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의협지사(義俠志士) (10)
192화 의협지사(義俠志士) (10)
“성화문(盛火門)?”
종리운이 되물었다. 무림맹주로서 나름 거의 모든 정파 이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안 꼈다지만 중원에는 그들만이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규모있는 문파들이 애뇌산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성화문이라는 이름도 못 들어본 문파가 사자신검의 위치를 찾았다니. 좀 황당했다.
“거기 누가 있는데?”
“모릅니다.”
“문주 이름은 뭐고?”
“모릅니다.”
종리운은 혀를 찼다. 그냥 운이 좋은 문파일 수도 있었다. 행운은 가끔 초심자에게 찾아오기도 하니까.
물론 종리운과 제갈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문파들과 달리, 무림맹은 사자신검 장보도 자체가 마교에서 만든 덫이라고 전제하고 움직이고 있으니까.
애초에 수상하기 쩍이 없는 문파가 찾았다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의심이 욕심에 가려진 것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통제하지 못하는 거다. 마교는 인간의 본능을 정말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환혼공을 봤는데도 움직이는 거 보면 그냥 정신이 나간 거지.”
“맞습니다.”
종리운과 제갈헌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이미 천주성에서 온 십이당주는 환혼공에서 마기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리고 종리운은 그걸 모두에게 알렸다.
이건 전부 마교의 덫일 수도 있다고. 정파가 함께 뭉쳐야 한다고. 그러나 야속하게도 사람들은 그때서야 출처를 물어봤다.
천주성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천주성 사람들이 마공을 어떻게 감지하는지는 종리운도 몰랐기에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사람들한테 출처는 무의미한 거지. 그냥 자기 입맛에 맞는 정보가 필요했던 것일뿐. 똑같이 출처가 불명확한 정보인데 하나는 불문하고 따르고, 하나는 꼬치꼬치 캐물어 안 할 이유를 만드니. 차라리 욕망을 좇는다고 하면 위선적이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아비규환 상황에서도 차를 마시던 남궁연화가 말했다.
종리운도 제갈헌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종리운도 제갈헌도 정파 사람들이 이렇게 이면적이고 욕망을 좇는 사람들인지 몰랐다. 그들은 너무 높은 곳에서 고고한 이상을 쫓고 있었던 거다.
칠존의 이름도 불신 대상인 기성(旣成)의 일부처럼 여겨졌기에, 종리운도 그들을 전부 막는 건 쉽지않았다. 빨리 금목환이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악!”
벌써부터 저 언덕 너머에서 선명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애뇌산에 산적한 실혼인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기에, 비명을 지르면 정파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실혼인에 의해 죽은 건지, 정파 사람에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사자신검을 향한 욕심은 아직 넘쳐흐르고 있었다.
*
생각해보면 금목환은 싸우면서 본인에게 피를 튀긴 적이 거의 없다. 갈유월이 알기로 금목환은 싸움이 끝나도 늘 깔끔한 상태였다. 근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머리와 소매, 얼굴이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물론 갈유월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이번에는 조절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선천지기를 터뜨린 유곡의 살수들은 끈질기고 악독했다. 물론 금목환은 그 악독함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괜찮아?”
“···응.”
갈유월은 대답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얼마나 유혈이 낭자했던지 하얀 안개에 핏기가 서린 것 같았다.
주변의 시체들을 보니 다시 방금의 멀미가 되살아났다. 갈유월은 금목환의 속도를 견디지 못해 일 각을 말도 못할 정도로 극심한 멀미에 시달렸었다.
“괜찮아. 가자.”
갈유월은 억지로 일어나서 걸으려고 했지만, 땅이 수평이 아닌 사선으로 보였다. 바로 휘청거려 엎어질 법한 걸 금목환이 확 잡아당겨서 균형을 맞춰줬다.
“아직 안 괜찮네.”
“그런가보네.”
갈유월은 금목환의 소매를 잡는 걸로 타협하기로 했다. 위급한 상황이 지났는데 업히거나 허리를 감기는 건 좀 민망한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했다.
“일단 좀 씻자. 정신도 좀 차릴겸.”
물론 갈유월이 그런 생각을 하건말건, 금목환은 앞으로 나아갔다.
금목환과 갈유월은 주변에 흐르는 계곡으로 가서 핏물을 씻어냈다. 갈유월도 그만하니 정신을 차리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었다.
“근데 이제 어떻게 나가?”
갈유월이 물었다. 일단 살수들을 해치우기는 해치웠는데, 진법의 사문이다. 나가는 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문에도 나갈 길은 있어. 사문 역시 자연의 일부니까.”
“처음 듣는 얘기인데?”
“나도 안지 얼마 안 됐어.”
금목환은 알쏭달쏭한 소리를 햇다. 갈유월은 이해를 못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사실 금목환도 설명하기는 좀 어려웠다. 사기로 가득찬 이곳에서도 순환하는 것만 같은 흐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건 기감이 아닌 피부로 느끼는 감각이었다. 여기는 열려있는 산 속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동굴과도 가까웠다. 금목환은 그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기 위해 손가락에 침을 묻혀 걸었다.
그 감각은 정말 미세하여 금목환도 집중해야 했다. 갈유월은 금목환이 집중하는 걸 알고 뒤에서 조용히 걸었다. 낙엽도 안 밟게 조심하는 건 덤이었다.
