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혼자 해보겠습니다
174화 혼자 해보겠습니다
심양의 거리는 싸늘하다시피 조용했다.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쥐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대륙은 워낙 사람이 많아, 한밤 중에도 달을 벗삼아 술을 마시며 노는 사람도 있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사람도 있고, 바깥에 드러누워 자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가지 각색의 사람이 많다. 분명 요녕도 그랬을 것이다. 천주성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완전한 통제로군.”
진권이 혀를 내둘렀다. 정파를 맨 위에서 다뤄봤던 그에게 이렇게 일사불란한 모습은 이상과도 같을 것이었다. 나도 한 세가의 가주로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힘으로 누르는 통제가 아니라, 신뢰로 다스리는 통제군요. 힘으로 누르면 튀어나오는 사람이 분명 있었을 텐데요.”
“그러게 말일세.”
내 말에 진권도 공감했다. 이건 정확히 말하면 통제가 아니다. 천주성은 성주를 중심으로 규칙을 만들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었다. 정파를 당황스럽게 했던 이들의 강함은 이런 것에서부터 출발한 듯 싶었다.
우리가 얘기를 하는 도중에, 천주성의 문이 열렸다. 문 안에서부터 면사를 쓴 여인, 천주성주와 열두 명의 당주가 같이 나오고 있었다.
“준비는 다들 됐나.”
“네.”
난 당주들을 바라봤다. 명백히 중원에서 넘어온 천주성 사람과, 뿌리부터 천주성 사람이 나뉘었다. 남궁연화, 조현극 등 중원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 중원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송천우를 비롯한 천주성 사람들은 흰 옷들을 입고 있었다.
물론 내 전생에서는 흰 옷이 천주성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천주성이 그렇게 정파에 많이 알려진 것도 아니고, 흰 복색이 그렇게까지 특이한 건 아니라 주목받을 일은 크게 없을 터였다.
그렇게 우리는 천주성주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했다. 천주성 사람들은 닭이 울고, 아침해가 뜨는 진시 초에 정확히 집 밖으로 나왔다.
확실히 요녕은 천주성의 텃밭이 되었다. 모용세가에서 뺏은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빨리 천주성화가 됐는지 모르겠다.
“여! 당주님들, 어디 가십니까!”
“중원 갑니다.”
“중원은 왜?”
“갈 일이 있으니까 가지!”
송천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주들의 행선지를 묻던 사람들은 껄껄거렸다. 애초에 이들의 관계란 이런 것이었다. 당주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되는 무언가가 없었다.
“남궁 선배님. 천주성은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대하기에 이런 조직력이 가능한 겁니까?”
그걸 지켜보던 진권이 못내 궁금하다는 듯 남궁연화에게 물었다. 남궁연화는 뭐라 말하기 애매한 듯 침음을 냈다. 대답한 건 남궁연화가 아니라 송천우였다.
“우리는 모든 걸 투명하게 공개하지. 어떤 절차를 통해 돈을 썼고, 천주성이 이렇게 움직이는 건 이런 의미라고들 밝혀. 세부적으로 궁금한 사람들은 당주에게 물어보거나 본성으로 찾아올 수도 있지. 본성과 당주들은 그 대답에 성실히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지.”
“그 의무를 저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요?”
“천주성의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천주성 사람이 아닌 거지.”
송천우는 그 말을 하며 어깨를 폈다. 그 체계에 대하여 꽤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더해 우리가 묻지 않은 것도 말해줬다.
“우리 규칙의 근간, 움직이는 방향성은 모두 의협을 근거로 하지. 의가 아니면 따르지 않고, 협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아.”
“그러면 천주성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협객이로군요.”
“그래. 위가 모범을 보이니 아래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진정한 정파라고 생각하네.”
송천우의 말에 다른 정파 사람들이 움찔했다. 마치 그의 말이 정파 사람들을 탓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송천우는 실제로 그런 의미를 담고 말했을 거다.
내가 대화에 끼어든 건 그때부터였다.
“그럼 협객이 우두머리가 돼야 하고, 그 협객이 본보기를 보여주면 다른 사람들도 협객이 된다는 거군요.”
“머리가 똑똑하군. 그래.”
“협은 손해 보는 행동입니다. 손해 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협객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가져가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런 세상은 정의롭습니까?”
내 말에 이번에는 천주성 사람들이 움찔했다. 천주성의 가치가 올바르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들의 방법은 틀렸다.
“또한 길게 봤을 때, 다스리는 사람 중 협객이 안 나올 수도 있죠. 그러면 부패하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지금 사람들이 말썽을 안 일으킨다고 해도, 불완전한 균형일 뿐입니다.”
“그거야 자네 생각 아닌가?”
