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기회는 없다
178화 기회는 없다
어떻게 보면, 사파는 정파보다 휘두르기 좋다. 정파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의협과 정의를 지향하지만, 사파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파에게 이념이랄 건 없었다. 몇몇 사파는 억압에 맞선 자유주의라고도 표현했다. 그러나 그들은 절도, 살해, 납치, 강취를 생계수단으로 택하면서 사실상 방종이라고 스스로 자인한 셈이다.
정파는 이간질이 필요하지만, 사파는 반대로 묶어야 했다. 묶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이름난 고수들의 수결을 그럴듯하게 조작하여 연판장을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
녹림채의 투왕까지 속아 넘어갔으니 정말 말을 다 한 것이다. 아쉽게도 또 다른 거물인 수로채주는 거절했다. 그냥 거절도 아니고 죽기 싫으면 꺼지라는 모욕까지 들었다.
허나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본인은 조상 대대로 물려온 업보를 해소하기 위해 이 땅에 난 것이니. 마신님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면 전부 참을 수 있었다.
“그래서 슬슬 사파 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난다고?”
“대한(大寒)으로 넘어가는 날 기점 새벽에 시작입니다.”
“사파 애들이 그렇게 바보인가?”
“지성이 없는 놈들은 맞습니다. 물론 눈치를 봐서 출전을 늦추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절반의 절반만 들고 일어나도 중원은 충분히 혼란스러울 겁니다.”
“그렇게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정파들을 해치우고 한 곳에 모여 연맹을 만든다?”
“그런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천유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검정 피풍의의 남자, 정희수에게 침이 튀었지만 그는 닦으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진짜 그게 가능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파놈들은 그런 멍청이들 하나 소탕하지 못했다는 거지?”
“사파가 필요한 문파들도 있었으니까요. 필요악처럼 살아남은 거죠.”
“아주 안 썩은 곳이 없어. 그래서 중원에만 오면 구린내가 난다니까.”
천유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그러니까 도적떼질을 하는 거겠지. 반지성적인 것도 정도가 있는데, 사파 애들은 도를 넘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칼잡이.”
“네.”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었는데, 할 게 있잖아?”
정희수는 천유현의 말에 잠깐 갸웃했지만, 곧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중원을 혼란스럽게 하는 게 목표기는 하지만, 특별한 지시도 있지 않았는가.
“황금세가 가주 말입니까? 요즘 워낙 신출귀몰해서 어디 있는지···”
“남창으로 가면 알아서 오지 않을까?”
“···아, 네.”
“운남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성동격서. 중원을 혼란스럽게 하고, 중원 구석에 있는 운남을 신경 쓰지 못하게 한다. 어차피 정파의 쓸 만한 전력들은 대개 운남에 있다. 운남만 몰살시켜도 마교에게는 엄청난 성과였다.
천유현은 사파 연맹이라는 멍청이들이 중원에서 시선을 끌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다시 자기애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크으. 난 너무 완벽하다니까.”
천유현은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천유현의 손바닥에 붙어있던 사람은 이미 목내이(木乃伊)처럼 변해 있었다. 옷차림새로 봤을 때 무인도 아닌, 그냥 일반인이었다. 그는 약초꾼이었는데, 운이 나쁘게도 천유현에게 걸린 것이었다.
절망을 먹고 사는 천추마령신공에게는 매일 먹이를 줘야 했다. 그 탐욕스러운 무공을 길들이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건 본인이 될 수도 있었다.
천유현은 시체가 된 약초꾼을 발로 찼다. 사람을 차는 소리가 아닌 썩은 나무를 차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시체는 날아갔다. 날아간 곳에는 이미 많은 시체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쌓여있었다.
*
“···정말 말 그대로 됐군.”
“보면 볼수록 놀라운 사람입니다. 제가 볼 때는 소제는 무위보다 심계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하남의 정주. 진권은 구파일방과 황금세가를 포함한 오대세가와 긴밀히 연락을 공조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장 사람들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분노할 때, 진권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했다. 물론 이런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럴 때는 뒤에서 사람을 풀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대한 미담을 풀고, 앞으로는 감춰놓았던 사건을 터뜨려 시선을 돌리는 식이었다.
그러나 왠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진권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금목환의 영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바로 황금세가에서 비밀 서한이 날아왔다.
- 곧 사파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준동할 테니, 전력을 대기시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가주령입니다. 황금세가 중명각 각주 명재희.
그야말로 간결한 서한이었다. 어째서 사파 세력이 준동하는지, 전력을 얼마나 대기시켜야 하는지 설명도 없다. 그러나 그 간단함과 당당함 속에 그 설명이 모두 들어있었다.
