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의협지사(義俠志士) (6)
188화 의협지사(義俠志士) (6)
갈유월의 검 주변에 대기가 울렁거린다. 내가 아는 그녀의 힘보다 훨씬 강맹했다. 그녀의 힘이 아닌, 태원지기의 힘이었다.
그녀는 마치 숲 사이를 가르는 바람과도 같았다.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작은 틈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안개로 묻혀있는데도 번쩍거리는 칼의 광채.
"잘하네."
물론 초식, 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어떤 깨달음도 아니고, 내공만 보충된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무인에게 내공이 가지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장족의 발전이라 안 할 수 없었다.
콰콰쾅!
예전에는 빠르기만 했던 갈유월의 검이 파괴력을 담고 있었다.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땅이 패이고 바위가 비산한다. 난 갈유월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싶으면 침을 하나씩 던져줘서 대신 막아줬다.
"안 도와줘도 돼!"
"아, 그래."
내공이 늘어났다는 건 기감도 늘어났다는 것. 몰래 도와주는 걸 들킨 모양이었다.
난 나무 위에서 갈유월을 바라봤다. 그녀도 나와 같이 역시 표현이 서툰 사람이다.
그래서 무표정이나, 뭘 생각하는지 모를 어색한 표정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신나보였다.
그렇겠지. 사람은 본인의 성장을 체감했을 때 가장 즐거운 법이니까.
갈유월의 칼은 막힘 없이 가고자 하는 곳을 간다. 이지를 잃은 사람들이 베어넘겨졌다.
그녀는 유연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검을 찔러 들어오는 상대의 어깨를 지형지물 삼아 넘어가기도 하고, 공중에서 제비를 돌아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그야말로 현란한 검격이었다.
원래 갈유월이 익혔던 신풍검법이란 마치 저런 것이라는 듯.
무아지경으로 베어넘긴다. 산중턱에는 시체들이 쌓이고, 갈유월의 호흡은 거칠어져갔다. 뻣뻣했던 무복은 땀으로 젖어 축 늘어졌다.
"하아."
갈유월이 주변을 정리하고 한숨을 고를 때였다.
갑자기 산중턱에 한기가 감돌고 풀잎들과 쌓여있는 시체들이 얼었다.
퍼석, 퍼석.
남자는 산중턱에 넘쳐나는 시체들을 계단 삼아 올라왔다. 시체들은 모두 얼어있어서, 남자가 밟을 때마다 깨져나갔다.
갈유월도 나도 그를 침착하게 지켜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지를 잃은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남자가 손을 올렸을 때 난 바로 나무에서 쏘아져나가려고 했다. 이지를 떠나 손에 서려있는 내공이 굉장히 흉악했다. 적의가 없다면 저렇게 내공을 끌어올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먼저 움직인건 그 남자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다.
바로 갈유월이었다.
"하아앗!"
갈유월이 기합을 외치며 달려갔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갈유월이 오는 쪽으로 쌍장을 날렸다.
쩌저정!
땅이 갈라지며, 갈라진 틈으로 날카로운 얼음들이 솟아나왔다. 남자의 손은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소수신공. 손이 하얗게 되는 걸로 유명한 무공. 그건 음공 중에서도 극음에 가깝다는 빙공이었다.
음공을 익힌 남자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 나도 알고 있다. 그가 바로 빙제였다.
빙제면 탁탑천왕과 비교해도 크게 인지도나 무력이 밀리지 않는 사람. 갈유월이 상대하기엔 좀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 혼자 해볼게!"
허나 먼저 선수를 친 건 갈유월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불이 튀기고 있었다. 난 나무에서 내려가는 대신 나무기둥에 손을 대었다.
그녀가 그렇게 하고싶다면야. 난 그녀의 의사를 존중했다. 물론 위급할 때는 던질 수 있도록 침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는 건 잊지않았다.
챙!
빙제의 하얀 손과 갈유월의 검이 부딪쳤다. 검과 손의 부딪침이었지만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만큼 소수신공의 강도가 강하다는 뜻이리라.
