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의협지사(義俠志士) (5)
187화 의협지사(義俠志士) (5)
딸랑.
방울 소리가 산 전체에 공명했다. 내공을 담은 방울 소리였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일단 진법 안으로 들어온 이상, 움직임은 전부 읽히고 있다고 봐야한다.
나는 최대한 갈유월이 흔들리지 않도록 나무를 탔다. 애뇌산은 험산으로 유명한만큼 올라가는 모든 곳이 경사가 큰 절벽으로 되어있었다. 그래도 지금 나한테 갈 수 없는 경로는 없었다.
난 절벽을 평지마냥 뛰었다. 당장 해본 적은 없지만, 방축귀매신법 극성이면 수상비(水上飛)도 가능할 터. 이런 절벽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절벽을 내려다보니 내가 밟았던 자국들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여기는 모래바닥이 아니라 바위였다. 굳이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저만큼의 힘이 실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중턱에 올라와서 경치를 바라봤다. 여기서 진법의 핵심이 있는 꼭대기까지는 단 한 번의 쉬는 공간 없이 달려야 했다. 마지막 휴식 공간이 바로 여기였다.
“갈유월.”
내가 입을 열었다. 뒤는 조용했다. 난 몰랐는데, 그녀는 꽤 연기를 잘했다.
“대답 안 하면 버리고 갈게.”
등 뒤에 부드러운 감각이 전해져온다. 갈유월이 몸을 살짝 떤 것이다. 분명 무공을 배우면서 운동을 많이 할 텐데, 어째서 이렇게 피부가 부드럽고 말랑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깼으면서 왜 가만히 있어.”
“···어떻게 알았어?”
목소리가 내 등에 묻혀 나왔다. 난 알고 있었다. 갈유월이 꽤 전부터 깨있었다는 걸 말이다. 잠에 자면 호흡은 완전히 안정화되어있지만, 깨있으면 호흡이 조금이라도 불안정해지기 때문이었다. 난 그 호흡을 느꼈다. 그러나 갈유월은 왜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깬 걸 들키고 싶지 않나보다, 해서 놔둔 거다.
그리고 종리운이 갈유월을 데리고 간다고 했을 때, 갑자기 몸에 힘이 들어가 내게 안긴 힘이 들어가서 데리고 간다고 했고. 아무리 그녀가 거짓말을 잘해도 무의식적인 신호마저 감출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아는 거야.”
“그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도 알아?”
난 잠깐 생각했다. 유치한 말이었지만 진지했다. 솔직히 마음까지 읽을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굉장히 부끄러워.”
아. 생각보다 쉬운 답변이었다. 나는 수그리고 그녀를 내려주려고 했다. 근데 갈유월의 한쪽 팔이 내 목을 감아왔다.
“안겨있는 게 부끄럽다는 건 아니야. 아니, 부끄럽긴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니야.”
아니라는 말을 왜 이렇게 많이 쓰는지. 업혀 있는 게 부끄럽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기서 난 아무 것도 못했어. 그게 너무 부끄러워.”
“아.”
그건 또 그것대로 쉬운 답변이었다. 알고 나면 쉬운 답변이지만 어찌 떠오르지 않는지. 감정과 관련된 건 내게는 여전히 낯설었다.
갈유월이 나를 꽉 안았다. 무복과 무복 사이에 간격이 없어 그녀의 살결과 굴곡이 전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이 얼어버렸다. 갈유월이 내 등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 뒤를 쫓는 게 아니라, 옆에서 같이 도움을 주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근데 그 사람은 지금 너무 멀어.”
나는 아무 말 없이 갈유월의 말을 들었다.
갈유월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내게 계속 말했다.
"도무지 내가 어떻게 쫓아가야할지 보이지 않아. 그 사람에 비해 난 너무 부족해."
갈유월이 이렇게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다. 난 사실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갈유월은 자존심이 꽤 높은 사람이었다. 또 그 나이대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기도 했다.
"당장 넌 약관도 안 된 나이에 오룡삼봉이잖아. 또 무한제일미라는 별호도 있잖아."
