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의협지사(義俠志士) (7)
189화 의협지사(義俠志士) (7)
갈유월은 옆을 봤다. 아름다운 얼굴이 보인다. 늘 무언가를 고심하고 있는 깊은 눈과 오똑한 코, 아집 대신 신념이 느껴지는 입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금목환의 얼굴은 아름다워지고 싶은 모든 여자들의 적이었다.
그는 이 거대한 혼돈을 앞에 두고서도 평온했다. 갈유월의 마음이 쿵쿵 뛰는 것과는 정 반대였다.
스승님은 늘 말했었다.
알지 못하면 먹지 말고, 마시지 말고, 사귀지 말며, 들어가지 마라.
"저기."
"응."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진법의 사문."
진법의 사문. 그래, 알고 있다. 진법의 사문인 건 알고 있었는데, 정말 만에 하나 아닐까봐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대답은 냉혹했다.
진법의 사문은 보통 흉흉한 곳이 아니었다. 같은 진법이라고 해도 사문에서 벌어지는 일은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그만큼 규칙과 파해법이 없는 곳이라는 거다.
무거운 쇠추가 떠오르고, 깃털이 가라앉으며, 가면 갈수록 생기가 넘치는 생물이 있다고도 했다. 물론 어디 요재지이 같은 책에서 본 것이니, 확실하다 말할 수는 없으리라.
"뭔가, 무섭지 않아?"
"무섭다라."
금목환은 검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깊은 눈빛과 어우러진 그 몸짓은 너무나도 야했다.
뭐가 야했는지 말해달라면 어떤 말도 못한다. 단지 보면 알 것이다. 그 입술을 쓰는 동작이 얼마나 성적이고 얼마나 매혹적인지 말이다.
금목환의 행동, 모습 하나하나가 누군가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만약 금목환이 여자였다면 여럿 나라를 망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갈유월."
"응?"
"너니까 얘기하는 건데, 들어줄 수 있어?"
깜짝이야. 갈유월은 금목환의 말에 심장이 하단전으로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그 뒤, 기분좋은 만족감이 그녀의 전신을 채웠다. 그 말은, 금목환에게 본인이 특별한 인물이라는 걸 증명받은 셈이었으니.
갈유월은 허리에 두 손을 넣고 어깨를 피며 답했다.
"그래, 해봐!"
"나 사실 말이야. 무서운 게 뭔지 잘 몰라."
"응?"
갈유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이거, 그건가.
난 태어날 때 공포 적출술을 받았다거나, 두려움은 남자의 수치라거나. 그런 허세 섞인 말들.
아무튼 여자들이 남자들에게서 듣기 싫어하는 말 중 세 손가락안에 꼽히는 말이었다. 그나마 금목환이니까 미간이 찌푸려지는 선에서 참았지, 아니면 토악질을 했을 거다.
그러나 금목환은 갈유월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생···이 아니라, 과거에 좀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 말이야. 그때 감정이라는 걸 좀 까먹었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냥 말하는 그대로야. 난 희노애락오욕애가 정확히 뭔지 몰라.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야. 물론 지금은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어. 내 주변 사람들이 위험하다 싶으면 불안하기도 하고. 몇 개의 감정은 해석할 수 있게끔 됐거든."
금목환은 계속 알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감정의 해석이라. 감정은 느끼는 거지 해석할 게 있다는 말인가.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난 내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됐을 때가 있었어. 한 십 몇년 정도. 근데 그때 이후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불가능하게 됐어."
"그게 가능한 일이야?"
"나도 몰라. 그래서 너니까 말하는 거라고 했잖아. 다른 사람들은 안 믿어줄 거니까."
놀랍게도 금목환의 목소리는 살짝, 아주 살짝 떨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면 평범하게 고저가 없는 말투라고 느꼈겠지만, 지금가지 금목환을 지켜봐온 갈유월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본인의 근원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었다. 본인은 본인이 떨고 있는 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그래. 그랬구나. 고마워. 말해줘서. 그런데 왜 지금 얘기하는 거야?"
