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세가 복귀
180화 세가 복귀
금화청은 커다란 지도를 땅에 받쳐 펼쳐놓고 걸어 다니고 있었다. 한 걸음에 강서에서 청해로, 청해에서 하북으로, 하북에서 운남으로 옮겨간다. 그는 단지 걷기 연습을 하는 게 아니었다.
지도 위에는 흰 바둑돌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 움직이고 있는 표행을 의미했다. 원래라면 중원 지도 전체에 바둑돌을 부어도 모자랐을 터였다. 중원 전체를 도는 표행과 상단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흰 바둑돌은 고작 한 성에 두 개, 세 개 정도에 그쳤다. 반면 검은 바둑돌은 중원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많이 놓여있었다.
중명각의 사람들은 매의 다리에 묶여있는 서한들을 풀기 바빴다. 그 서한들의 내용들은 창틀 근처 책상에 앉아있는 명재희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단순히 보고 사실만을 나열하면 삼류 정보, 보고 사실을 정리하고 가공하면 이류 정보, 가공한 정보에 통찰을 더하면 일류 정보다.
지금 황금세가의 대전에서는 삼류 정보들을 일류 정보로 바꾸는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남과 섬서는 전부 제압됐답니다.”
명재희의 말에 금화청은 하남과 섬서에 있는 검은돌을 모두 걷어냈다. 검은돌은 바로 사파 무리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흰 돌은 지금 운행하고 있는 상단을 뜻했다.
황금세가는 구파일방뿐 아니라, 모든 지역 대표 상단에 서한을 돌려 표행을 최소한으로 줄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표행이 한 성에 두 세 개밖에 다니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평소대로 다녔으면 피해가 좀 있었으리라.
붓의 손잡이로 본인의 머리를 치던 금화청이 물었다.
“상행은?”
“호위하고 있어서 조금의 피해도 없었답니다.”
“그거 감숙으로 가는 거지?”
“네. 아직 감숙에서 제압 소식은 없어서 멈춰놨습니다.”
“공동파는 뭐하고 노는 건지. 쯧.”
금화청은 혀를 찼다. 감숙에 있는 구대문파, 공동파가 사파 무리 하나 제압을 못하고 있다니. 금화청은 중얼거리면서 섬서와 하남쪽에 있던 흰 돌을 감숙과의 접경지에 옮겨 놨다.
보고는 계속됐다. 지금 대전 안뜰에 앉아있는 매만 해도 스무 마리가 넘었다. 열 명이 넘는 정보원들이 달려들고 있는데도 매는 계속 몰려들었다.
“안휘의 전욱상단은 안가로 들어갔답니다.”
“좋아.”
금화청은 안휘에 있는 흰 돌을 치웠다. 계속되는 명재희의 보고에 흰 돌과 검은 돌이 치워진다. 가끔 사파 무리가 추가 보고 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검은 돌이 추가됐다. 눈치를 보고 뒤늦게 나온 사파들이었다.
지금 황금세가는 모든 중원의 상단과 사파무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보며, 정파에게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역할은 황금세가말고는 아무도 맡을 수 없었다. 중원에 개척된 모든 상로들에 황금세가의 사람들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광동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광동에서 주동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놓쳤다고 합니다.”
“광동, 광서 지방은 해남파가 맡고 있을 텐데, 놓칠 정도면 주동자가 좀 재빠른가보군. 인상착의는 따줬나?”
“네. 귀주, 호남, 강서에서 삼 방향으로 오면서 수색하게 할 예정입니다.”
“좋아. 내가 볼 땐 안 잡힐 것 같지만.”
명재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해남파의 초고수들 앞에서 달아났다는데, 평범한 무인들로 태반이 구성된 탐색대가 찾을 수 있을 리가. 그저 압박을 해두는 것뿐이었다.
“진무상단은 호북으로 가지 말고 안휘 쪽으로 돌아서 가라고 해.”
“네.”
“절강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단들은 모두 출발시키고.”