갈유월은 창피해서 언급을 안 하는 것 같고, 나도 굳이 그걸 입에 담을 이유가 없었지만 갈유월은 그런 별호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서삼미와 무한제일미가 비슷한 나이대라서 자주 엮고 다닌다고 한다. 내가 아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굳이 더 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강서삼미는 모두 황금세가 사람이며, 무한제일미 역시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여하튼 그들은 속칭 잘 나가는 사람들임에 분명했다. 허나 갈유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니야.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갈유월에게 이런 추앙까지 받는 걸까. 난 갈유월의 인간관계를 전부 모르기에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갈유월이 누구를 추앙하는지가 아니었다. 갈유월이 내 사람 중 하나라는 게 중요했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
"...응?"
"도와준다고."
갈유월은 갑자기 눈물을 멈추고 히끅, 소리를 냈다. 딸꾹질을 하는 거 보니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지금 넌 특별한 걸 가지고 있잖아."
내가 말하자, 갈유월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폈다. 뭘 말하는지 안 모양이었다.
"아, 그, 천주성 사람들이 쓰는 기 말이지?"
"응. 태원지기라고도 하지."
"내가 가지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내 호법을 서면서 느낀 것 같던데. 굳이 말할 필요는 없잖아."
"왜?"
갈유월이 물었다. 난 말을 하려다 멈췄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 힘의 진가를 깨달으면 의무감을 가지게 될 거고, 난 내 사람들한테 어떠한 의무나 부담감도 쥐어주기 싫다는 걸 말이다.
난 그런 말은 부끄러워서 못한다.
스승님한테도 가족들을 아낀다고 말할 때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난 이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대략 해석할 수 있었다. 물론 다는 아니었다.
아까 갈유월이 날 꽉 안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은 아직도 해석 불가였다.
"그러면 왜 지금은 알려주는 거야?"
"그야 네가 힘들어하니까."
간단했다. 적어도 난 내 사람의 의지에 앞서 내 의지를 관철시키지는 않으려 한다. 난 이들을 다루는 게 아니었다. 같이 가는 사람이었지.
또 난 무력감이 얼마나 힘든 감정인지 알고 있다. 무력감과 절망, 난 세상에서 그것만큼 악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갈유월이 뭔가의 결여를 느낀다면, 그걸 굳이 안 채워줄 필요는 없었다.
"넌 알면 알수록 모르겠어."
그거 신기하네. 나도 나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나라는 사람을 모르겠다.
전생에서 방구석에서 갇혀 덜덜 떨었던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니면 지금 소제라고 불리는 금목환이 나인지.
"그럼 그 내공을 쓰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거야?"
"응."
"어떻게?"
"그거야 써보면 되지."
나는 감히 생각하건대, 태원지기를 느끼는 순간 십왕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녀가 태원지기를 제대로 다뤘다면 탁탑천왕에게 그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다.
당장 이 당주인 송천우도 원래는 일반 사람이었는데, 태원지기를 느끼고 당주까지 올라갔다고 했다.
태원지기는 그렇게나 정순하고 방대한 힘이었다. 물론 갈유월처럼 이미 익힌 내공이 있다면 조심히 써야했지만, 내가 옆에서 봐주면 문제 될 일은 없었다.
"...나도 몇 번 써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던데."
"처음에는 당연히 잘 안 되지."
갈유월은 풀이 죽었지만, 나는 그걸 타일렀다. 당연하지만 그녀도 재능과 오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괜히 오룡삼봉이 아니고 칠존의 제자가 아니다. 조금만 이끌어주면 잘 다룰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난 갈유월의 손을 잡았다. 갈유월이 불에라도 데인 듯 내게서 손을 빼려했다. 하지만 난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뭐, 뭐하는 거야!"
방금까지 울어서 그런가 목소리까지 뒤집혔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잠잠해졌다. 지금 나는 내 태원지기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걸 갈유월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고 있으니, 감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였다.
얼굴이 빨개졌던 갈유월도 곧 눈을 감고 호흡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갈유월이 눈을 떴다. 난 그제야 손을 풀어줬다.
"뭔가 느꼈어?"
"응."
역시 갈유월은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난 다음 뒤늦게 깜짝 놀랐다.
"어, 뭐야. 아픈 게 거의 사라졌는데?"
"인간이 회복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러움을 감지하고 운용하고 있으니 자연의 영향을 더 받을 수밖에."
