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딱 좋네요
181화 딱 좋네요
원래 반 시진 정도 걸으면 상행을 하는 상단을 두 개는 봐야 정상인데, 난 한 시진 동안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다. 황금세가가 전 상단에 경고를 날렸으니 아무도 안 나온 것일 터였다.
관도에는 무리들이 움직였던 흔적이 보였다. 말발굽과 발자국들. 조그만 규모였다. 상단의 것이라기에는 차륜 자국도 없고, 정돈도 되어있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자국들은 남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서의 치안을 꽉 잡고 있다고 해도, 사파가 없는 지역은 없는 법. 힘없기로 유명한 강서의 사파도 모이긴 모인 것 같았다.
다행히 마을로 빠진 흔적은 없고 관도에만 남아있었다. 강서의 사파들은 황금세가에 이를 갈고 있음이 분명했다.
당장 황금세가가 강서에서 통행세나 자릿세, 보호세를 받는 것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쫓았으니까.
관도가 없이 일직선으로 달려도 무방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 운남에는 마교도를 식별할 수 있는 십이당주가 가있고, 다른 지역에서 들고 일어난 사파 무리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정리하고 있을 거다.
실제로 강서는 평화로웠다. 다른 지역에서는 빈번히 보이는 불타는 마을, 피 냄새,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난 포양호의 지류를 따라갔다. 그러다 보면 남창이 나온다. 여전히 사파로 추정되는 흔적도 길게 나있기는 했다. 그래도 난 마음을 급하게 먹지는 않았다.
황금세가는 형산파에게 침략을 당한 이후 다시 침략을 당한 적이 없다. 그러니 황금세가가 얼마만큼 방어가 되어있는지는 강호에 알려진 바가 없다.
뭇 사람들이 보면 방비가 허술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이고, 또 넓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자부한다. 무력대의 공격력 수준은 평가하기 애매해도, 황금세가의 방비는 중원 최고 수준이라고.
사람들이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는 자연을 본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건 덤이었다. 옛날에는 감상만 했겠지만, 이제는 자연을 느껴보려고 했다. 동화되면 동화될수록 내 안의 태원지기가 활발해졌다.
태원지기는 내 마음 안에 있던 일말의 걱정도 날려버렸다. 태원지기가 활발해질 때는 나도 잠깐 자연을 닮았던 것 같다. 자연에게 걱정이란 없으니까. 그렇게 걷다보니 놀랍게도 하루는 걸었어야 할 회창이 여섯 시진만에 나왔다. 딱히 경공을 썼다는 느낌도 없는데, 시간이 반이 단축된 거다.
“엇! 가주님!”
“가주님이다!”
뜻밖에도 다른 마을과 달리 남창의 거리는 여전히 인산인해였다. 황금세가가 있는 곳이니 당연히 모두 나를 알아봤다.
“여기 산적들이 왔습니까?”
난 그들을 보자마자 물었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다가 크게 웃었다.
“아. 그 친구들이요?”
“하하. 그걸 산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사람들은 껄껄 웃었다. 그들은 세가에 가면 알 수 있다고 웃기만 했다.
나는 남창 중심에 있는 황금세가로 나아갔다. 뭉쳐있던 사람들이 내 발걸음에 따라 좌우로 스르륵 갈라졌다.
산적들이 온 건 맞는 것 같은데 길이 좀 더러워진 것 빼고는 혈흔이나 건물이 부서진 흔적도 없었다.
난 잠깐 멈췄다. 몇 사람들이 내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열 명의 인영이 날렵하게 내 앞에 떨어졌다. 그들은 도약을 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팽차월과 금원대 아이들이었다.
“가주님. 오셨습니까.”
열 명이 넘는 그들이었지만 목소리는 하나였다.
내가 고개를 얕게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자, 그들은 바로 방위를 지켜 나를 둘러쌌다. 남창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는 걸 보면, 남창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별 일은 없었지?”
“네.”
내 물음에 팽차월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세가로 들어갔다. 산적을 또 물어볼까 했지만, 안 그래도 됐었다. 정문 근처에 삼십 명 남짓한 도적들이 포승줄에 묶여 땅바닥에 쳐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난 담벼락과 정문 근처를 바라봤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깨끗한 것 같았다. 싸움의 흔적 따위는 전혀 없었다.
팽차월은 박혀있는 그들을 경멸하는 어투로 말했다.
“하필이면 진법이 제일 두터운 곳으로 들어오더군요. 정신을 잃을 때까지 기다려서 묶어놨습니다.”
“아. 그랬군.”
나는 그들을 일별했다. 어떤 진법에 걸렸는지는 몰라도 다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알아서 처리해.”
“네. 알겠습니다.”
난 이제 저런 것까지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도적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세가 정문을 들어왔다. 외원 무인들이 내 길을 터놓고, 좌우로 정렬하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누군가 선창하고, 그 외 사람들이 전부 후창했다. 어림잡아 백 명 정도가 서있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오백 명 분이었다.
이제야 세가로 좀 돌아온 것 같았다.
*
아직 정리되지 않은 곳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사파들의 대대적인 움직임은 모두 소탕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사전 진압한 것이었다. 그들이 뭉쳤으면 꽤 골치 아팠겠지만, 각자 지역을 나눠 각개격파 했으니 큰 피해도 없었다.
물론 그것보다 훨씬 고무적인 건, 민간의 피해가 거의 전무했다는 사실이었다.