내 말에 송천우는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송천우와 나의 개인적인 일과는 상관없었다. 내 말에 남궁연화를 포함한 천주성 사람들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으니까.
“제가 생각했으니 당연히 제 생각이죠.”
“그래, 그렇군. 어차피 우리에게 대화는 필요하지 않지. 자네는 정파 사람이고 나는 천주성 사람이 아닌가.”
송천우는 말을 잘라 끊었다. 우리의 말은 그 이후 끊겼다. 딱히 대화를 끊으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다. 정말 난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 없이 서로 긴장된 상태로 있는 것도 나쁘기만한 건 아니었다.
우리는 조용히 요녕을 빠져나왔다. 요녕을 빠져나가면 바로 하북이었다. 우리의 경로는 하북, 하남, 섬서, 사천을 통해 운남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북하면 뭔가. 역시 하북팽가였다. 개도 자기 앞마당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그 앞마당이 하북팽가만큼 크면 말할 것도 없을 거다.
“이제부터는 딱히 경계할 필요도 없네. 하북팽가가 관리하는 지역이니까.”
“살려주시오! 아무나 제발!”
팽의석이 말함과 동시에 어떤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서로 상반된 소리를 들은 우리는 잠깐 인지부조화가 왔지만, 잠깐 눈을 깜빡거린 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날렸다.
소리가 들린 쪽은 우리가 걷던 언덕 아래 관도였다. 나는 미끄러지며 비탈에 선 나무들을 번갈아 잡았다. 관도에 가까이 가자 상단의 깃발과 누런 민소매를 입은 장한들 열댓명이 보였다.
상단 수레 근처에는 표사로 보이는 사람들 네댓 명이 죽어있었다. 남은 건 말 위에 타있는 상단 사람으로 보이는 여자뿐이었다. 규모로 봤을 때 정말 작은 상행이었다.
나는 소매 안쪽에 붙어있던 비침들을 뿌렸다. 천혜침법을 배우면서 침통 하나 정도의 분량은 계속 소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사람을 해하려고 구비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니. 누구를 해하면서 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구하는 거 아닐까.
“컥!”
“억!”
비침들이 비산하며 산적들의 몸을 꿰뚫었다.
쿠구궁.
마치 벽이 연달아 무너지듯 장한들이 주르륵 쓰러졌다. 장한들은 땅바닥에 있는데도 몸을 꿈틀거렸다. 내가 사혈이 아닌 마혈을 꿰뚫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자는 멍하니 쓰러진 산적들을 보더니 바로 내게 허리를 연신 굽혔다.
“···아, 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고초를 겪으셨군요.”
난 깃발을 바라봤다. 청풍(淸風)이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었다. 청풍 상단이라. 정말 기억 끝에 있는 상단이었다. 하북에 있는 규모 작은 상단. 아무 특이점도 없다. 규모가 적어서 하북만 나다니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근데 규모 작은 상단이라면 성 하나를 제대로 맡기도 힘들 터다.
“뭐야, 벌써 끝났나?”
곧 뒤에서 사람들이 따라왔다. 상단의 남자는 팽의석을 보자마자 눈이 동그래져 부복했다.
“아이고, 태상가주님 일행이셨군요.”
“청풍상단의 남 총관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당연하지만, 청풍상단의 사람과 팽의석은 아는 사이였다. 하북에서 상단을 운영하는데 하북팽가와 모를 수 없으니 말이다.
“다행히 사천당문의 공자님이 나타나서 목숨을 구함받았습니다. 태상가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사천당문?”
팽의석이 물었다. 여기 사천당문은 없었다. 남 총관이라는 사람이 내 눈치를 봤다.
“아, 아닙니까? 암기를 굉장히 잘 날려서 꼼짝없이 당문의 공자님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네. 이 친구는 황금세가 가주라네.”
“···요, 요즘 중원에 명성이 자자한 소제시군요.”
그는 내게 허리를 다시 깊숙하게 숙였다. 나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지만 그의 머리는 종아리까지 닿을 지경으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내가 황금세가 가주라는 걸 들으니까 더 인사의 각도가 커진 것 같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도적들이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요즘 도적을 안 마주치는 상행이 드뭅니다. 일류의 표사들을 고용했는데도 산적들 중 절정이 있어서···”
“허어. 안 마주치는 상행이 드물다고?”
팽의석은 이해할 수 없는 말투였다. 여기는 하북팽가가 있는 북경과 가장 가까운 곳인 열하(熱河)였다. 이런 곳에서 도적이 나타난다는 건 하북팽가의 책임이었다.
“요즘 애들이 순찰을 잘 안 도나?”
