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의협지사(義俠志士) (2)
184화 의협지사(義俠志士) (2)
뭘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갈유월을 챙겨서 떠날 수도 없었다. 이 거한의 공격은 내가 맞상대한 사람 중에서 제일 빠르고 거셌다. 물론 변화는 없어서 피하기는 쉬웠지만, 속도와 파괴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었다.
“갈유월, 괜찮아?”
“···으.”
갈유월은 정신이 혼미한 듯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뭔가 대답을 하려는 듯 오물거리다가 끝내 말로 내뱉지 못하고 기절했다. 내가 와서 좀 안심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지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쾅!
난 그 거한이 어딘가에 홀리듯 움직이고 있다는 걸 진즉 눈치 챘다. 그는 정말 본능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성의 상징인 눈빛은 누군가가 꺼트려놓은 듯했다.
순식간에 내 검과 거한의 봉이 열 합을 나눴다. 이 정도면 같은 십왕, 암왕 조현극이나 투왕 장덕수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실력이었다. 난 알고 있었다.
몇십 근짜리 철근을 본인의 수족처럼 휘두르는 괴물이 있다고. 그 별호가 탁탑천왕이라고 했나.
“탁탑천왕?”
그러나 불러도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성을 잃은 상태니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강맹한 공격들은 내 칼에 전부 막혔다. 만천조종검의 대라회연은 계속 회전하며 직선으로 날아오는 철봉들을 뒤로 흘렸다. 그에게는 어떠한 타격감도 없이 공중을 휘젓는 느낌일 터였다. 그에 따라 그가 뿜어낸 강기들도 뒤로 흘러가서 숲을 파괴했다.
탁탑천왕은 짐승의 신음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 본인의 공격이 막히니 뭔가 바뀔 조짐이 보였다. 내 예상은 그대로 들이맞았다.
탁탑천왕의 철봉이 여전히 엎어져 있는 갈유월에게 직진한 것이다. 나는 놀라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하.”
탁탑천왕은 내가 알기로 뿌리 깊은 정파는 아니었어도 사파는 아니었다. 그런데 쓰러져 있는 사람을 공격해 내 빈틈을 만들어보려한 거다. 비열한 사파 사람들이나 할만한 행동을, 십왕씩이나 되는 명예를 가진 정파 사람이 한 거다.
더욱 어이없는 건 계산과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닌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거다. 지금 탁탑천왕은 본능대로만 움직이고 있으니까.
난 탁탑천왕의 철봉이 갈유월에게 닿기 전에, 갈유월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아 뒤로 날았다.
쾅!
땅이 금가며 깨졌다. 내 허리에 작은 갈유월의 몸이 꼈다. 기절한 그녀의 입에서는 숨이 미약하게 나오고 있었다. 호흡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갈비뼈 쪽이 다친 모양이다. 팔이 부러진 건 육안상으로도 확인 가능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어보이지만, 그렇다고 늦게 고쳐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뼈가 부러진채로 오래 되면 붙기 힘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일단 갈유월이 강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탁탑천왕에서 멀리 떨어졌다. 탁탑천왕보다는 내가 빨랐고, 거리는 한 걸음마다 멀어져갔다.
탁탑천왕은 쫓아오면서도 봉을 계속 휘두르며 내게 강기를 쏘아내고 있었다. 난 갈유월의 몸을 최대한 고정시키는 선에서 나무들을 옮겨다녔다.
탁탑천왕의 강기가 온갖 나무와 바위들을 부수고 폭음을 냈다. 이런 산에서 이 정도 크기의 폭발들이라면 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느낄 게 분명했다.
“저기서 소리가 난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폭음을 듣고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탁탑천왕은 노골적으로 갈유월을 노렸기에, 난 갈유월을 두고 싸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애뇌산의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꼴이 됐다.
물론 우리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탁탑천왕은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는 듯 오로지 날 쫓아왔다.
“소제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면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늘었고, 우리쪽 뒤로 유성처럼 꼬리가 길게 남았다. 당연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면 아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가주!”
그 목소리는 익숙했다. 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바로 맞은편이었다. 맹주, 검존 종리운이 작게 보였다. 작게 보일 정도고, 목소리가 이렇게 작게 들릴 정도면 최소 십 리는 떨어져있는 듯했다.