“신단회가 오랜만에 일을 좀 했는걸.”
“예상을 하고 있던 건가. 이렇게 체계적으로 움직일 줄이야.”
사람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원래 기대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면 더 감동적인 법이다. 인식이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어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이렇게 움직여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거다.
“설마 지금까지 삽질을 한 게 사파놈들을 끌어내려고 한 건가?”
“에이, 그건 너무 갔지. 그래도 운남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조작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는군.”
“허.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구먼.”
이번 사파에 대한 완벽한 승리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인식 개선에도 의의가 있었지만, 많은 사파 세력들이 궤멸에 가까울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긴 사실이 있으면 당연히 몇몇 사람들의 무훈(武勳)도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소림사 방장인 진권도 오랜만에 나찰불(羅刹佛)이라는 별호가 괜히 얻어진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줬고, 도존을 위시로 한 오대세가의 기둥들도 건재함을 보여줬다.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진신 무력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준 셈이었다.
이 싸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명됐지만, 역시 제일 많이 주목받은 건 소제 금목환이었다.
애초에 중원에 이름을 빠르게 알리고 있었던 금목환이었다. 또한 한 번 보면 못 잊을 얼굴과 황금세가의 남색 복색을 조합하면 처음 보는 사람도 금목환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금목환이 대개 경공을 써서 빨리 달리긴 했지만, 하루 종일 경공을 쓴 것도 아니고 숨어서 다닌 게 아니기 때문에 그의 경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목격됐다.
당연히 녹림칠십이채 중 가장 흉악하다는 산왕채가 있는 복건 무이산에 간 것도 목격됐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녹림도들의 시선이 발견됐다. 무이산에 까마귀가 많이 울어대니 사람들이 발견 못할 수가 없었다.
무이산의 수많은 시체가 알려지고, 산왕채 산적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무이산으로 올라 시체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산적들이 떼를 지어 죽어있는 광경은 그것 자체로 장관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그에 따라 투왕 장덕수의 시신도 발견됐다. 장덕수의 시신은 처음에는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고 했다. 온갖 동물들과 새들이 뜯어먹은 흔적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로 불리는 십왕이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은 중원에게 충격을 갖다줬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누가 죽였나를 추리했고, 당연히 무이산에 출입한 고수는 금목환 밖에 없었으므로 금목환이 장덕수를 죽인 사실은 모두에게 알려지게 됐다.
제(帝)가 왕보다 높으므로 십왕의 위에 있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사실이 된 셈이었다. 이제 약관의 나이라고 알려진 금목환이 십왕을 이겼다는 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황금세가가 오대세가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들 했다. 지금까지는 남궁세가에 너무 커다란 사건이 터져서 비집고 올라온 느낌이라면, 십왕 이상 급의 무인이 가주라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전체적으로 비용이 줄었어. 황금세가라는 걸 밝히면 숙이고 들어오니까.”
“잘 됐군요.”
이제는 세가로 돌아오면 가족들끼리 모여 차를 마시는 건 하나의 규칙처럼 되어버렸다.
“대신 유명세를 치른다는 말이 대충 뭔지 알게 됐다.”
금화청은 밑에 있는 목제 상자를 상 위에 올렸다. 그는 바로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켜켜이 쌓인 서한들이 있었다. 난 눈을 깜빡이며 금화청을 바라봤다.
“이게 뭔가요?”
“네가 직접 봐라.”
난 몇 개를 집어서 펼쳐놓고 봤다. 처음 편지를 읽은 나는 무슨 농담 같은 건줄 알았다. 여섯 개 연속으로 나를 좋아한다는 편지였다.
아주 절절하게 본인의 사랑이 적혀져 있는데,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서한을 보낸다는 말인가. 나는 갸웃하며 다른 서한들도 바라봤다. 드디어 연서(戀書)가 아니었다.
- 소제, 금목환 대협! 중원의 악한이었던 투왕을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대협의 뛰어난 무위와 고매한 인품에 감탄했습니다···
나는 종이를 쭉 읽고 다시 상자들에 넣었다. 결국 나를 보고 싶다는 얘기들이었다. 그 중에서는 내가 들어본 유명한 무인들도 많았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사람들이 보낸 것도 있었다. 목적이 어떻게 되든, 나와 한 번 만나고 싶으면 소원이 없다는 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거 하나하나 만날 수는 없지. 그래도 정리는 해두고 있다. 가주에게 오는 연락 전담도 하나 만들었고.”
새로운 보직이 생겼다는 건 새로운 비용이 나온다는 것. 정말 유명해진 값을 치르고 있었다.
“거의 중원 전체가 널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이 서한들만 보면 그래.”
“그렇네요.”
이것도 나름의 성과라면 성과였다. 사람들이 금목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인지하고, 그것도 긍정적인 방향이라면 내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일어났다. 이번만큼은 세가에서 좀 쉴 시간도 없었다. 당장 운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원래는 아쉬움을 표해야 하던 형제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 중원 사람들 전체가 운남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운남은 어떤가요?”
“들끓기는 하지만 터지고 있지는 않아.”
“다행이군요. 사자신검의 위치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죠?”
“그런 듯해. 아니, 방향도 못 잡았다고들 해. 서로 견제하느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딱 좋네요.”
분명 마교는 정파가 가장 약해져있고 불안해할 때를 노릴 거다. 당연하지만, 그게 마교를 잡을 때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파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마교는 정파 사이를 넘나들며 우리를 기만하고 혼란케할 테니까.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