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정반합(正反合) (2)
194화 정반합(正反合) (2)
애뇌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등줄기에 짜르르 올라오는 소름을 참아야 했다. 대체 어떤 고수들이 붙었기에 저런 폭발력이 나온다는 말인가. 당연하지만 그들로서는 충돌이 아닌 합쳐서 나온 폭발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뭐야, 어디 삼선일불이라도 온 거야?”
“언덕이 없었으면 전부 죽은 목숨이었겠는데.”
언덕을 통째로 분지로 만들어버린 그 거력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 안에서는 사람들을 선동하던 박용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천마님과 소제가 싸운 곳일 텐데···’
소천마가 강하고, 소제가 그에 비등하게 강하다고 해도 저런 폭발력은 말도 되지 않는다. 저런 무공을 가진 사람들이 사자신검의 비급이 뭐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많은 사람들은 모두 멍하니 언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분명 폭발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사람들이었다.
먼저 보인 건 피투성이의 남자와 타박상만 입은 여자였다. 저게 소제와 비봉일 것이었다.
‘어디냐, 어디야.’
그들도 중요하지만, 박용한은 그보다 중요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 사람은 천마신교 앞으로의 기둥이었다.
만약 그를 잃고 간다면, 십만대산의 모든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사죄를 구하며 죽어도 모자랄 것이다.
- 심마환상공을 써라.
박용한은 움찔했다. 귓가에 대고 울리는 느낌. 전음이었다. 그는 전음이 어디서 들리는지 보려고했다. 어디있는지 알아야 본인도 전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지않았다.
- 쓸데없이 찾으려하지마. 내 몸은 내가 건사할 수 있으니까.
목소리는 당연히 천유현의 것이었다. 박용한은 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자신은 그저 천마의 도구일 뿐이었다. 도구는 자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박용한은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는 일단 탈출해야 했다. 일단 명령을 따라야했다. 그는 안쪽으로 비비고 들어갔다. 제일 사람의 밀도가 높은 곳은 겁쟁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혼란스럽기도 했다.
모두가 충격적인 폭발에 정신이 팔린 사이, 박용한은 몰래 한 사람에게 심마환상공을 걸었다.
촤악!
“커억!”
갑자기 무리들 사이에서 핏물이 튀었다. 심마환상공에 걸린 사람이 칼을 뽑고 주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 거였다. 가뜩이나 모두가 판단을 못하는 이 시기에 당황스런 내홍(內訌)이었다.
이 무리의 문제는 이끄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누구도 맡으려하지않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런 혼란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놈들이 간자를 심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그런 외침이 들렸다. 다름 아닌 박용한이 지른 것이었다. 그 외침은 혼란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결집시키기 충분했다. 그들은 서로 책임을 맡으려하지않은채 따라가기만을 원했기에, 박용한의 외침은 그들에게는 방향성이 되었다.
"저기 정면에도 온다!"
이번엔 박용한이 아닌 다른 무인이 외쳤다. 그는 당연히 정파의 무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마인을 느낀 천주성의 십이당주가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검을 빼들어라! 전투다!"
"비겁한 놈들! 간자를 심다니!"
일대 혼란이 벌어진 정파 무리의 사람들이 반대편 언덕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
싸움을 붙이고 몰래 나온 박용한은 인적이 없는 수풀로 들어갔다. 조무래기들이 무서워서 떠나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사람이 없을만한 곳으로 헤치고 가던 박용한은 우뚝 섰다.
"잘했어."
박용한은 바로 뒤를 돌아보고 부복했다. 그곳에는 천유현이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소천마님을 뵙습니다."
"언제부터 그런 예를 차렸다고."
천유현은 손사래를 쳤다. 박용한은 바로 천유현의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아니, 아까부터였다. 원래 천유현이 숨고자하면 본인은 못 찾아야 되는데, 너무 쉽게 찾았다.
"몸상태는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아."