금목환은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뒤에서 보는 갈유월이 보기에는 마치 어딘가에 홀린 것 같았다. 말 없이 좌우로 꺾기도 하고, 어쩔 때는 뒷걸음질을 치기도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갈유월도 바람이 빠져나가는 공간을 느꼈다. 하단전에서 뭉쳐서 나올 생각을 않던 내공들도 점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끔 느끼는 바였지만, 내공은 불수의근이나 또 다른 생명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본인이 위험하다 싶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숨어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을 듯했다.
“이제 슬슬 밖이 보이네.”
집중력 있는 침묵을 지키던 금목환이 말을 뱉었다. 갈유월은 그제야 숨을 크게 쉬었다.
“후우.”
“진법에서 벗어났다고 바로 무리하지는 마. 우리는 사기에 오래 노출되어 있었으니까 바로 내공을 발현하면 좀 위험할 거야. 최대한 몸 바깥으로 발산하지 말고 소주천으로 내공의 흐름을 안쪽에서 돌려야 해.”
금목환은 갈유월에게 주의를 남기고 바람이 통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문에서 나가는 순간이었으므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갈유월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바로 안개로 가려져 있던 시야가 맑게 탁 트였다. 진법 안에서는 전혀 울리지 않았던 곤충과 새소리가 들렸다.
갈유월은 금목환의 말에 따라 기감을 바로 확장시키지 않고 소주천을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감은 반사적으로 뻗쳤다.
내공은 정말 생물이었다. 소주천을 하려고 했어도 살기에 반응해버린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맹수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 느낌에 금목환과 갈유월은 우뚝 섰다.
금목환과 갈유월은 위쪽 언덕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수풀로 가득한 곳이어서 육안으로는 꿰뚫어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뻗친 기감이 그곳에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누구지?”
금목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살기는 도리어 노골적으로 변했다. 갈유월은 바로 입술을 씹고 검병에 손을 댔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옆의 소저는 아직 소양이 부족하시군.”
어둠 속에서 끈적한 살기와 달리 말끔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수풀이 헤쳐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나온 사람은 긴 머리를 말총처럼 묶은 미남자였다. 금목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미남자. 그는 검은색 무복을 보라색 허리끈으로 묶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어.”
금목환도 맞은편의 남자도 서로 손을 자연체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갈유월은 그 사이에서 엄청난 내공의 싸움이 오고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본인이 진법에 바로 나섰을 때 내공을 발출하지 말라고 해놓았을 텐데. 갈유월은 금목환이 걱정되었다. 당장 앞의 남자도 내력이 심상찮아 보였다.
“내 정체를 밝혀줄 테니,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먼저 듣고.”
“상계라서 계산 한 번 정확하네.”
금목환과 남자는 말을 주고 받았다. 남자는 웃음기 띤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의 천유현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부제(副祭)의 품을 받은 사람이지.”
갈유월은 그 말에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물론 마교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바는 없지만, 조직의 체계 정도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자칭하기로, 천마는 대제사장(大祭司長) 혹은 대사제(大司祭)라고 불렸다. 그리고 장로들은 차부제(次副祭)의 직함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부제의 품을 받는 건 천마의 후계자인 소천마 뿐이었다.
금목환을 보니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혹시 모르는 건가 했다. 그건 천유현도 마찬가지로 궁금한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알고는 있지. 근데 난 그 체계를 인정하지 않아.”
금목환이 말했다.
“내 입장에서 마교도들은 그냥 다 광신도거든.”
“하하. 그래?”
굉장히 도발적인 말이었지만 천유현은 웃어 넘겼다. 원래 마교가 가장 발작하는 말 중 하나는 광신이라는 단어였다. 그러나 천유현은 그런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정체를 알려줬으니까 질문을 해도 될까?”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너는 왜 여기에 있지?”
천유현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 뭔가 일종의 격장지계인가 생각했지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저 추악한 정파 사람들의 낯짝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난 그걸 모른 척할 정도로 자네가 멍청하거나 뻔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말이야.”
갈유월이 금목환을 바라보니 평소와 같이 표정에 변화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문득, 덜컥 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갈유월도 그걸 모르는 것이다. 갈유월이 보기에 금목환은 바른 사람이었다. 비열한 꼼수들이 판치는 이 강호에서도 늘 정도를 걸었고, 뒤로 무언가를 꾸민 적이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금목환은 고결했고,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런 천덕꾸러기 같은 정파 사람들을 도와주는지 말이다.
그러나 금목환은 별 생각하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가능성이 있어서.”
“가능성?”
“바뀔 수 있는 가능성.”
천유현은 금목환의 말에 싱겁다는 듯 픽 웃었다.
“사람은 안 바뀐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나?”
“그 반례가 나야.”
금목환은 잠깐 멈추고 말했다.
“난 나와 남을 다르게 대하지 않아. 똑같은 사람이니까. 다르게 대하면 오히려 내가 날 부정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 판단은 옳아.”
“근데 네가 그렇게 바뀌었다고 남들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줄만한 의리가 있나?”
“의리는 없지. 난 세상 사람들을 다 아는 게 아니니까.”
“그럼 이해할 수 없군.”
“넌 이해못할 거야.”
금목환은 떨어뜨렸던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검병에 손을 댔다. 갈유월은 그때 천유현의 손이 잠깐 움찔하는 걸 봤다.
“그게 협(俠)이라는 거거든.”
갈유월이 천유현의 살기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처럼, 천유현은 금목환의 살기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아마도 말이야.”
“대답은 잘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천유현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한 번 털었다. 더 이상 손은 떨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시시한 생각이구나.”
순간, 동쪽 언덕 너머에서 비명소리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목환과 갈유월은 반사적으로 동쪽으로 머리를 돌렸지만, 천유현은 그러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