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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172화 (173/225)

172화 당신은 나에게

172화 당신은 나에게

세가에서 수련을 하던 한유림은 뜬금없는 서한을 받았다. 발신자는 중명각의 각주, 명재희였다. 대주 입장에서 각주란 상관 같은 존재. 심지어 중명각주는 지금 가주님과 함께 천주성에 간 사람이 아닌가.

- 가주령. 금원대주 한유림은 조속히 요녕 심양 천주성으로 오도록.

간단한 내용이었다. 가주님이 어째서 부르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호위가 필요한 건 아닐 거다. 호위로서 부끄럽운 말이지만, 가주님은 본인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니까.

물론 어째서 불렀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가주님이 불필요한 일 때문에 부를 리는 없었다.

“막 요녕 갔는데,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는 거 아니야?”

“꺄악!”

사실상 한유림과 금원대 사람들은 가족이었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몇 년을 동고동락한 사이니 친밀해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친밀하다는 건 좋은 것이었다. 굳이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되고, 애초에 말을 하기 전에 이심전심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단점은, 단적으로 지금 상황이었다. 한유림은 조용히 쭈그려 있는 소녀들 뒤에 슬며시 다가갔다.

워낙 은밀하게 간 탓일까. 금원대 대원들은 한유림이 뒤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뭐하러 부르겠어? 딱, 겨울바다 보면서 팔베개하고···”

“햐아아아. 가주님이 그러면 나라도 녹을 거 같은데.”

“어허. 대주에 대한 의리가 있지.”

“하긴, 가주님은 우리 대주 거긴 해.”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금원대원 둘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쉬는시간에 이렇게 금원대 사람들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분명 주변도 왁자지껄 했었는데 다 어디로 간 건지.

그때, 뒤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금원대에 있는 여자들은 대개 구음절맥이었기 때문에 자그마한 냉기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예민했다.

금원대원 두 명이 고개를 홱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무표정으로 서있는 한유림이 있었다.

그녀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한유림의 검이 번쩍 출수됐다.

쿠쿵!

사람의 머리를 때렸다기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엎어졌다. 한유림은 검을 납검하고 몽둥이로 쓴 검병을 손으로 털어냈다.

“에휴.”

한 번만 더 가주님이랑 엮으면 후두려 팬다고 해도 이런 녀석들은 계속 나왔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엮는 게 너무 심해져서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한 번만 더 그러면 칼자루 말고 반대로 찍을 줄 알아.”

“죄송, 햡니다···”

혀가 풀린 금원대원 둘을 두고 한유림은 황금세가를 빠져나왔다. 세가를 빠져나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와, 설봉(雪鳳)이다.”

“얼마만에 강서삼미(江西三美)야.”

“오랜만에 봐도 참 예쁘게 생겼단 말이지.”

한유림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후회했다. 까먹고 면사를 안 챙긴 것이다. 원체 세가 바깥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기에 면사를 쓰는 걸 까먹는 거였다.

“확실히 설봉은 차가운 맛이 있다니까. 방금 나 째려본 거 봤어?”

“날 본 거 같은데?”

한유림에게 남자들은 가끔 정신연령이 어려보일 때가 있었다. 그건 나이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매사 장난치기 좋아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며 낄낄거리는 존재들이니까.

생각을 해보면, 어른스러운 남자를 별로 못 본 거 같았다.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당연히 가주님이었다.

“하.”

괜히 아침에 헛소리를 듣고 와서 그런가, 이상한 마구니가 자꾸 머리에 꼈다. 그렇게 수심에 잠겨 한숨을 쉬는 한유림의 모습도 남자들을 사르르 녹이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 본인은 생각에 골몰하여 눈치 채지 못했다.

따져보면 나이는 금목환이 한 살 어렸다. 그러나 금목환은 한유림 앞에서 언제나 어른스러웠다. 아니, 다른 까마득한 어른들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는 무례하지 않으면서 당당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유난스럽지 않게 고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왜 부를까. 대원들의 말대로 겨울바다를 보며 팔베개를 해주려고 부르는 건 아닐 터였다. 그렇게까지 위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서한에는 추신이 있었다.

- 안 좋은 일은 아님

중명각주는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상냥한 면이 있었다. 저런 말까지 굳이 안 써도 되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강서삼미 중 일익을 당당히 차지할 정도로 미모도 출중하다.

금목환과는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확실히 둘이서 얘기하는 걸 먼발치서 지켜본 적이 있는데 굉장히 편해보였다.

그 생각을 하자 괜히 마음 한 쪽이 아리는 건 왜일까. 충성은 일종의 애정인가. 그럴 수도 있다. 애정이 가는 사람. 이상한 표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랑과 애정은 다른 것인가.