반탄력으로 튕겨져나온 빙제는 손을 하늘로 향한 다음 주먹을 쥐었다. 그 다음 손가락을 하나씩 바깥으로 튕겨내기 시작했다.
얼어버린 탄지공이 갈유월에게 빠르게 날아갔다. 갈유월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빠르게, 다양한 곳으로 들어오는 공격은 방금까지 연습했었다.
채채채채챙!
갈유월의 검이 번쩍거렸다. 흰색 우박들이 우수수 애뇌산 산중턱에 떨어져 굴러갔다. 갈유월은 쳐내고 나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빙제에게 바로 달려가 바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손목을 베려했다. 갈유월의 검영(劍影)이 초승달을 그린다.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쾌검이었다.
"오."
어떠한 변화도 없이, 가장 빠른 경로로, 빠르게 뻗어냈다.
촤악!
빙제의 오른쪽 손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저기는 힘줄이 있는 곳이었다. 이제 빙제는 오른손을 못 쓸 터였다.
결과는 정해진 셈이었다. 갈유월은 재빨리 검을 거두고 한 발짝 크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체중을 실어 빙제의 하단전을 찔러갔다.
푹!
원래라면 그런 소리가 났어야 될 터다. 칼에 피부가 찢기는 소리, 피가 나오는 소리 따위.
그러나 갈유월의 검은 튕겨졌다. 빙제의 하단전에 소수신공의 빛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난 빙제의 이지를 잃은 눈에서 잠깐의 공포가 스치는 걸 봤다. 무의식을 잠깐 뚫고 의식이 비져나온 거다.
그제야 난 빙제의 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다.
"호신강기를 펼쳐!"
내가 직접 맞서기는 늦었다. 빙제와 갈유월은 정말 두 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콰ㅡ앙!
빙제의 하단전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엄청난 빛과 함께 폭발이 퍼져나간다.
그 찰나의 틈에, 난 갈유월의 호신강기가 무참히 찢어지는 걸 봤다. 그건 정말 느리게 보였다. 폭발이 당장이라도 갈유월의 몸에 닿을 듯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때 내 몸에서 무의식적으로 태원지기가 일어났다. 그건 내가 어떻게 움직일 겨를도 없이 갈유월에게 쏘아져나갔다.
그건 놀랍게도 내가 볼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더 놀라운 건 내 태원지기가 갈유월의 내공과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펼친 호신강기에 내 태원지기가 들어가면서 찢어졌던 부분이 메워졌다.
연기가 났다. 빙제가 서있던 곳에는 무언가 까맣게 탄 자국만 있을 뿐,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땅바닥도 갈유월이 서있는 곳을 제외하면 전부 패여있었다.
"괜찮아?"
"...아, 응."
난 바로 갈유월에게 다가갔다. 갈유월은 멍하니 답했다.
정말 찰나의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넋이 나간 것도 당연했다.
"어떻게 된 거지?"
"진원지기를 폭발시킨 거야."
"그게 가능해?"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사람이 가만히 숨을 참아서 질식사하는 것과 같다. 무의식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무의식을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난 아직 빙제의 공포 어린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안해."
난 갈유월에게 일단 사과를 했다.
"응? 왜?"
"그런 수를 숨기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내가 나왔었을 거야. 그 폭발은 내가 앞에 있었어도 막기 어려운 거였어."
"괜찮아. 난 호신강기가 찢어진 것까지 느꼈지만, 절대 내가 죽을 거라 생각 안했거든."
"왜?"
"네가 뒤에 있잖아."
갈유월은 미소를 지었다. 난, 잠깐 갈유월을 바라보며 넋을 놨다. 그녀의 미소는 거의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물론 그 미소는 곧바로 사라졌다. 내가 넋을 놓고 보니 갈유월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나도 정신을 차렸다. 난 아까 겪었던 상황을 다시 재현해보고 싶었다.
"갈유월. 아까 느꼈지. 뭔가 다른 기운이 들어오는 것 말이야."
내 태원지기가 갈유월의 태원지기와 동화되어 합쳐진 것. 그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의 내공이 그렇게 완벽히 동화될 수는 없다. 그건 마치 얼굴이 똑같다 못해, 인생의 굴곡사마저 같아야 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갈유월의 대답은 내 예상을 아득하게 넘었다.
