듭을 풀었다. 원래는 차고 다니지 않지만 해남에 올 때만 차고 다니는 거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해남을 벗어나는 게 진정 옳은 길이라고 생각은 됐다. 내가 원할 때만 해남의 제자라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건 공평하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그래.”
난 곽진도에게 푸른 매듭을 건네줬다. 곽진도는 받아서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황금세가만의 수실을 따로 만들까요?”
“나쁘지 않지.”
싸늘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어쩐지 옆구리가 허전했다.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해남파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만 같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게 딱 맞았다.
“그래. 중원에 올라가서는 뭘 할 거냐?”
곽진도가 물었다. 난 주저 없이 대답했다.
“종남파에 한 번 가려고요.”
“종남파는 왜?”
“천하제일인이 되려고요.”
“뭔 소리냐?”
난 어이없어 하는 곽진도를 바라보며 웃어줬다. 그는 나와 장문인이 나눈 얘기를 모르는 것 같았다.
적유엽은 마지막까지 날 생각해서 해남에서 파문을 시켰다. 그리고 그는 내게 정파의 내일이라고 했다.
내가 내일이라면, 내가 내게 묻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될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