사랑은 보통 불로 표현됐다. 뜨겁게 타오르는, 참을 수 없는, 끓어오르는··· 같은 수사들.

그러나 한유림이 금목환에 대한 마음은 요란하거나 시끄럽지 않고 곧은 대나무처럼 사철 고요했다. 그래서 한유림은 본인 마음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사랑과 애정.

애정과 충성.

충성과 사랑.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계속 하다 보니, 강서에서 요녕도 금방이었다. 천주성이 있다는 요녕은 중원과 별 다를 건 없었다. 하긴 요녕도 원래는 중원 무림의 일부였다. 모용세가가 그 터전을 내줬을 뿐. 바뀐 건 다양한 옷에서 흰색 옷이 많아졌다는 것 정도. 그 외에는 모두 똑같았다.

한유림은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해, 수중(綏中), 흥성(興城), 흑산(黑山)의 관도를 따라갔다. 심양 어귀에 들어설 때는 이미 밤이었다.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밤.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버석.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린 건 그쯤이었다. 한유림은 깜짝 놀라서 허리춤의 칼을 빼려 했지만,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그만 얼어버리고 말았다.

“나야.”

이 고저 없는 목소리. 완전한 어둠 속이라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목소리, 말투만 들어도 명백했다.

“···가주님.”

어둠 속에서 그나마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온 건 역시 금목환이었다.

한유림은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금목환이 여기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여기에···”

“마중 나왔어. 지금쯤 올 거 같아서.”

금목환의 말에 한유림이 흠칫 놀랐다. 사실 마중 말고는 올 이유가 없긴 한데, 왜 가주님이 마중을 나온다는 말인가.

설마 진짜 겨울바다 보면서 팔베개···

“가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요?”

“응. 중요한 사람이라 서한에는 안 적어놨어.”

금목환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려 걸어갔다. 한유림은 멍하니 있다가 빠른 걸음으로 총총 쫓아갔다.

뭔가, 뭔가 말을 해야 되는 걸까. 한유림은 계속 생각이 들었다. 금목환과 둘이서 있을 일은 거의 없었다. 둘이 있어도 잠깐이고, 얘기할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는 밤거리. 말없이 걷는 것도 무안했다. 한유림은 입술을 한 번 살짝 깨물었다. 용기를 내보기로 한 것이다.

“저기, 가주님.”

“응.”

잠깐만. 한유림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뭘 말해야 될까. 그러나 남은 시간은 없었다. 이게 만약 비무라면, 자신은 이미 죽었다.

“어, 음, 왜 마중까지 나오셨어요?”

싸늘하다. 잠깐의 침묵은 목에 들이밀어진 칼보다 압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가주님이 나오면 나온 거지, 뭘 꼬치꼬치 캐묻는 건가. 알아서 생각이 있을 텐데.

“···음, 글쎄?”

그러나 금목환의 말은 뜻밖이었다. 글쎄라니. 본인의 기억으로는 금목환이 저렇게 어중간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냥 뭐랄까. 왠지, 보고 싶어서.”

“네?”

한유림은 귀를 의심했다.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금목환은 그 말을 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한유림은 금목환의 눈빛을 보자마자 얼어버렸다.

“둘이 만나는 걸 말이야.”

금목환의 뒤이은 말에 한유림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다른 얘기였구나. 어쨌든 한숨을 쉰 건 무례한 행동이어서 금목환을 슬쩍 바라봤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나저나 둘이 만나는 걸 보고 싶었다니. 가면 갈수록 의문이었다.

“대체 누구를···?”

“글쎄.”

금목환이 한유림을 바라봤다. 한유림은 다시 얼어붙었다.

“그건 말해주기 싫은걸.”

금목환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의 미소를 정면에서 본 건. 휘어진 눈매나 입술이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늘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외모였다.

금목환은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았다. 다행이었다. 본인의 얼굴이 뜨거운 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청나게 붉을 것이었다.

···이것도 충성심인 걸까. 존경하는 가주님이 자신에게 흔하지 않은 미소를 보여줬다는 감동 때문에 이렇게 몸이 떨리는 걸까.

곧 금목환과 한유림은 하얀 성에 다다랐다. 성 주위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 을씨년스러웠다. 어째 성 안에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폐성인가요?”

“아니. 여기가 천주성이야.”

사람의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이곳이 천주성이라. 한유림은 일단 금목환을 따라 들어갔다. 성에 들어가자마자 맞은편에 낫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이 생긴 계단이 있었다. 금목환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고 한유림은 그걸 따라갔다.

걸어가던 금목환은 어느 문에 섰다. 지금까지 성에서 본 문 중에 제일 컸다. 딱 봐도 범상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금목환은 그때 한유림에게 길을 비켜줬다.