특히 시간이 중요한 뼈 같은 건 태원지기로 금방 붙일 수 있을 거였다. 물론 혈종이나 몸 안의 종양이 있으면 운용하면 안 되겠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것들은 커지니까.
치료를 마치고 해야겠지.
물론 이렇게 갈유월이 빨리 나은 건 전에 조치를 취해서다.
피가 뭉치고 장기가 상한 걸 치유하고, 시간만 필요한 상황을 만들었기에.
"신기하다."
"난 아무 것도 안했어. 이게 네가 가진 힘이야.”
갈유월은 눈을 빛내며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뭔가 그 몸짓을 보면서도 느끼는 감정이 있었다.
가끔 작은 동물들을 보면 느끼는 감정인데, 그게 무슨 감정인지는 정확히 모를 일이었다.
"그럼 이제 힘을 가졌으니 써봐야겠지."
"써본다고? 어디서?"
"여기서."
난 일어났다. 갈유월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하긴, 여기는 진법 안이니까 기감이 많이 둔해져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나도 기감이 떨어져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이 진법들은 정밀하고 강력했다.
대충 느껴진다. 얼마나 이 진법들에 공을 들였는지.
그러니까 저렇게들 달려오는 것이겠지. 이 진법을 만드는 수고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자. 한 번 싸워봐.”
난 바로 나무 위로 올라갔다. 갈유월에게는 그냥 사라진 것처럼 보일 터였다.
나무 위로 올라가니, 이제는 육안으로 보였다. 눈빛에 이지를 잃은 채로 우리 쪽으로 오는 사람들이 말이다.
*
너무 당황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금목환과 둘이 함께 있게 됐고, 금목환 앞에서 울기까지 했고, 금목환을 안아도 보고, 금목환한테 위로도 받아보고, 금목환과 손까지 잡아봤다.
물론 가장 놀라운 건 태원지기가 이렇게 강한 힘이었다는 거다. 이걸 정파 무인들이 전부 배운다면, 당장 무인들의 경지 구분을 달리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태원지기를 느끼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겠지만.
갈유월은 본인의 재능이 뛰어나서 태원지기를 익힌 게 아니라, 금목환의 태원지기가 너무 강해서 느낄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혼자 다룰 때는 아무 것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근데 금목환이 태원지기를 전해주고, 어떻게 운용해야하는지 진기도인으로 알려줬다.
외공으로 치면 몸에 손을 대서 자세를 교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부끄러웠다. 물론 부끄러운 건 본인만이었다. 금목환은 아무 표정도 없었으니까. 정말, 어쩌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갈유월의 눈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탁탑천왕과 같이 흐리멍텅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갈유월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꺼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금목환에게 지도를 받았다. 지금 사라지기는 했지만 어딘가에서 분명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아까는 멀리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갈유월의 옆에서 검격을 날리고 있었다. 몰아치는 검격과 비도.
“흡!”
갈유월은 태원지기를 충만하게 운용했다. 그러자 마치 날아오는 검과 암기들이 멈춰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연의 일부인 듯. 아니, 자연의 일부가 된 건 본인일 수도 있었다.
갈유월은 그에 따라 검을 휘둘렀다. 굳이 급하지 않아도 됐다. 그것들은 멈춰져 있었으니까.
전부 검으로 맞대고 나서야, 멈춰져 있는 세상이 깨졌다.
채채채채챙!
전방위로 날아왔던 무수한 공격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갈유월의 주변 원형에는 암기들이 가득했고, 주변에 있는 검객들도 한참을 물러나있었다.
“···어?”
오히려 당황한 건 갈유월이었다. 지금 자신이 한 건가. 원래였다면 한 방위만을 막고 뚫어서 회피하는 방식을 썼을 건데, 모든 방위를 쳐내어 막아냈다.
본인이 아는 본인의 경지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기예였다. 정녕, 이 짧은 시간만에 이렇게 바뀌는 게 맞는가. 완전 상궤에 어긋나지 않은가.
아니,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금목환이라는 존재 자체가 상궤에서 어긋난 존재다. 금목환도 어긋났는데 본인은 어긋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금목환은 도와줘버렸다.
금목환과 자신의 거리를 좁히는 걸 말이다.
갈유월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짜증나지만 금목환 주변에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보다 더 앞서나가야 했다.
검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칼날에 태원지기가 가득 들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