"아니? 그냥 자연에서 들어온 것 같았는데. 내 기와 똑같았어."
"응?"
"그게 네가 준 거야?"
난 잠시 무림에서의 상식이라는 걸 곱씹어봐야했다.
각자의 내공은 섞일 수 없다. 똑같은 심법으로 내공을 쌓았어도 그건 마찬가지다.
난 그게 태원지기에도 통용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태원지기는 그렇지 않았다. 이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건 말이 안 되는데. 나도 그 태원지기라는 걸 쓰면서, 천주성 사람들하고 싸워봤는데 분명 폭발이 일어났어. 서로 다른 내공이라는 뜻이잖아."
"그래. 그게 정상이지."
안 그랬다면 내가 조현극을 잡았을 때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내공은 다른 성질이 부딪치면 폭발한다.
근데 방금 내 태원지기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였고, 갈유월의 기와 섞이면서 폭발하지 않았다.
그럴리가 없지만, 만약 동질의 기, 같은 기문을 가지고 있는 내공이라면 서로 싸울 수가 없다.
물로 물을 덮고, 불로 불을 태우고, 바람을 바람으로 밀고, 흙을 흙으로 메우는 식이니까.
"근데, 확실히 뭔가 내가 태원지기를 더 잘 느끼게 된 것 같아. 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갈유월이 본인의 몸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갈유월은 태원지기와 더 잘 감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만.”
난 내 태원지기를 일으켜 다시 갈유월에게 넘겼다. 이번엔 무의식 상태 정도로 깔끔하게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어째 섞이기는 했다.
“···이거, 나 엄청 강해진 거 아니야?”
갈유월이 멍하니 말했다. 태원지기의 감응력이 높아졌으니 강해졌겠지. 이거,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왜 내 태원지기가 상대방의 내공과 동화될 수 있도록 바뀌었는지 말이다.
*
이제 난 딱히 갈유월을 시험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시험을 하다가 갈유월이 다칠 뻔한 것도 있지만, 그녀는 확실히 많이 강해지기도 했다.
아무리 괄목상대(刮目相對)라지만, 오늘 부상을 입은 사람이 저렇게 움직이고 또 무공 수준이 크게 올라갔다는 건 상식에서 어긋난 일이었다.
“우와앗!”
당장 갈유월 본인도 본인의 속도나 힘에 낯설어서 발을 헛디디고 있었다.
그것만 보면 우스꽝스러운 광경이겠지만, 지금 상황은 나름 급박했다.
여전히 많은 실혼인들이 우리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그 쪽으로 다섯 명 간다."
"알아!"
난 갈유월과 최대한 등지면서 서로가 맡아야할 방위를 반으로 나누었다. 두 명이서 가장 효율적으로 싸우는 방식이었다.
물론 몰려드는 자들은 대개 유곡의 살수들이라 우리의 적수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정파 사람들도 있었다. 그건 옷차림으로 알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옷차림이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었다. 똑같이 사특한 수를 쓰는 건 똑같았다.
숨어있다가 칼을 질러온다거나, 검을 피하기 위해 나려타곤을 한다거나, 아니면 급소만을 지독하게 노린다거나.
정파인이라면 비웃음 당해야 마땅한 행동들이었다.
무의식 중에는 정파 사람이나, 사파 사람이나 구별이 없었다.
하긴 십왕이라는 자도 나를 앞에 두고 갈유월을 치려는 비겁한 수를 썼는데, 그보다 아랫 사람들이야.
우리는 정말 많은 정파 무인들을 만났지만, 놀랍게도 정정당당한 수를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그렇겠지."
"이럴 거면 정사를 나누는 게 의미가 없겠다."
갈유월이 씁쓸하게 웃었다. 난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생각해볼 것도 있었거니와, 당장 심력을 다른 곳에 쓰면 안 되는 상황에 왔다.
진법의 사문. 애뇌산에 펼쳐져 있는 진법의 핵심으로 들어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곳이었다.
갈유월과 나는 그 혼돈의 힘이 가득한 곳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