“네.”
“화산파는 녕하로, 종남파는 감숙으로, 소림사는 산서로. 전력의 반씩만.”
바둑돌이 어지럽게 움직인다.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지금 중원은 황금세가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고 있었다.
*
“하남은 전부 정리됐다고 합니다.”
“그럼 산서···”
“네, 산서로 전력의 반만 지원해달랍니다.”
“···크음.”
진권이 입을 닫았다. 황금세가는 금목환만 용이 아니었다. 지금 중원에서 보고받고, 정리하는 금화청도 보통 인재가 아니었다. 전 중원에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현장에 있는 것처럼 통제하고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지휘통제였다.
“황금세가가 핏줄이 좋은가?”
“핏줄이요?”
“생각해보게나. 막내인 금목환은 말할 것도 없지, 첫째인 금월상도 오룡삼봉 중 하나지, 둘째인 금화청도 일 한 번 기깔 나게 하지.”
“그리고 셋째는 강서삼미 중 하나라죠. 심지어 진법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합니다.”
원래 호부 밑에 견자가 없는 법. 대개 명문가 사람들은 명문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황금세가는 십 년 전까지 위축되어 있었던 세가라고 볼 수 없었다.
황금세가에서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소림사도 다른 세력들에 의해 정보를 받고 있다. 모순적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믿을 수 없었다.
“소제는 집에서 작두를 타는가보지. 어떻게 이런 상황을 예측했을까. 중원에 전례가 없던 상황인데 말이야.”
“저도 몇 군데 소요에서 그칠 줄 알았는데, 정말 연환계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근데 희한하게 복건이 조용하군. 산왕채가 있는 곳이라 제일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당장 복건 근처의 산채들이 모두 산왕채로 옮겨가는 게 포착됐다고 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금목환이 산왕채에 갔다는 건 모르는 진권은 그냥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산왕채가 안 나온 게 다행이지, 안 나왔다고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사파중에서도 진짜 고수들은 몇 나오지 않았다. 녹림채의 투왕이나, 수로채주, 낭왕 등. 요주의 인물들이 관측됐다는 보고는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중원은 소요의 크기에 비해서 빨리 정리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뭐가 말씀이십니까?”
“소제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걸 막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을지. 당장 일어나기 전에 눌러서 다행이지, 산적들이 중원에 다 퍼지고 났으면 다 소탕하는데 최소 일 년은 걸리지 않았을까.”
“그렇겠죠.”
소탕 시간이 적게 걸렸다는 건, 전력을 많이 쓰지 않았다는 의미도 크지만 결국 중원의 사람들을 지켰다는 게 제일 컸다. 아무리 무인들이지만 검으로만 살지는 않는다.
살아야 할 집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가 있어야 하고, 인부가 있어야 하고, 칼을 만들 대장장이가 있어야 하고, 물건을 팔 상인이 있어야 한다. 중원에 쓸모없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런 인력들을 지킨 것도 큰 의의가 있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문파들의 인식을 그나마 끌어올린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였다. 만약 무인과 무인들을 제외한 중원이 갈등을 겪었다면, 그 갈등 때문에 중원은 또 혼란에 빠졌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중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있던가.”
“역사를 통틀어 봐도 많지 않았죠.”
진권의 말에 공휴가 대답했다. 금목환의 무위를 떼어서 보더라도, 현재 금목환은 중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건 지금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
내 검을 시체에 맞대어본다. 나도 이제 웬만한 정파 무공에 대한 견식이 다 있다.
어떤 것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이고, 어떤 게 낙일검법이고, 어떤 게 육합검이고, 어떤 게 태극혜검인지 안다. 용봉지회에서 명문 문파들의 무공을 질리도록 봤다.
“공동의 복마검법(伏魔劍法),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 점창의 사일검법(射日劍法), 해남의 남해십이검도 있고, 창궁검법도 있고···”
나는 시체를 둘러보면서 하나씩 상흔을 확인했다. 이렇게나 많은 무공을 쓸 필요가 있던가. 하나 확실한 건, 적어도 낭왕보다 두 수 위에 있는 고수라는 것이다.
