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중원합동회의(中原合同會議)
197화 중원합동회의(中原合同會議)
저녁때부터는 비가 왔다. 난 턱 끝을 목으로 당겨서 얼굴을 검은 옷에 묻었다. 옷의 윗단이 내 입까지 가렸다. 내 앞에는 명재희와 한유림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난 늘 궁금했어.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건강해보이잖아. 근데 어느 순간 보면 갑자기 쇠약해져계셔.”
“인간이 아무리 자맥질을 해서 폭포를 올라봤자, 폭포가 끝없이 떨어지고 있다면 인간도 떨어질 수밖에.”
“그런 건가. 뭔가 받아들이기 힘드실 것 같아.”
“글쎄. 그만큼 더 준비를 하셨을 것 같은데.”
난 이제 아직 감정 표현은 서툴러도 감정이 뭔지는 알았다. 그러니 내가 느끼는 감정도 명확히 설명할 수 있었다.
“슬프네.”
“그래. 슬프지.”
“왜 보기 싫은 사람들은 계속 나타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지는 걸까?”
“어쩌면 그런 것도 자연의 섭리지. 어떤 법칙이라고 이름을 붙여야될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가 대충 붙일게. 고통 보존의 법칙. 인간은 평생 할당량의 고통을 받고 있어야 돼. 이별은 고통을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야.”
명재희는 내 말에 입을 닫았다. 한유림은 나와 명재희의 눈치를 봤다. 내 말이 많이 비관적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난 할 말이 없어 다시 턱끝을 옷으로 당겼다.
마차 바퀴가 빠르게 굴러가고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잘 정리된 관도로 들어선 거다. 이제 광동이었다. 역시 상권이 발달한 광동이다 보니, 여러 곳에서 음식 냄새와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자! 이번에 저희 오향장육 새로 개시했습니다! 한 번 드셔보고 가세요!”
“전국 술 종류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슬쩍 마차의 주렴을 들춰보니 상점들과 길거리 상인들이 보였다. 물론 상점이라고 다 같은 상점이 아니고, 길거리 상인이라고 해도 다 같은 길거리 상인이 아니다.
어떤 길거리 상인은 옆에 커다란 비둘기 조각상을 두고 비둘기 구이를 판매하고 있었다.
“냄새 한 번 맛있네.”
명재희가 말했다. 왠지 익숙한 냄새였다. 난 마부에게 잠시 속도를 줄이라고 말했다.
주렴을 살짝 들춰보니, 좀 낯익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옛날에 한 번 마주쳐본 느낌.
“새끼 비둘기구이입니다! 방금 구운 겁니다! 우리 아이 영양 간식, 우리 아빠 술안주로 제격···”
난 그 목소리를 듣자 알아챘다. 명재희도 그 목소리를 듣자 익숙한 듯 갸웃했다. 난 마차의 주렴을 열고 창문을 열었다. 요즘은 마차 안에서 음식을 받는 게 유행이었다. 굳이 안 내려도 되고, 간편하게 결제하고 서로 갈 길 가는 거다.
“비둘기 구이 네 개만 주세요.”
“아, 네. 네. 알겠습니다.”
비둘기 구이 상인 주변에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그는 비둘기구이를 건넬 때야 나를 바라봤다. 예상과 달리 남자는 날 보더니, 대번에 깜짝 놀랐다.
“어, 어. 그 도련님 아니십니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아이고. 기억하다마다요. 그런 은혜를 받고도 얼굴을 기억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 쥐새끼죠.”
그는 내가 옛날 곽진도, 갈유월, 명재희 네 명이서 함께 해남에 왔을 때 비둘기 구이를 팔았던 상인이었다. 그때 거스름돈을 안 받고 그냥 돈을 줬던 기억이 나는데, 거기서 사업을 더 벌려 훌륭하게 장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니까 비둘기 조각상을 옆에 두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 그 사람의 수하들인 것 같았다.
