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의협지사(義俠志士) (8)
190화 의협지사(義俠志士) (8)
뒤를 보니 사람들이 없었다. 실혼인들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가 안 보이니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놔줘.”
그때 내 품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갈유월이 내 품 안에 있었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갈유월을 해방시켜줬다.
갈유월은 몸을 빙글 돌려서 내 곁에서 빠져나왔다. 뭔가 황급히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미, 미안해.”
갈유월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난 뭘 사과하는지 잠깐 헷갈렸다. 난 뒤늦게 깨달았다. 본인이 소리를 내서 사람들이 쫓아온 걸 사과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어.”
아무리 유곡의 살수들이 날랜 경신법을 가지고 있어도, 극성의 방축귀매신법을 따라오기는 어려웠다.
"그러면 너랑 같이 있으면 계속 돌아다녀도 되겠네. 웬만하면 너를 따라잡기 힘들잖아."
"확신할 수는 없어. 내가 사람을 피해다닐 수 있는 건, 경신법의 빠름이 아니라 기감 때문이야. 근데 여기는 기감이 먹히지 않아."
"기감?"
"느껴봐."
난 오자마자 느꼈지만, 갈유월은 뭐때문인지는 몰라도 당황해서 기감도 안 느껴봤나보다. 갈유월은 눈을 감고 두 손을 하늘로 향했다.
곧 그녀가 눈을 떴다.
"정말 안 느껴지네."
"여기는 생기가 없어서 그래. 우리의 기감은 생기를 탐지하는 거잖아."
"···그랬어?"
기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다. 사람이 있을 때 나오는 필연적인 호흡으로 대기가 떨리거나, 몸을 움직일 때 연쇄적으로 떨리는 풀잎들. 그런 것들이 곧 기감을 구성하는 요소였다.
난 주변의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갈유월의 눈이 그쪽으로 갔다.
나뭇잎은 왼쪽으로 뒤집힌 채 고정되어 있었다. 과거의 이때는 서풍이 불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여기서 사람을 죽이면 미래의 사람도 죽는 건가?”
“그럴리는 없을 거야.”
여기는 그저 사기가 만든 과거의 편린이다. 현실은 그냥 우리는 진법 안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고, 정신만이 사문의 세계에 들어와있는 거다.
“시간은 절대적이야. 여기는 그냥 환상의 공간이지.”
“그러면 저 사람들한테서 왜 도망친 거야?”
“괜히 우리가 여기서 힘을 쓰면 안 돼. 우리는 여기서 생기를 가진 사람들이고, 사기는 기본적으로 생기를 탐하게 돼있어.”
나는 계속 말했다.
“우리가 지금 자연스레 토납을 하는 것도, 생기를 뿜어내고 사기를 받아들이는 거야. 이것도 우리에게는 좋지 않아. 거기다가 힘을 쓴다고 생각하면, 생기를 쓰고 사기를 채우는 셈이지.”
“근데 넌 아까 경공 썼잖아?”
“그렇긴 하지.”
“이 바보가!”
갈유월이 다시 성을 냈다. 그래도 아까 사람이 쫓아온 건 봐서 그런가, 소리를 죽여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괜찮을 거야. 가진바 내공이 많으니까. 내공의 절대적인 양으로 버티는 거지. 호수에 새똥이 떨어지는 거랑 바다에 새똥이 떨어지는 거랑 다르니까.”
“굳이 그런 비유를 해야 돼?”
갈유월이 혓바닥을 내밀면서 눈을 찡그렸다. 사실 나도 여기에 대해서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모른다고 하면 갈유월은 불안해할 거니, 최대한 단언해서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아예 없는 말을 지어서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추론한 바와 연구된 결과로 말할뿐. 물론 진법의 사문에 대해 연구된 바는 극히 적다. 연구하려면 직접 들어가야 하는데, 누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들어가겠는가.