갈유월은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근 십 년간 금목환을 보면서 처음 보는 금목환의 모습이다. 이때 정신을 바짝 차려놓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나도 사문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
"근데?"
금목환은 말을 안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푹 숙이더니 그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굳은 살이 박혀있기는 하지만 못 생긴 손은 아니었다. 갈유월은 금목환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혹시 모르니까. 내 손을 잡아. 같이 들어가자."
금목환이 말했다. 그의 말은 끝으로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적어도 금목환은 지금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하나만큼은 잘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금목환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져나왔다.
"이건 내가 어떤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야. 정말 네가 위험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내가 최대한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 거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난 내 사람들은 챙기고 싶어. 아니, 챙겨야 해."
"큭."
갈유월이 웃었다. 금목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말, 진풍경이었다.
만약 여기가 진법의 사문이 아니었다면 저런 말을 듣지도 못했을 거고, 저런 표정을 못 봤을 거다. 웃기게도 진법의 사문이 앞에 있다는 게 굉장히 행운처럼 느껴졌다.
정말 어디 그림으로 남겨놓고 싶을 정도다. 아니, 그러면 안 되겠지. 그렇다면 이 진귀한 광경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너는 네 사람들을 정말 끔찍이 생각하고 있구나. 나도 그 중 껴있고."
"그래."
"난 왜 껴있는 거야? 네 사람들의 범위가 얼마나 큰데?"
금목환이 흠칫했다. 갈유월은 그런 금목환을 바라봤다. 뭔가, 재밌었다. 얼음덩어리던 금목환이 이렇게 흔들리다니. 정말 진풍경이었다.
그에게 꽤 고초를 겪게 하려고 던진 질문이었지만, 금목환은 생각과 다르게 바로 대답했다.
"첫째, 나의 가족들. 둘째, 어쩌면 내가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면 더 편하게 살았을 사람들. 난 그들과 나를 엮은 책임을 져야 해. 너도 마찬가지야."
그 대답은 이미 금목환의 마음에서 정리된 바가 있었던지, 목소리에 고저는 없었다. 갈유월이 아는 금목환의 대화 방식과 같았다. 다만, 대화 내용은 파괴적이었다.
"갈유월, 넌 내 사람이야. 그건 네가 부정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읏."
갈유월은 한 걸음 물러났다. 뜨거운 게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홧홧해졌다. 괜히 놀려주려다가 역으로 당한 것만 같았다. 당연히 금목환은 자신과의 말싸움에서 이기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그게 갈유월을 무너뜨리게 하는 요소였다.
'...내가 금목환의 사람이라고?'
뭔가, 듣기에 따라서 굉장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답답하게도 금목환은 거기까지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다.
본인의 말로는 감정에 관해서 본인이 둔하다고 했는데, 그런 감정에 대해서는 아직 낯선 것 같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자, 빨리."
금목환이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잡으라는 신호였다.
막상 놀렸던 갈유월도 손을 잡으려니까 굉장히 떨렸다. 그녀는 손을 약하게 떨면서 금목환의 손을 잡았다.
금목환은 갈유월의 손을 잡자마자 몸을 뒤로 돌리고 확 잡아챘다.
"앗!"
갑자기 끌린 갈유월은 넘어질 뻔했다.
뭐라 하려고 했지만, 금목환의 귀가 붉어져 있어 그러지 않기로 했다.
뭐라할 것도 없이 그들은 진법의 사문으로 들어갔다. 금목환의 손은 생각보다 컸다.
*
사문으로 들어올 때, 수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그 굉음은 사문으로 다 들어오자마자 조용해졌다.
"...여기는?"
갈유월이 주변을 둘러봤다. 금목환도 따라서 주변을 둘러봤다.
상궤가 어긋나는 곳이라고 했으니,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다.
다리가 열 두 개가 달린 개미라든가, 눈이 세 개 달린 사람이라든가, 이빨이 머리에 나있는 호랑이라든가, 같은 허무맹랑한 환상들.