“제게 그런 은혜를 베푸신 분이 황금세가 가주님인 걸 알고 얼마나 감읍했는지 모릅니다. 저희 상계에서는 그야말로 신이 아니십니까.”
남자는 내게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하긴 이제 내 얼굴과 이름이 중원에 다 알려진 상태였다. 이런 상인들도 날 알아볼 정도면 말을 다한 수준이다.
“신까지는 아니고요. 네 마리만 주세요.”
“아, 더 필요 없으십니까? 저희 비둘기 종류가 좀 많습니다. 사천식 양념, 간장 양념 등등 많은데요.”
“네. 괜찮아요. 그냥 네 개만 주세요.”
상인은 우리에게 큼지막한 비둘기 네 마리를 건넸다. 마부가 돈을 지불하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어찌 은인께 돈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당장 광주에 있는 사람들 중 황금세가의 가주님한테 돈을 받을 상인은 없습니다.”
상인은 말했다. 계속 상인이 내가 가주라고 떠들고 다니자, 주변 사람들이 모였다. 뭔가 귀찮아지는 낌새였다.
“와, 황금세가 가주님이야?”
“···아, 여기서 얼굴이 안 보이는데.”
“주렴 쳐놔서 어차피 안 보여.”
“가주님, 감사합니다!”
상인들은 외쳤다. 하긴, 이제 우리 황금세가의 영향은 강서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근처 가까운 광동 상권도 완전히 꽉 잡아놨다. 꽉 잡아놨다는 건, 그 상로를 우리 걸로 했다는 게 아닌, 투자를 해서 우호도를 높였다는 뜻이다. 지금 거의 모든 전국 상로는 황금세가의 투자를 받아서 더 안전해지고 질이 좋아졌다. 상인들이 우리를 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가주님! 가주님!”
괜히 비둘기 구이 하나 먹고자 사람을 이렇게나 모아버렸군. 나는 대충 주렴을 열고 손을 흔들면서 항구로 나아갔다.
내가 죽자고 손을 흔드는 동안 명재희, 한유림은 비둘기 구이를 먹었다. 마부도 눈치를 보자 한 손으로 말을 다룰 수 있다면 먹으라고 했다.
마차는 점점 가속도를 붙였다. 난 이제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봤다. 해남도가 점점 크게 보였다.
우리는 사람들의 환호를 뿌리치고 재빨리 배에 탔다. 물론 상로가 육로만 있는 게 아니기에, 뱃전에서도 많은 환호를 들었다. 쉴 수도 없어서 얼굴을 가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해남파가 있는 여모봉을 올라갔다. 여모봉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갈림길마다 해남파로 향하는 쪽에는 가설해놓은 표지판들이 있었다.
↗ 중원합동회의(中原合同會議)
↑ 해남파 본단
난 해남파 본단에 들르기 전에 회의가 있는 쪽으로 나아갔다. 회의장으로 가는 길엔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했다.
곧 마차는 중원합동회의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 원래라면 우리는 내려서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내가 마차 문을 열고 내려가려고 했지만, 마차 밖에서는 이미 협상 중이었다.
“아, 의장님 일행이시군요. 들어가시지요.”
“고맙습니다.”
의장 마차라고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가 문을 통과하자 명재희는 바로 설명해줬다.
“우리가 언제쯤 도착할 거라고 미리 통보해놨지. 절차 한 일 각은 걸리잖아.”
“그러냐.”
“의장이 이런데 관심이 없어서. 원래 이런 자잘한 건 관심없긴 했지.”
명재희는 툴툴거렸다. 하긴 그녀는 합동회의와 전혀 상관없는 그냥 황금세가 사람이다. 그냥 내가 의장이니까 합동회의 조직을 만드는데 좀 도와주는 것뿐이다. 사실상 일을 다 맡기게 됐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툴툴거려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그곳에는 많은 무인들이 서있었다.
“의장님을 뵙습니다!”
“음, 그래.”