종리운은 날 본 다음에야 내 옆에 껴있는 갈유월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머리에 얼굴이 덮여있어 누군지 못알아본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종리운은 그 거리에서도 내가 크게 느낄 만큼 소리를 쳤다.
“서, 설마. 그거 유월이인가!”
“네. 맞습니다.”
종리운과 나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상승의 고수들이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손톱만하게 보이던 종리운은 어느덧 나보다 커져있었다. 이제는 굳이 내공을 써서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까워진 것이다.
난 바로 갈유월을 종리운에게 던졌다. 던졌다는 표현은 과격하니까 띄웠다, 정도로 해둘까. 종리운은 기겁하면서 갈유월을 안아들었다.
“잠시만 맡겨두겠습니다.”
난 바로 디딤발을 한 바퀴 돌려 탁탑천왕쪽으로 몸을 돌렸다. 꽤 멀리 있었는데도, 내가 멈추니 탁탑천왕은 거의 눈 앞까지 와버렸다. 탁탑천왕도 느린 속도는 아니었던 거다.
철봉이 내게 직선으로 다가온다. 오랜만이었다. 어느 정도 무공을 배웠다고 생각했을 때, 이런 순수한 공격은 말이다. 마치 동물이 물어 뜯으려고 오는 것처럼 본능적이고 군더더기 없다.
정신을 잃은 탁탑천왕의 무공은 내 무공과는 완전한 상극에 있었다. 물에는 직선이 없다. 직선처럼 보이는 곡선만이 있을뿐이다. 내 무공은 상대방을 감싸고 머금을 수 있을 정도로 유(柔)하다.
직(直)과 곡(曲), 유(柔)와 강(强). 모든 면에서 상반되어 있다. 난 잠깐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수비를 하며 계속 봤다.
“어어?”
내가 계속 밀리자 누군가가 당황한 소리를 낸다. 이렇게 소란을 부리며 달려와서 그런가 생각보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허나 난 그들을 신경 쓸 재간이 없었다. 깊은 관념으로 들어간다. 인간의, 동물의 본능과 자연의 본위가 완전히 상극이라는 점. 나는 남해십이검부터 자연을 형상화하는 검을 썼다. 그래서 저런 무공이 낯설었다.
그러나 내게 넌 누구냐, 라고 물으면 자연이 아닌 인간이라고 할 것이었다.
나도 한 번 해볼까. 나는 검을 사선으로 들었다. 그 다음 대각선으로 그어냈다.
내가 칼을 휘두르는 소리는 뒤늦었다. 휘두르는 속도를 소리가 못 따라가는 것이었다.
쿠콰콰콰쾅!
이건 만천조종검의 어떤 부분과도 닮지 않았다. 이건, 새로운 무공이었다. 난 이렇게 부러질 정도로 올곧은 무공을 써본 적이 없다.
마치 세상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탁탑천왕은 그 사이에 운이 나쁘게 껴있었다는 느낌.
탁탑천왕이 쇠봉을 들어 막았다. 강과 강의 대결은 단순하다. 더 강한 쪽이 이기는 거다.
서걱.
오로지 쇳덩이로만 되어있던 봉과 함께 탁탑천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양분됐다.
쿠궁.
거구와 철봉이 땅에 떨어지면서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벤 것 같지도 않은 만천조종검과 달리, 손에 직접적인 감각이 소름돋게 올라왔다.
자인검(自人劍)이라는 새로운 무공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
금목환이 탁탑천왕을 일수에 베어갈랐을 때, 생각보다 구경꾼이 많았다. 당장 그렇게 소란을 내면서 다니는데 사람이 안 모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금목환이 품에 안겨있는 여자를 검존에게 떠넘기고 한 수에 탁탑천왕을 해치워버리는 걸 보았다.
말해봤자 입만 아픈 얘기지만, 탁탑천왕은 검존 종리운을 제외하고서는 여기서 최고수 반열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비등하게 싸웠어도 눈을 씻고 다시 봤을 텐데, 일수에 벤 건 환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직도 이상한 상태인가?”
“그런 것 같군.”
이미 환마의 환영을 경험한 이들은 금목환이 탁탑천왕을 베었다고 쉽사리 믿지 않았다. 약관의 무인이 불혹을 넘은 십왕을 베었다는 걸 어떻게 믿으라는 말인가.