이렇게 무공을 바꿔가면서도 이겼다는 게 그 증거다. 허나 반대로 이렇게 번거롭게 무공을 바꿔가며 이겨야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살짝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마교의 짓일 텐데.”
이 일을 기획한 게 마교이니, 낭왕을 살해한 것도 마교일 거다.
문제는 마교가 웬만한 명문정파의 무공들을 다 갖고 있다는 것.
그게 어떤 경로로 유출이 됐는지는 모르나, 당장 중요한 건 그들이 파훼법을 연구하고 있을 거라는 것.
나는 다시 낭왕의 시체를 바닥에 묻었다. 땅을 좀 파보니 옆에 검도 같이 묻혀있었다. 난 낭왕이라고 거의 확신하지만, 그래도 정확히 신원을 확인하려면 가져가야 할 성 싶어서 챙겼다.
“채주님!”
“어디 계십니까!”
봉우리 너머에서 산적들이 오는 소리가 났다. 산적들은 걷는 데 거침이 없었다. 아마 장덕수가 날 이겼으리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고수와 하수는 다른 세계에 산다. 장덕수는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자신보다 고수인 걸 알았지만, 저들은 그걸 볼 눈이 없었다. 같은 장면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니 다른 세상에 사는 것이다.
난 그들을 마중 나가줬다. 난 저 멀리서부터 그들이 오는 걸 보고 있었다. 대 여섯명 정도였다. 그들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날 눈치 챘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놈! 채주님은 어디 계시냐!”
난 그들의 면면을 바라봤다.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장덕수와 싸웠는데도 멀쩡하게 혼자 나왔고, 또 그들 앞에서 싸우기도 했으니. 그들은 이미 격차를 알고 있었다.
“죽었어.”
“거짓말 하지마라! 채주님은 십왕이신데, 어찌 너 같은 꼬맹이한테 질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럼 찾아봐. 저기 언덕 두 개를 넘으면 보일 거야.”
동물들에게 처참하게 뜯긴 장덕수의 시체가 보이겠지. 난 그걸 굳이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 당당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제야 생각하는 듯했다.
그제야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장덕수가 죽든, 안 죽든 그들이 내 상대가 안 됨은 명백했다.
난 어차피 산왕채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었다. 거물을 잡긴 했지만, 산채를 아예 부숴놔야 했다. 삭초제근하지 않으면 또 다시 산적이 들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사실 여기 오나, 안 오나 별로 상관은 없었다. 안 왔으면 어차피 내가 찾아갔을 테니까. 지금 산채에서 돌아오지 않을 장덕수를 기다리지 않는 산적들이나, 여기 직접 마중 나온 산적들이나 운명은 같았다.
여섯 명이 동시에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난 바로 여섯 개의 지풍을 날렸다. 그것들은 모두 산적들의 마혈에 꽂혔다.
“으억!”
도망가던 녹림도들은 몸이 통나무처럼 완전히 굳어버렸다. 엎어진 산적들은 마혈이 깊게 눌려 움찔거리지도 못했다. 난 엎어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누군가가 내게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목이 잘렸기 때문이다.
“흡!”
옆의 사람들의 숨이 흐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이제 알았을 거다. 본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장난이 아니었다.
“으으, 으으으···”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 중에서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도 벙긋거리기만 했다.
“으아아악!”
염치없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값싼 고통일 터였다.
난 그들의 목을 베고 산왕채로 넘어갔다. 산왕채가 토벌되는 데는 반 시진이면 충분했다. 지금부터 무이산에 산적은 없었다.
난 송로에 묻은 피를 털고 무이산을 내려갔다. 무이산 자락에는 강서의 회창(會昌)이 있었다. 강서까지 왔겠다. 오랜만에 세가에 한 번 들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