"뭐, 아무 것도 없어 보이던데?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친 건가?"
갈유월이 짐짓 여유롭게 말했다.
진법의 사문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대개 상궤에 어긋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겁을 주려는 얘기였다는 걸까. 막상 보면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곳인데.
그렇다면 이건 진법가들을 실업자들로 만들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중원 단위의 음모인가.
갈유월은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여기는 그냥 애뇌산의 산등성이와 다를 게 없어보였다. 오히려 진법이 없어서 더 맑기까지 했다.
"일단 조심은 하자."
금목환은 그리 말하고 갈유월의 손을 이끌었다.
그냥 산행을 같이 하는 것 같았다. 갈유월은 손에 땀이 차서 다른 손으로 잡고 싶었지만, 뒤를 돈 금목환의 어깨가 뭔가 단호해보여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금목환이 걷는 걸 멈췄다.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산 언덕이었다.
"왜?"
"주변을 둘러봐."
갈유월이 주변을 둘러봤다. 풀숲에는 가을에 피는 꽃들이 무성하게 나있었다. 위를 바라보니 낙엽도 떨어지고 있었다.
그냥 흔한 가을의 산이었다.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갈유월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은 신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여기는 가을이었다.
"지금, 우리는 가역할 수 없는 걸 가역하고 있어."
금목환이 말했다. 갈유월은 들으면서도 긴가민가했다. 그게 가능한 건가. 가역할 수 없는 건 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환상일 수도 있잖아.”
“저기 봐봐.”
금목환은 손가락을 펼쳐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떤 남자가 말뚝을 뽑고 땅을 덮고 있었다. 말뚝이 박혔던 곳에는 물이 거꾸로 솟구쳐 항아리로 들어갔다.
그뿐인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말뚝을 뽑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반쯤 정신이 나가있는 듯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눈빛이었다.
“탁탑천왕의 눈빛과 같지?”
“···그러네.”
여기는 과거였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진법이 펼쳐지기 전 애뇌산의 과거. 우리는 그걸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말뚝을 뽑는 게 아니다. 말뚝을 박고 있는 건데, 우리가 역행을 하고 있으니 뽑는 것처럼 보이는 거였다.
“그럼 어떻게 하지? 우리는 지금 계속 과거로 빨려들어가는 거야?”
갈유월이 무섭다는 듯 금목환의 팔을 잡았다. 금목환은 갈유월이 격한 것치고는 굉장히 침착한 반응이었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네.”
“뭐?”
“허나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우리는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많아.”
“뭔데?”
갈유월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금목환은 말뚝을 뽑아 뒷걸음질치며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들을 따라 가면, 지금까지 여기서 이 애뇌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지.”
갈유월은 할 말이 없었다. 그걸 지금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라는 건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사자신검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있지. 그리고 우리 진짜 적들의 얼굴도 볼 수 있고. 아마 저들은 상상도 못하겠지.”
금목환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그러나 갈유월은 계속 한 가지 물음이 마음에서 맴돌았다.
그 위기를, 왜 네가 감수해야 되는 건데.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은 왜 혼자 가려고 하는 건데.
괜히 눈물이 차오르려고 할 때, 금목환이 말했다.
“그리고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다 있어.”
“뭐?”
갈유월은 자신도 모르게 금목환의 팔뚝을 때렸다.
“아.”
“그걸 진작 말했어야지!”
타격하는 소리가 찰지게 애뇌산을 울렸다. 거꾸로 뒷걸음질을 치던 애뇌산의 사람들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목환과 갈유월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기도 하고, 시야 사이에 풀과 나무들이 많아 잘 안 보일 터일 거였다.
그때, 사람들이 말뚝을 버리고 금목환과 갈유월 쪽으로 날아들었다. 금목환은 갈유월의 손을 완전히 잡아당겨 품 속으로 끌어안은 후, 뒤로 크게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