확실한 건 여기는 현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과거라는 거다. 그건 이미 증명된 바다. 사람들은 시간을 지배하고 싶어했다. 시간을 지배하면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예를 들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과거로 가서 죽여버린다는지. 특히 은원이 많이 얽혀있는 중원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껏 미래에서 온 여행자를 못 만나는 이유는 다 있는 법이다. 너무 간단한 진리지만, 사람은 시간을 역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법은 과거를 보여주는 거지 과거로 보내주는 게 아니다.
물론 내가 추론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나도 사문으로 처음 들어왔으니 정확한 건 모른다.
갈유월이 헛기침을 하더니 주제를 돌렸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
“이 사문에도 핵심이 있을 거야. 그 사기를 생기로 해소시켜야지.”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
“우리는 우리 몸 안에 있는 자연의 생기를 다룰 수 있잖아.”
“아.”
태원지기. 내가 사문으로 자신감있게 온 이유도 이것이었다. 내가 가진 태을헌원신공이나 태원지기는 모두 사기의 상극이다. 진법은 자연을 바꾸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진법이 날 죽일 일은 없을 거라고 봤다.
갈유월을 데리고 온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태원지기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루지 못한다면 사기에 금방 잡아먹힐 수도 있으므로 나한테 어떤 신호를 줬든, 나는 무시하고 종리운에게 갈유월을 건넸을 거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은 편이었다. 제일 위험할 때는 사문의 세계로 들어오는 때다. 그래서 내가 들어올 때는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갈유월의 손목을 잡았던 거다. 지금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한테 걸리면 큰일난다는 거지?”
“뭐, 그렇지.”
갈유월의 말에 난 그렇게 대답했다. 일단 최대한 안 마주쳐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난 먼저 사기의 핵심을 찾으려 했다. 사기의 핵심이 여기의 탈출구고, 탈출로를 먼저 확보해놔야 뭘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가자, 라고 하려고 했다.
갑자기 뒤에서 무언가 날아오지 않았으면 말이다. 그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검은 정확히 갈유월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정말 내 육안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였다.
난 갈유월의 소매를 잡고 있는 손의 반대편을 쭉 뻗었다.
촤악!
비도가 내 팔에 긁혀서 피가 나왔다. 다행히 내가 팔을 돌려서 비도의 방향을 바꿔 떨쳐낼 수 있었다.
“앗!”
갈유월이 내 팔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놀랐던지 다시 소리가 커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샌가 주변 나뭇가지, 숲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갈유월의 외침 때문에 있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분명히 없었던 사람들이다.
“괜찮아?”
갈유월은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나는 태원지기를 사용해서 팔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여기가 사기로 가득찬 공간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실제로 팔에서는 뜨거운 열감과 역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내 기와 상극인 사기일 거였다.
원래라면 내가 압도적으로 태워버릴 수 있는 종류의 내공이었지만, 여기는 생기의 세상이 아닌 사기의 세상이었다. 개도 제 집 앞에서는 세 수를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흐음.”
나는 소매를 이빨로 찢은 다음 팔을 동여맸다. 주변을 둘러봤을 때, 난 놀라운 걸 볼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게 아니었다. 생겨나고 있었다. 갈유월도 그걸 눈치 챘다.
“환각인가?”
“아니.”
나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일단 배후가 마교인 건 확실해보이네.”
“왜?”
“이렇게 비인도적인 애들은 마교밖에 없거든.”
저들은 여기 과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를 쫓아 진법의 사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여기가 진법의 사문인지도 모를 거다. 단지 우리를 맹목적으로 쫓는 것뿐이었다.
그냥 그들이 우리를 추적해왔을 뿐이고, 따라잡혔다. 그 뿐이었다.
“일단 일점돌파를 해야겠어.”
“그래야겠지.”
“넌 왜케 여유로워? 안 아파?”
“아프긴 한데.”
이런 칼에 긁힌 정도야 아프다고 할 수도 없지. 내가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알면 매우 놀랄 거다.
“여기서는 기감이나 내공이 먹히지 않잖아. 조심해야 돼.”