천유현이 실실 웃었다.
"그 폭발에서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거지."
"안 좋으시군요."
하긴 그 폭발에 휘말렸을 텐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천유현 정도 되는 무인이니까 살아남은 거지, 그저그런 무인이었다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했을 거다.
"기분은 좋아.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잖아?"
"어느 정도는요."
그들이 중원에 내려온 이유는 정파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목적은 달성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 애뇌산에서 계속 반목하고 불신했으며, 지금은 싸우기까지 하니까.
박용한이 온 곳에서부터는 검기와 검강들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마교인으로서는 쓸 수도 없는 사자신검의 비급으로, 이 정도면 잘 뽑아먹었다 싶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금목환이야."
천유현이 입맛을 다셨다. 멀쩡한 척을 하고 있지만 그의 경맥은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금목환을 쫓아서 주살할 여력이 없었다.
"그 자가 그렇게나 강합니까?"
"강하더군. 물론 그것도 그거지만, 놔두면 정말 본교에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박용한은 놀랐다. 천유현은 사람을 쉽게 인정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본인이 워낙 잘났으니 성에 차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다.
그런데 그런 천유현이 처음 본 사람한테 저런 얘기를 하다니. 마교의 사람들이 알면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중원인들은 다 멍청이인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군."
"천마께서는 적을 얕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래. 나도 지금부터 그러려고."
천유현은 꽤나 순순하게 대답했다. 금목환과의 만남은 위험했지만, 그만큼 괜찮은 동기 부여가 된 것 같았다.
마교의 장로로서, 적이지만 감사한 사람이었다. 천유현은 가진바 재능이 너무 커서 훈련을 거의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정파는 곧 노력한 천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될 거다.
"칼잡이 회수해서 신강으로 돌아가자고."
"네. 알겠습니다."
박용한과 천유현이 애뇌산을 슬슬 빠져나갔다. 천유현은 동시에 싸움 소리가 들리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서려있는 감정은 즐거움이었다.
*
전신이 삐걱거렸다. 그 거대한 폭발을 거의 정면에서 맞섰으니 어쩔 수는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시야는 아비규환이었다. 정파 무인들이 한데 뒤엉켜 서로 칼질을 하고 있었다. 검기와 검강이 한데 뭉쳐 날아다녔다.
물론 종리운의 무리가 훨씬 강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천주성에서 데려온 십이당주는 최소 삼화취정에 든 초절정 고수들이다. 급하게 모은 오합지졸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으아악!”
“괴물들이다!”
여기까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압도적인 전력차이에 사람들의 선택지는 갈렸다.
검을 버리고 항복하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더 밀어붙이려는 사람들. 밀어붙이려는 사람들의 눈은 대개 광기로 가득 차있었다. 당장 그들은 객관적인 판단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었다. 눈 앞에 사자신검이 있으니까 그냥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이었다.
난 문득 고개를 치켜들어 좌우로 돌렸다. 앞의 광경 때문에 중요한 사람 하나를 잊고 있었다.
“천유현은 어디 있지?”
“도망갔나보지.”
뒤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갈유월의 목소리였다. 평소와는 좀 다르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앞이 너무 충격적인 광경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우리가 경험한 폭발이 충격적이라 그런 걸까.
눈꺼풀에 피딱지가 앉은 듯 한쪽 눈이 잘 떠지지 않았지만, 어차피 난 눈으로 사람을 쫓는 사람이 아니다. 난 기감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폐 끝에서부터 피가 끓어올라왔다.
"콜록, 콜록."
바로 핏물이 입을 가득 채웠다. 땅바닥에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미 난 피를 많이 소모한 상태였는데, 피를 더 쏟아내니 부작용이 나온 거다.
내가 모로 쓰러지려고 할 때즈음, 부드러운 손이 내 몸을 잡아 나를 앉혔다.
