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의협지사(義俠志士) (1)
183화 의협지사(義俠志士) (1)
운남은 당연히 혼란스러웠다. 운남 전체에 사자신검의 위치가 적혀있는 방이 나돌았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개판이군.”
사실상 일반인들은 없다시피 했고, 무인들만 가득했다. 중원의 벽지(僻地)라고 불리는 운남이 감당하기는 거대한 일이었다.
난 굳이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사자신검의 비급이 애뇌산에 있다는 건 이미 운남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중원 전체의 문파가 아닌 운남 전체에만 방을 돌린 것 같았다.
그 방은 누가 붙였을까. 아직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했다. 이런 것들은 굳이 마교도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돈 욕심이 조금 있는 중원 사람한테 붙여달라고 하면 그만이다. 돈을 좀 찔러주면 일을 요구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본인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행할 사람이 수두룩했다.
난 정말로 많이 봐왔다.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마교의 목적과 부합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마교는 우리를 움직이기 위해서 고독과 환혼술도 쓰지 않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만 건드려서 중원을 쥐락펴락하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예를 들면 무당의 목송, 황보세가의 황보무진 같은 경우가 그러했는데, 그들은 마인의 의도대로 움직였을 뿐 마인은 아니었다.
나는 머리를 털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골치 아픈 관념에 빠졌었는가. 난 당면한 실제적인 일을 처리할 뿐이었다. 태원지기를 익히고 나서 부쩍 공상이 잦아졌다.
콰쾅!
저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애뇌산이 있는 쪽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갈유월은 애뇌산에 들어오자마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상당히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내공의 순환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가는 걸 기본으로 하며, 대기처럼 가벼운 건 뜨고 무거운 건 가라앉는다.
그러나 지금 이 애뇌산에 흐르는 기운은 거꾸로 되어있었다. 무거운 것이 뜨고, 가벼운 게 가라앉고 아래에서 위로 역행한다. 그녀의 눈에 작은 물줄기가 보였다.
그 물줄기는 자세히 보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게 아닌,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있었다.
“진법이군.”
종리운이 말했다. 이렇게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건 역시 진법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건 보통 진법과는 다른 듯했다. 진법은 자연의 흐름을 살짝 바꿔놓고 돌려놓는다면, 이건 완전히 거꾸로 되어있었다. 자연의 양해를 구하느냐 아니면 반하느냐의 차이였다.
“진법도 있고, 마인도 있습니다.”
목단화가 말했다. 지금 일행은 종리운, 목단화, 갈유월 이렇게 총 세 명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면 분산해서 알아보는 게 더욱 효율적이었다.
실제로 괜히 고수들이 너무 많아 검로가 꼬이는 것보다, 서너 명 정도의 소규모 단위로 움직이는 게 훨씬 나았다.
“그 마인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건 진짜인가?”
종리운이 물었다. 그는 아직도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마인을 감지할 수 있다는 내공이 따로 있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황금세가 가주를 못 믿는 겁니까?”
“도저히 기전이 이해가 안 되서 말이지.”
목단화가 금목환을 언급하자 종리운이 한 발 물러났다. 원래라면 아예 안 믿었겠지만, 그나마 미심쩍은 이유는 금목환이 십이당주가 마인을 감지할 수 있다고 공언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가주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저 아이도 지금 느끼고 있으니까요.”
목단화는 갈유월을 가리켰다. 갈유월은 깜짝 놀랐다.
“뭐, 뭘 느껴요?”
“마인의 기운, 역천명(逆天命)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
갈유월은 입을 닫았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본인이 느낀 게 마인의 기운이라는 것을.
“느껴지느냐?”
종리운이 눈동자를 크게 뜨고 물어보자, 갈유월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숨긴 건 아니지만 이렇게 밝혀지니까 민망했다.
“이제 좀 믿으시겠습니까?”
“큼.”
목단화의 말에 종리운이 헛기침을 했다. 본인의 제자인 갈유월이 느낀다는데 그게 거짓말일리는 없었다.
그 후 목단화는 앞서갔다. 갈유월은 목단화를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마인의 기운을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느꼈다.
경계하며 산 깊숙이 들어가는 와중, 급작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악!”
그 소리는 벼랑에 몇 번이나 부딪친 듯 멀리서 들렸다. 그와 함께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살기가 느껴졌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진법이 만들어낸 가짜 살기와 사람이 뿜어내는 진짜 살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하수는 없었다.
일렬로 서있던 세 명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직후 그들이 있던 곳에 비도들이 날아와 박혔다. 맨 마지막에는
“살수!”
종리운은 바로 갈유월 쪽으로 쏘아져나가려고 고개를 들었다. 제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종리운의 시야엔 뿌연 안개만이 있었다.
“유월아!”
종리운이 사방을 둘러봤다. 산지는커녕 사방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가까이 있던 목단화와 갈유월 역시 당연히 사라져있었다.
*
빛이 보였다. 갈유월은 당황했다. 이 환영은 장소열이 주산군도에서 금목환과 곽진도, 한유림을 갈라놓기 위해 쓴 환영탄의 작용이었지만, 갈유월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빛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뿐이었다. 빛이 모여지는 한 점으로 갔을 때, 갈유월의 시야가 확 트였다. 빛 하나 비춰지지 않은 깊은 산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른 폭포의 흔적이 있었다.
갈유월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원래도 그림자로 덮여있었지만, 더 진한 그림자가 그녀를 감싼 것이다. 위에서는 커다란 거구가 위협적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쾅!
갈유월은 구르는 듯 앞으로 뛰쳐나가 피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땅을 짚은 후 몸을 회전시켜 뒤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그녀가 있던 곳에 거대한 철봉을 든 거한이 있었다. 거한의 몸은 왜인지 피칠갑이었다.