그리하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욕을 먹어도 잠깐 잠잠히 있었다. 이렇게 욕을 먹을 때 아무 행동도 안 한건 그들로서는 처음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되나, 싶을 때즈음 중원의 상황은 금목환이 말한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은거한 줄 알았던 사파 고수들이 뭉텅이로 나오고, 잡으려고 하면 쥐구멍으로 숨어들어가던 사파 무리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눈에 띈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사파놈들은 여기서 왜 나대는 건지.”
“중원이 혼란스러우니까 한 몫 차지하려는 거 아닐까요.”
“너무 우리가 얕보였군.”
진권이 지도를 노려봤다. 지도에는 홍역에 걸린 사람의 피부마냥 붉은 점이 군데군데 찍혀있었다. 움직이는 사파 세력들의 위치였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사파였다. 그냥 정파에게는 감기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런 사파가 모이려고 하는 건, 선을 과하게 넘은 것이다.
분명 당혹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사파가 미치지 않은 이상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버벅거리고 전력 차출도 꼬이며 혼란스러워졌을 거다.
그러나 금목환은 대수롭지 않게 거대한 계획을 짰다. 정파의 숙원이었던 사파 정리를 바로 실천으로 옮긴 거다. 그것도 즉흥적으로.
“지금 가주는 어디에 있나?”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광서입니다.”
“그저께는 섬서 아니었나?”
섬서에서 광서까지 이틀이라. 중원을 거의 안방처럼 쓰고 있는 금목환이었다.
진권은 지도를 보면서 읊조렸다. 모든 힘을 정보력에 쓰다보니 사파들의 움직임은 훤했다. 당장 그들은 하나의 조직이 아니었기에 전략 같은 것도 없었고, 그냥 돌격이었다. 그러니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매화검존도 못한 사파 완전 소탕. 일망타진이 눈에 아른 거리는 순간이었다. 운남도 운남이었지만, 사파를 쓸어버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쯤이면 무르익었군. 연락들 보내.”
진권이 일어섰다.
“이대제자까지 전부 하산한다.”
오늘은 정마대전 이후, 가장 많은 제자들이 하산하는 날이었다.
*
장덕수는 그 거구인데도 빨랐다. 역시 고수였다. 내가 볼 때는 팔 당주, 암왕 조현극보다 더 경지가 높은 고수였다.
그러나 장덕수는 내가 본 가장 무인 같지 않은 무인이기도 했다. 맞부딪쳐보기도 전에 저렇게 꽁무니 빼며 도망을 치니 말이다. 사파라는 존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개자식아!”
“사파를 청소하는 것뿐이다.”
“내가 네놈에게 피해준 거라도 있는 거냐?”
애초에 그들의 인식은 그랬다. 내가 아닌 사람은 전부 타인이었다. 그런 개인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니 타인 두 명이 어떤 관계든 별개로 본다. 물론 나는 장덕수가 숱하게 죽인 사람들과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파의 의협에 어긋나고, 또 의협을 지키려는 이들조차 변질케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장덕수를 쫓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말하면 못 알아들 게 뻔해서 말하지 않았다.
달려가는 내 앞으로 바위나 부러진 나무들이 날아왔다. 장덕수가 뜯어서 뒤로 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거구에서 나오는 힘은 그야말로 초인적이었다. 단순히 힘만을 겨루고 보면 나는 상대도 안 될 것이었다.
서걱. 서걱.
난 바위든, 나무든 반으로 가르면서 나아갔다. 그것들을 피해서 조금이라도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숲의 뒤에서 흙먼지들이 이는 게 느껴진다. 커다란 바위와 나무들이 던져지니 당연한 것이었다. 동물들이 터전을 옮기는 소리, 새가 날개를 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격차는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폭발적인 근육을 가지고 있는 장덕수의 신속함도 극성에 이른 방축귀매신법을 떨쳐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추격전은 고작해야 반 각이었지만 무이산의 봉우리를 찍고 반대편으로 내려올 정도였다. 여기는 아예 사람이 안 오는 곳인 듯했다. 무이산의 동벽은 웬만한 산을 다 타봤을 약초꾼도 기겁할 정도로 경사가 컸다. 거의 일직선에 가까울 정도이니, 웬만한 무인도 올라가기 쉽지 않을 터였다.
장덕수가 슬슬 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을까, 싶을 때 내 태원지기가 움찔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라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뻔했다.
‘마기가 여기 왜 있지?’
지금 마인이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마기의 흔적이 느껴졌다.