“들어가.”

“같이 안 들어가세요?”

“난 안 들어가. 잠깐만 보고 갈 거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애초에 금목환은 뭘 보고 싶은 걸까. 둘이 만나는 걸 보고 싶다니. 그럼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걸까.

한유림은 괜히 긴장되는 걸 느꼈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열었다. 하얀 침상과 좌우로 걷어진 발이 보였다. 그리고 침상 위에 누군가 정자세로 앉아있는 게 보였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방에 들어오는 거라곤 달빛 한 줄기가 전부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 세요?”

한유림이 물었지만, 침상 위의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검은 신형만 희미하게 떨릴 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한유림도 다가가지 못하고, 정좌의 사람은 움직이지를 못했다. 긴 침묵 끝에 침상 위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유림아.”

한유림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등줄기에 번개가 내리친 줄 알았다. 너무 놀라서 뒷목이 뻐근할 정도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서서히 침상으로 다가간다. 한유림이 걸어가는 와중 푸른 달빛 또한 방 안을 더 채워줬다.

“···엄마?”

“유림아, 내 딸.”

달빛이 침상 위를 비췄다. 그곳에는 어머니, 검후가 있었다. 한유림은 입을 뻐끔댔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숨 쉬는 법을 잊은 듯했다.

검후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한유림을 꽉 껴안았다. 한유림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안겼다. 그녀의 입에서 자그맣게 목소리가 나왔다.

“진짜 엄마야?”

“그럼. 네 어미다.”

“···무슨, 아니, 어떻게···”

한유림은 더듬거리면서도 검후를 마주 꽉 안았다. 체온이 느껴지고 살이 맞대어 부드럽게 밀린다. 어안이 벙벙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검후가 한유림의 얼굴을 잡으며 서로 마주봤다.

미쳐서 죽은 줄 알았던, 그 엄마가 옛날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예전보다 좀 늙은 듯하지만, 분명히 엄마였다.

“내 딸, 미안하다. 미안하다. 혼자 남겨둬서···”

검후는 한유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한유림의 오른쪽 어깨가 따뜻하게 젖었다. 젖어옴과 동시에, 드디어 실감이 났다. 금목환이 자신한테 이런 거짓말을 하겠는가. 가슴 속에 벅참이 차올랐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맛보는, 이루 표현할 수도 없는 감동에 한유림은 덜덜 떨기만 했다. 그녀는 문득 검후에게 안기면서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까 전처럼 약한 미소를 띤 금목환이 있었다. 금목환은 한유림과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문을 닫아줬다.

···아.

충성과 사랑.

사랑과 애정.

애정과 충성.

강서부터 요녕까지 그녀를 얽어맸던 질문이 풀렸다. 머릿속에서 투둑,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유림은 검후를 꽉 안으면서 같이 울었다. 뜻밖에 어머니를 만난 기쁨과 함께 북받쳐 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당신은 나에게 어디까지 주실 예정인가요.

이렇게까지 받기만 했는데, 더 받고 싶은 게 있다면 욕심일까요. 한유림은 그렇게, 장장 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의 품속에서 흐느꼈다.

*

나는 태원지기를 운용하면서 두 사람의 해후를 다시 생각해봤다. 벅찬 느낌이었다.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단편만 봤는데도 마음 속 깊이 충만했다.

저 감정은 인간만이 풍겨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에게 가장 본능에 가까운 감정은 저게 아닐까.

누가 그 상황에서 저 둘을 떼놓겠는가. 누군가 절전된 무공비급을 줄 테니, 또 어떤 누군가는 억만금을 줄 테니 그 감정의 조금이라도 나눠달라고 하면 나눠주겠는가.

반면 자연은 무정(無情)했다. 강이 오랫동안 돌고 돌아 바다의 품에 안긴다고 해도 서로 반기지 않는다. 물은 합쳐지고 또 흩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에 아무 감정은 없었다.

나는 어떤 부분에서 감정적이 되는가, 에 대해서 오늘 알아봤다. 예상한대로, 가족과 연관되어 있을 때 난 감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만큼의 감동은 차마 예상할 수 없었다.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랐다. 오늘 조금 더 알게 됐지만.

“···후우.”

명재희한테 얘기를 들었다. 목송을 비롯하여 몇몇 정파 인원들이 독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어떤 중견 문파는 가운을 걸고 운남으로 모든 사람을 이끌고 갔다는 것. 이미 운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싸움이 부기지수로 일어난다는 것.

중원은 여전히 화약고처럼 불안했다. 조금만 부딪치면 터지는 게 다반사였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가족들을 데리고 온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러니까 지키는 것도 나여야 했다.

다시, 나는 운기조식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제는 만천조종검의 다음 초식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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