무인들 중에서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하긴 합동회의의 무인들은 최소 절정 이상의 사람들만 뽑으니까. 웬만하면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곳에는 심지어 명가의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원래 이렇게 군림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합동회의라는 기구가 있었으면 했고, 조직의 총괄을 맡은 내가 자연스럽게 의장을 맡게 됐다.
근데 그 합동회의라는 것이 전 중원을 아우를 정도로 점점 커지면서, 결국 중원 최대의 집단이 된 거다. 중원 최대의 집단이 됐으니 그에 걸맞은 정보들이 오갔고, 그걸 지켜야할 걸맞은 인재들을 뽑아야 했다.
그러니까 이런 나이 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고, 난 이 조직의 수장이었다.
“의장님. 전부 오셨습니다.”
“아. 내가 늦게 왔군요.”
“···아니,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나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좋은 감정만 느끼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괜히 사람들을 갈구거나, 나쁜 감정을 옮기는 것만큼 소모적인 일도 없다. 나쁜 감정을 옮기려면, 일단 내가 나쁜 감정을 먹어야 하니까. 이보다 손해되는 행동도 없었다.
“네 말은 이제 네 말이 아니야. 중원합동회의 의장의 말이라니까.”
“그래?”
“네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넌 진짜 목이 마른 걸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물을 떠달라는 얘기로 들린다고.”
그런가. 사실 실제로 세가 내에서는 그렇게들 했다. 내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기철이 차를 타주고,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면 음식을 만들어줬다.
근데 밖에 나와서까지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합동회의는 세가처럼 유대감으로 엮인 유기체가 아닌 단순한 집합체였다.
“왔군.”
내가 회의실 문을 열자, 앞에서 마주쳤던 무인의 말대로 모든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내가 들어온 곳은 일 층이지만 이 층의 자리까지 꽉 차있었다. 모든 문파, 세가에서 한 명씩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하북팽가의 팽상문이었다. 그의 몸집은 꽤 커졌지만 키는 그대로라 약간 옆으로 퍼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들 오랜만이군.”
한유림은 문전에 서고, 명재희는 빈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나는 준비된 의장의 자리에 앉았다. 의장의 자리는 쓸데없이 화려했다.
한 세가, 문파에서 합동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두 세 명이다. 너무 많으면 골치 아파지니까.
한 번 합동회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계속 참여해야하며, 대타를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오랜만입니다. 가주.”
“잘 지냈습니까?”
무당의 청진이 내게 말을 걸었다. 예전에는 악연으로 얽혀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악감정도 없었다.
딱히 운명의 장난 같은 건 아니었다. 합동회의는 다른 곳과 다르게 내 권한이 절대적인 곳이었고, 각 문파, 세가에서 합동회의에 참여할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직접 골랐다.
그래서 주변에는 내가 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나마 내가 품성을 아는 사람들로 해야 더 믿음이 갈 테니까 말이다. 모르는 문파, 세가 사람이라도 합동회의에 들어오려는 사람이면 내가 면접을 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독단에 가까운 행동들이었지만, 아무도 나한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조직은 황금세가가 아니었으면 등장하지 못했을 거니까.
난 주변을 둘러봤다. 대다수가 나와 그렇게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런 사람들만 뽑아서 그렇다. 그 중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뽑았다.
이곳에는 무당의 청진, 화산의 초유열, 해남의 양초원 등 수많은 문파와 세가들의 후기지수들이 있었다.
내가 열고 들어온 문이 닫히면서, 한유림이 크게 소리 쳤다.
“모두 기립하시기 바랍니다.”
난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 명재희가 만든 규칙이었다. 이런 게 필요하다나, 뭐라나.
“의장님께 예를 갖추시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손에 주먹을 넣었다. 몇 백 명이 일시에 포권하는 소리는 마치 벽력탄이 터지는 소리와 같았다. 내가 포권하자 그들이 포권을 풀었다. 나도 그제야 포권을 풀었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한유림이 외쳤다.
내가 자리에 앉고, 그 다음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