걱정이 가득한 갈유월의 말에 난 미소를 지었다. 갈유월은 내 얼굴을 보더니 성을 냈다.
“뭘 웃어? 웃음이 나와?”
“아니.”
갈유월은 아마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오랫동안 내공의 부족이 약점이었고, 형과 초식으로만 강호를 주유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이곳은 내게 가장 적합한 전장이었다. 난 칼을 빼어들었다.
*
환마 박용한은 지금 기회에 금목환을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마환혼공에 걸린 사람들이 자그마치 오십 명이 넘는다.
그들은 이지를 잃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위로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살인은 본능이다. 살인에 성공할 확률을 높이게끔 행동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아무 제한 없이 사람을 죽이라고 해도, 자기네들 나름의 진을 짜거나 암습을 하는 것이 유곡 살수들이었다. 그러니까 환혼공을 건 것이기도 했다.
“이건 우리 입장에서 도박인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천유현은 속속들이 진법의 핵심 쪽으로 날아가는 살수들을 보았다. 그들은 마인은 아니지만, 마인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마교는 정파와 싸워 이겨야하고, 사파는 정파를 뒤흔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번 계획으로 많은 사파들이 제거됐다.
유곡, 녹림을 포함한 중원의 많은 사파들. 이들은 마교가 중원을 침략하면, 튀어나와 정파를 더 혼란스럽게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중책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건 마교가 조종하는 게 아니다. 치안이 떨어지면 도적들이 나타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유곡은 단련된 살수들입니다. 유곡 전체가 달려들면 칠존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근거 있는 얘기야?”
“과거 칠존 중 하나였던 창존이 유곡 때문에 죽었거든요.”
“그건 몰랐네. 생각보다 유능한 친구들이었군.”
천유현이 웃었다. 그는 아직도 계획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분명 정파 인원들은 소모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특명으로 전한 금목환의 목도 딸 수 있을 것이었다.
“일단 우리도 한 번 가보지. 동물들한테 찢겨서 사체도 못 알아보면 우리도 곤란해지니.”
천유현이 말했다. 지금쯤 죽었을 테니, 빨리 시체를 회수해야 했다. 괜히 갈기갈기 찢겨있거나 그러면 신원을 확인하는 것도 귀찮아진다.
한 고개를 넘어 천유현과 박용한이 올라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피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짙은 향이었다.
“이거 왠지, 느낌이 싸한데.”
천유현의 말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쯤 되니 손익계산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당장 그들이 정파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계획과는 많이 달라졌다.
들고 일어나서 중원을 뒤집고 있어야 할 사파는 진작에 제거됐고, 광란의 산이 되어야 할 애뇌산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흘러갔다.
또한 이제는 진법의 핵심까지 위협당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뒤집어 생각하니,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엇.”
박용한과 천유현의 시야에서 시체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옷차림을 보니 현현검왕이었다. 혼자 죽은 걸 보니 독단적으로 활동하다 죽은 모양이었다.
“쯧. 십왕도 별 거 아니군.”
천유현은 혀를 찼다. 어차피 현현검왕한테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올라가려던 천유현은 갑자기 박용한의 제지를 받았다.
“여기서부터는 사문입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여기?”
확실히 발치를 보니 경계가 나눠져 있는 것 같았다. 사문인 걸 알고 나니 보이는 거지, 모르면 꼼짝없이 들어갈 뻔했다. 환마도 본인이 진법의 작성자라서 표시를 해놨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람이 거의 없는데?”
천유현이 말했다. 본 사람은 현현검왕 하나뿐. 유곡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박용한은 잠깐 말을 하지 못했다. 천유현이 박용한을 채근했다.
“사기꾼아. 말해봐라. 네 청동방울로 부른 유곡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냐?”
“아마, 사문 안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뭐?”
박용한이 말했다. 사문 주변에는 발자국들이 너저분하게 찍혀있었다.
쿵!
그때, 사문 안에서 커다란 파동이 느껴졌다. 확실히 사문 안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계획이 틀어졌다는 걸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