그러나 그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코를 간질이는 풀냄새의 선연함으로 환각이 아님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종리운과 천주성에서 온 당주들은 금목환이 십왕 이상의 경지에 올라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있던 중원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탁탑천왕이 일수에 죽었다니.”
“소제가 나이에 비해 고강한 무공을 가진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던가?”
“용봉지회 결과는 이변이 아니었군.”
사람들은 금목환을 바라봤다. 금목환은 바로 자신이 끼고 있던 여자를 눕히고 있었다. 그는 바로 품에서 침과 금창약을 꺼내 조치를 하기 시작했다.
쓰러져 있는 사람 역시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비봉이었군.”
“상처는 탁탑천왕한테 얻은 거 같은데.”
“그러면 회복하기 힘든 거 아닌가?”
종리운은 사람들이 원으로 둘러싸 수군거리는 것이 거슬렸지만 뭐라할 수 없었다. 진지한 얼굴로 금목환이 갈유월을 치료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선에게도 가르침을 받은 아이다. 침술이나 의술에도 조예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금목환은 전혀 주저 없이 갈유월에게 할 수 있는 조치들을 해나갔다. 침을 놓기 전 몸이 버틸 수 있도록 내공을 흘려보내고, 팔을 수평으로 받쳐든 다음 부목을 대어 묶었다. 그 조치들이 너무 능숙하여 노련한 의원을 보는 것만 같았다.
“거 참, 잘하는군.”
“최소한의 조치를 할뿐입니다.”
“후유증은 없겠지?”
“육체적인 후유증은 없겠지만, 정신적인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죠.”
금목환이 말했다. 종리운이 입술을 살짝 씹었다. 사실 육체적인 후유증보다 무서운 건 정신적인 후유증이었다.
자신감이 한 번 떨어지면 무인이 그걸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한 번 패배에 겁을 먹거나 실의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는 무인들이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유월이는 안 그럴 겁니다.”
금목환은 여전히 기절해있는 갈유월을 조심히 받쳐들어 종리운에게 넘겨줬다. 종리운은 받을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유월이는 깬 다음 처음 보는 얼굴이 나보다 자네이길 원할걸.”
“네?”
금목환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종리운은 금목환이 정말 부족한 게 하나 없는 청년이라 생각했지만,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감정에 관해서는 서투르다는 점.
당장 가족들한테 얘기하는 것도 딱딱해 보이는데, 남녀관계를 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괜히 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제자녀석이 불쌍하게 보였다.
어디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제자를 좋아하면 잘 밀어줄 자신이 있는데, 황금세가 가주는 좀 힘들었다. 애초에 황금세가가 무림맹을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나이는 어리지만 동료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정말 과언이 아니라, 황금세가 가주는 배경이나 무위나 외모나 끝에 서있는 사람이 아닌가.
분명 갈유월이 아름다운 건 맞지만, 그것만으로 꼬시기에는 금목환은 너무 높은 벽이었다.
금목환은 종리운에게 갈유월을 받고 등에 업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사람들이 금목환 쪽으로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이,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소제의 진면목이군요. 개안을 했습니다.”
“금 대협. 여기 오기 전에 제가 서한을 보냈는데 이렇게 볼 줄은···”
금목환에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다른 명숙인 종리운은 뒤로 밀려났다. 이것이 격세지감인가. 지금 당장 사람들의 인식으로는, 검존보다 소제가 더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람이었다. 당장 그건 탁탑천왕을 일검에 벤 것으로 극대화되기까지 했다.
종리운은 그것을 보면서 느꼈다. 본인이 그렇게 노력했던 정파 규합을 금목환은 나타나자마자 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강호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무인이라는 건 절대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자신은 고작 칠존 중 하나였지만, 금목환은 새로운 무림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젊은 무인들이 금목환을 보며 눈을 빛내는 걸 보면 그 사실은 명백해보였다.
“금 대협, 저에게 한 수를 내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보게! 당장 전투를 끝내신 분인데 무례하지 않은가!”
금목환은 별 말도 안 했는데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금목환 입장에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위대가 생긴 셈이었다.
혼란스럽게 들끓었던 애뇌산이 금목환의 등장과 함께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산이 잠잠해지는 것을 꼭대기에서 굽어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소천마 천유현, 환마 박용한.
그 중에서 환마 박용한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