산왕채만 있는 이 무이산에서 마기가 느껴진다라.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는 두 발을 모아 무릎을 최대한 굽힌 다음,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거슬리는건 검강으로 모두 베어냈다.
“으어엇!”
뒤에서 검강과 함께 내가 날아오니 장덕수가 옆으로 꼴사납게 굴렀다. 난 구르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도망치다가 피하니까 조금 추해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너, 넌 대체 뭐냐? 어떻게 그 나이에 오기조원에···”
“그건 알 거 없고, 뭐 하나 질문 좀 할게.”
난 그의 말을 끊고 장덕수를 봤다. 장덕수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는데 반면, 내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혹시 최근 마인과 접촉한 적이 있나?”
“···마인? 뭔 개소리냐!”
“아니면 최근에 만난 뜻밖의 사람은?”
“그걸 내가 알려줄 것 같느냐! 이 버러지 같은 놈!”
장덕수는 주먹으로 땅을 쳤다. 땅이 갈라지며 파편들이 내 쪽으로 날아왔다. 파편들 하나하나엔 강기가 담겨있었다.
나는 대라회연으로 그것들을 전부 날려보냈다. 파편들에 담긴 힘은 건드리지 않고, 방향만 바꿔 여러 군데로 돌려보낸 것이다.
쿠쿠쿵!
순식간에 정갈하던 숲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흙먼지 사이로 거한이 날아왔다. 나도 잠깐 신형을 놓쳤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장덕수는 내 머리통만한 주먹을 뻗었다. 그건 전혀 빨라 보이지 않았고, 어떠한 변화를 담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게 맞닿기 직전에 주먹의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앞에서 터진 폭발물과도 같은 권법이었다.
난 흘리고 반격하려던 걸 멈추고 그걸 막아냈다.
쾅!
사람의 주먹과 검이 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이 찡하게 울렸다.
장덕수는 날 몰아붙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주먹을 뻗어냈다. 내가 그보다 키가 작으니 대각선으로 내려치는 모양새였는데, 그것이 가히 폭풍우를 연상케 했다.
나는 검을 일직선으로 세워 가장 강하게 들어오는 주먹의 방향으로 갖다댔다. 쿵, 힘이 내 몸에 전해지고, 난 그 힘을 이용해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빌어먹을, 쥐새끼 같이도 움직이는구나.”
장덕수는 헉헉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그는 분명히 고수였다. 그러한 고수가 처음부터 모든 힘을 이끌어내 공격하니 나도 수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반대로 말하자면, 이제 장덕수의 공격은 처음보다 무뎌질 일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장덕수도 그걸 알고 있는지 눈빛 속에는 분노 대신 낭패감이 아른거렸다.
“달리 묻지. 최근에 만난 사람이 지금 사파들의 이상 행동과 연관이 있나?”
장덕수가 누굴 만났는지 정도는 눈치로 파악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와중에 표정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장덕수가 이빨을 뿌득 소리를 내며 갈았다.
“그걸 내가 말해줘야 할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아, 그렇지.”
상인의 기본인 거래를 무시했다. 그의 이력이 너무 인간 같지 않아 인간 이하로 상대하고 있던 거다. 난 내 실수를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해주면 편하게 죽여주지.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야.”
“큭큭, 아주 미쳤구나. 네가 강한 건 알겠지만, 내가 동귀어진으로 선천지기를 터뜨리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다.”
장덕수의 내공이 기해로 모이는 게 느껴진다. 그는 진짜 선천지기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시 종이를 펼쳤다. 장덕수는 꽤 악독한 자라 상세하게도 설명이 되어있었다. 이런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한 명재희한테 미안할 정도였다.
“옛날에 두 팔을 잘린 사람은 평소처럼 잘 뛸 수 있을까, 같은 걸 실험해봤다지?”
“뭐?”
장덕수는 자신 외의 사람을 사람처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생명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게 가능했던 거다. 이 자는 굳이 사파의 이상 행동을 제외하고서라도 죽여야 할 자였던 거다.
장덕수는 내 눈빛에서 무언가 직감적으로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선천지기를 터뜨렸다. 거대한 내공이 원형의 파장을 일으키며 나무들을 바깥쪽으로 꺾었다.
“어?”
바로 달려들려던 장덕수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왜냐하면, 그의 두 팔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천조종검의 다섯 번째 초식, 만부곡(灣不曲)이었다. 두 갈래로 나뉜 발검은 정확히 장덕수의 두 팔과 어깨를 분리시켰다.
“어으···아아아악!”
장덕수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무이산을 울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기회는 없다. 그는 편하게 죽지 못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