바로 등 뒤에서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진기도인이었다. 남의 내공을 대신해 운기해주는 것.
내상을 입어 운기조식을 할 겨를이 없는 내게 딱 필요한 처방이었다. 물론 약사는 갈유월이었다.
"···괜찮아?"
"응."
"뭐 맨날 괜찮대."
말에는 짜증기가 가득했지만 반대로 내 기를 다룰 때는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죽어서 침전되는 피를 끌어올리고 그곳에 좋은 피를 순환시킨다. 경맥도 많이 뒤틀려서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 순간이었다.
그 따뜻함에 얼마나 기대고 있었을까. 욕지기가 울컥 솟았다. 나는 다시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 피를 토해냈다.
검은 피가 한도끝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내상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피를 일단 다 뱉어놓으니 조금 몸이 가벼워졌다.
"이 정도면 됐어."
난 그렇게 말했지만 갈유월은 진기도인을 끝내지 않았다.
“됐다니까?”
내가 목소리를 잘 못낸 건지 다시 한 번 말했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난 강제로 소주천을 했다. 내공의 주도권을 내게 가져온 것이다.
난 바로 뒤를 돌아봤다. 분명 갈유월은 고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상냥하다기 보다는 까칠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갈유월은 울고 있었다. 난 살짝 당황했다. 아까 흔들렸던 목소리는 그럼 울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럼 거의 처음부터 울고 있었다는 거였다.
“왜 울어?”
“적당히 해.”
갈유월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땅바닥으로 숙인 채 소리를 질렀다.
“네 몸 상태를 보고 어딜 가든지 하란 말이야! 왜 네가 다 짊어지려고 하는 건데?”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갈유월이 내게 왜 화를 내는지 말이다. 남의 짐을 대신 맡아주면 좋은 것이 아닌가.
“네가 왜 화난지 모르겠어. 난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의협을 따르는 중인데.”
“그게 싫다는 거야. 난 의협이 싫어! 결국 의협은 혼자만의 희생이잖아. 왜 혼자만 다쳐야 하는 건데?”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정파 사람이잖아?”
“왜, 정파 사람이 이면적이고 이기적인 거 처음 보는 거 아니잖아?”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난 할 말이 없었다. 갈유월은 그러나 할 말이 아직도 많았다.
“네가 혼자 나설 때마다 널 뒤에서 보는 사람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아? 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챙기느라고 가까운 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거야? 그건 옳은 거야?”
“난 괜찮아. 이 정도는···”
갈유월은 고개를 저으면서 내 말을 끊었다.
“너도 감당할 수 없이 힘든 때가 있었잖아. 그게 언제인지 몰라도. 넌 완벽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난 잠깐 갈유월을 바라봤다. 갈유월은 내 눈을 피했다. 고개를 비뚜름하게 틀어야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들었어. 네가 그만하라는 걸, 아프다는 걸 말이야.”
갈유월은 그 말을 하고나서야 날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는 데다가 눈물이 방울져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언제, 어디서 그걸 본 걸까. 그건 내 전생의 이야기였다.
어디 우주 바깥에서 울리는 소리라도 들었던 걸까. 아니, 제일 합당한 생각으로는 내가 잠꼬대 같은 걸 했을 확률이 높을 거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난 과거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많이 움직이는 것도, 가족을 챙기는 것도. 모두 과거에서 멀어지고 싶었던 거다.
그러나 난 과거에서 한 발자국도 멀어지지 못했다. 도망치려고 했던 곳이, 과거가 있던 곳이었던 거다. 그러니 지금 난 과거와 마주하게 된 거다.
내 단전 안에서 갑자기 내공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건 바깥으로 비져나왔다. 왼쪽에는 태을헌원신공의 하얀 빛이, 오른쪽에는 무색의 태원지기가 넘실거렸다.
난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다. 지금까지 잘 섞여있던 태을헌원신공과 태원지기가 부딪친 거다.
다시 한 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