“아뇨. 그건 아닌데, 하북팽가보다는 승녕문(承寧門) 사람들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승녕문이?”
난 처음 듣는 문파였지만, 팽의석은 아는 눈치였다. 대충 열하에 있는 문파인 모양이었다.
“네. 이번에 무슨 운남에 대단한 보물이 발견됐다고, 그쪽으로 전력을 거의 빼버린 바람에···”
“···음.”
팽의석을 포함한 정파 사람들이 침음을 흘렸다. 사실 우리도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정파의 전력이 운남에 쏠린다면, 그 사이를 사파 세력들이 노리는 건 당연한 이치. 그러나 진권과 팽의석, 종리운은 믿었다. 당연히 주변 치안은 확보하고 전력을 보내는 걸로 말이다.
“중원이 아주 개판이군.”
송천우가 말했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지만 정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각 지역에도 여러 문파가 있다. 각자 일정 인력을 차출하여 치안을 맡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세력권에 있으면 대개 경쟁하는 문파이기 마련이며, 그래서 각자 사람을 적게 보내려고 수를 쓸 게 뻔하기 때문이다. 문파의 규모들이 각기 다르다는 것도 협력을 저해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각 문파의 이기심이 중원 치안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이럴 거면 천주성에게 중원을···”
“오히려 좋군요.”
내가 말했다. 송천우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다른 사람들도 뭔 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사파 사람들에게는 기회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숨어있던 사파 녀석들이 득세를 하는 거구요.”
“···그게 좋다는 건가? 중원이 혼란스러워지지 않나.”
“명현(瞑眩)반응이라고 생각하시죠. 낫기 직전이 아픈 법 아니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난 사실 정파 사람들이 사자신검에 눈이 팔려 중원 전력이 약해질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신단회가 바뀌었다는 걸 중원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기도 합니다.”
“기회?”
“사자신검에 눈이 팔리지 않고 본 일을 하는 거죠. 치안 공백을 메워주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저희도 가는 도중 정리해줄 곳은 정리해주고요.”
“아!”
진권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전력을 다해 치안을 지키려고 하면 사파들도 없애고, 인식도 개선시킬 수 있었다. 이들도 그렇게 움직여본 적이 없으니까 생각이 안 가닿는 것이다. 언제나 위기는 기회였다.
“···그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사자신검을 위한 인원을 차출하면 안 되겠군.”
진권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반발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 무조건 있겠지만 최대한 막아봐야지.”
“팽가도 그 의견에 힘을 싣겠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절학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사자신검까지 가져가는 건 욕심이지.”
팽의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볼 때는 저게 진정한 자긍심이었다. 자긍심 없는 자들은 사자신검을 취한 문파가 자신네보다 명성이 높아지는 걸 걱정할 테니.
그러나 그건 정치적인 건 진권과 팽의석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그때 진권이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그러면 사자신검을 어떻게 천주성에 갖다준다는 얘기인가? 그곳에 온갖 중견, 중소문파들이 모여있을 텐데. 우리들이 가도 통제가 될까말까 할 텐데.”
결국 문제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인식이 낮은 것이다. 중원의 치안이 안 좋을 때 사자신검을 위해 인력들을 차출하면 분명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운남을 통제할 사람이 없다면 피가 흐를건 자명한 일. 인원 차출이 필요하긴 하다는 것이다.
통제를 할 수 있으면서도, 인원 차출 할 때 안 좋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는 곳에서 차출해야된다는 것.
그 답은 간단했다. 오대세가이면서도, 최근에 오대세가가 되어 기존 세력으로 인식되지 않은 황금세가였다.
“제가 혼자 해보겠습니다.”
내 말에 진권이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별의 별 사람들, 사파놈들이나 숨어지냈던 기인이사도 많이 올 거야. 그걸 다 통제할 수 있다고?”
“네.”
“···자신감은 대단하군.”
할 수 없으면 얘기도 안 꺼냈다. 그들은 결국 나 혼자 신단회를 대표해 가는 것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의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할 일을 나눴다. 내가 가는 동안 무림맹도, 하북팽가도, 소림사도 각자 할 일이 있었다. 그들은 내 설명을 듣고 모두 납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각자 흩어졌다. 그 중에서 소림사의 할 일은 먼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사자신검 경쟁에 참여하지 말라고 설득시키고, 그걸 전 중원에 알리는 방을 붙여야 했다.
그러나 그 방이 채 붙여지기도 전에, 화산파가 사자신검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먼저 돌았다. 피해자는 운남으로 협객으로 유명했던 염수객 곽철광. 그 소문은 곧 사실로 밝혀졌다. 사체에서 명백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흔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대세가, 구파일방의 인식이 밑바닥에 쳐박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