그 사람은 이미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애뇌산 입구에서 본 사람이다. 십왕 중 하나, 탁탑천왕이라고 했었지.
탁탑천왕의 눈을 보자마자 갈유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섬뜩한 눈빛이었다. 이지를 잃어버린 눈빛이었다.
아까 빛무리에 감싸지기 전 살수들의 눈빛도 딱 저랬다. 아마 유곡의 살수들인 것 같았다.
“환혼술···”
알고 있다. 마교에는 사특한 방법으로 사람의 혼을 제압해 부리는 기술이 있다고. 그런 비겁한 짓을 전문적으로 하는 환마라는 장로가 있다는 것도.
십왕 정도 되는 사람의 혼백이 제압당할 정도면, 환마가 온 것인지. 아직까지 정확하지는 않았다.
허나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바로 탁탑천왕이 눈앞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갈유월은 바로 발검했다. 그녀의 칼은 신속했다.
챙!
탁탑천왕의 철봉과 갈유월의 검이 부딪쳐 불티가 퍼졌다. 갈유월은 눈을 찌푸렸다.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손이 저릿했다.
갈유월이 반탄력을 이용하여 뒤로 날아갔다. 힘 대 힘으로는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갈유월이 종리운에게 사사받은 신풍검법도 쾌에 치중한 검법이었다.
“···후.”
갈유월은 탁탑천왕과 간격을 뒀다. 아까 맞부딪침으로 인해 탁탑천왕의 약점을 알았다. 가까이서 봤을 때, 그의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는 걸 눈치 챈 것이다. 오른쪽 눈동자는 본인의 검을 향해 움직였는데, 왼쪽 눈동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왼쪽 얼굴이 전체적으로 화상을 입은 걸 보면 폭발물 같은 것에 다친 것 같았다. 그것도 방금 전이다.
탁탑천왕은 원래 싸우는 방식이 그런 건지, 의식이 없는 상태라 그런지 직진으로밖에 달리지 않았다.
탁탑천왕의 철봉이 여러 개로 보였다. 갈유월은 탁탑천왕의 왼쪽으로 돌았다. 왼쪽 눈이 없으니 왼쪽으로 돌면 시야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쐐액!
갈유월의 신형이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탁탑천왕의 뒤에서 왼쪽 허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촤악!
됐다. 손에 피육을 가르는 감각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갈유월은 생각도 못했다. 검이 탁탑천왕의 허리를 가르다가 중간에 끼어버린 것이다.
갈유월은 견문이 짧아 탁탑천왕이 극한으로 외공을 수련한 걸 몰랐고, 또 외공을 주로 수련한 사람과 상대해본 적도 없었다. 보통 무인들은 내가기공의 고수들이었으니까. 탁탑천왕의 약점을 잘 공략한 건 맞았지만 경지의 간극은 메우기 어려웠다.
탁탑천왕의 반격은 허리에 검이 박힌 순간 이루어졌다. 몸을 회전시키며 손등으로 갈유월의 팔을 타격한 것이다.
쾅!
손등으로 팔을 맞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도 없는 고통에 갈유월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얼마나 충격이 강했던지 갈유월의 허리가 옆으로 꺾일 정도였다.
갈유월의 몸은 끈이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 나무에 부딪쳤다. 나무들마저 갈유월의 몸을 받쳐주지 못하고 몇 개가 꺾였다.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갈유월의 등이 바위에 부딪쳤다.
“커억···”
갈유월의 몸이 튕겨져 앞으로 나가고, 그녀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숨···이 안 쉬어져.’
등에 커다란 타격이 와서인지 갈유월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쉬지 못하니 옴짝달싹 못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팔에서는 뜨거운 열감이 퍼져 전신으로 내달렸다. 팔뼈가 부러진 건 물론이고 다른 곳도 멀쩡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얼굴이 땅을 향해 박혀있는데도,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게 느껴졌다.
“으···”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인들이 허무하게 죽는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자신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온 걸지도 모르겠다.
살기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갈유월은 눈을 꼭 감았다.
쿵!
“괜찮아?”
볼 수 없는 위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볼 수는 없지만, 바로 알았다. 어찌 자신이 이 목소리를 분간하지 못하겠는가.
금목환, 그가 애뇌산에 도착한 것이다.
*
이 환각은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주산에서 장소열이 썼던 환각. 그러나 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는 않았다.
이 환각은 상단전, 즉 뇌에 작용하는 게 분명했다. 정파 무인들은 상단전이 늦게 열리니 방비할 수단이 없게 되고, 환각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상단전에 태을헌원신공의 진기를 흘려서 바깥으로 배출했다. 검은 기운이 손톱 끝으로 배어나왔다.
애뇌산에는 보이지 않는 입자들이 떠있었고, 난 그걸 응축해서 밖으로 배출해낸 것이었다.
난 애뇌산에 내 기운을 전부 퍼뜨렸다. 어떤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난 내가 아는 사람들의 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 내 기감에 약하게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이렇게 약한 기감이라면, 엄청나게 약한 하수거나 심한 부상을 당한 상태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 느낌은 익숙했다. 갈유월의 것이었다.
난 바로 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곳에 가자마자 본 건, 거한이 무지막지한 철봉을 들고 고꾸라져있는 갈유월에게 찍어 내리는 광경이었다.
바로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나무든 덩굴이든 거치적거리는 게 많은 산이었지만 검강으로 직선거리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냈다.
“괜찮아?”
난 갈유월과 철봉이 맞닿기 직전, 송로를 뻗어냈다. 철봉의 끝과 검면이 맞닿았다. 내 검은 한 치도 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