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납득할 수 없으면
168화 납득할 수 없으면
난 들어오자마자 여기 천주성주가 있는 걸 알았다. 같은 심법으로 내공을 쌓는다고 해도, 각자 내공은 미세하게 다르다.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차이에서 나오는 표식을 기문(氣紋)이라고 한다.
난 천주성주 몸 내부에 내 기를 흘려보내며 치료했다. 성주의 기문을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기를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침착하고 품위 있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비명을 지를 때 째지는 쇳소리가 전혀 연상이 안 될 정도로 고왔다.
“···지, 진짜 성주님이십니까?”
남궁연화가 물었다. 송천우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몸을 덜덜 떨었다. 내 쪽을 향하고 있던 면사는 남궁연화 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그래. 본녀가 바로 너희들의 주인이다.”
그 말에, 십이당주가 동시에 이마를 땅에 처박았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천주성주는 자신 앞에 부복한 사람들을 쭉 둘러봤지만, 결국 시선이 멈춘 곳은 내가 있는 곳이었다.
“일단 감사함을 표해야겠군. 금목환이라고 했던가. 내가 자네를 어떻게 불러야하지?”
“가주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천주성주는 하대가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 말이 품격을 담고 있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보다 나이도 많았고, 풍기는 분위기도 압도적이었다.
남궁연화의 말대로라면 천주성주는 처음부터 정신이 이상했을 터다. 그렇다면 천주성주는 원래 고귀한 사람이었다는 걸까.
“그래, 가주. 자네를 보고 싶었지. 자네가 날 살릴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말이야.”
“저도 그렇습니다.”
당주들은 여전히 부복한 가운데 나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좀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 생각이 잠깐 스쳤는데, 천주성주가 입을 열었다.
“아. 당주들은 일어나지. 가주가 불편해하는군.”
그 말에 남궁연화를 포함한 열두 명의 당주가 동시에 기립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설렘,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이 충성심이 짙다는 건 알았지만, 직접 보니 새삼스레 천주성주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런 말씀드린 적은 없는데요.”
“나도 자네만큼이나 예민한 사람이라네.”
아. 하긴 천주성주 역시 상단전이 열린 사람이었다. 나 말고 상단전이 열린 사람은 처음 보는 것이라 잘 가늠이 안됐다. 천주성주 역시 그러니 기를 감췄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래. 난 참 자네한테 궁금한 게 많았어.”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도 제가 먼저 질문한 게 있으니 답해주시죠.”
“아. 그렇지.”
면사 뒤로 천주성주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 듯했다. 내 말을 무례하다 여긴 듯 당주들이 나를 도끼눈으로 쳐다봤다. 허나 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천주성주는 천주성에서나 주인이지 나한테는 주인이 아니었다. 난 그저 어른으로서 존중을 할 뿐이다.
“천주성은 여차하면 중원을 칠 수 있지.”
그 말에 남궁연화를 비롯한 당주 몇몇이 움찔했고, 송천우를 비롯한 몇몇 당주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천주성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 중원으로는 마교의 침략을 못 막거든. 처참하게 유린당하지.”
“···그런가요?”
“적어도 내가 본 미래에는.”
사람들이 동요했다. 이건 나도 모르는 미래였다. 정파, 천주성, 마교가 뒤엉켜 싸울 때 난 명재희한테 들켜 죽었으니까.
특히 천주성 사람들은 동요가 더욱 심했다. 그녀의 예언을 두 눈으로 지켜봐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가까이 와닿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진다고 확신할 수 있지. 정파는 이미 마교의 간자들 때문에 많이 분열되어 있겠지. 마교의 간자 때문만은 아니겠지. 협이 아닌 실리를 쫓으니 당연한 결과야.”
천주성주의 말에 진권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은 부드럽지만 압도적이었다. 진권은 천주성주의 말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리어 반발을 한 건 옆의 공휴였다. 그는 천주성주의 말을 끊으면서 항변했다.
“성주님이 누구신지는 모르나, 전 중원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숱한 금주령에도 밀주(密酒)는 늘 있었습니다.”
“감히 성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되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니.”
송천우는 바로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지만, 천주성주가 손사래를 쳐서 막았다. 송천우는 씩씩거리며 다시 바른 자세로 돌아갔다.
“난 소림사 방장을 책하는 게 아니야. 평범한 사람인 게 잘못은 아니지. 다만, 평범한 사람은 위에 서면 안 돼. 자네들은 누군가의 위에 서기에 부족한 사람들이었어. 본보기가 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지.”
“···천주성주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만하거라.”
공휴가 더 반발을 하려 했지만 진권이 나서서 막았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천주성주의 말은 정답이라는 걸. 공휴는 불만의 표시로 입술을 찌그러뜨렸다.
“그래서 우리와 반목을 하자는 거요?”
종리운이 물었다. 결국 질문은 돌고 돌아 원점으로 다시 왔다. 천주성주는 고개를 저었다.
“중원 사람인 황금세가 가주가 그렇게 고통 받는 당신을 고쳐줬는데도?”
천주성주가 멈칫했다. 종리운의 말투는 공격적이었지만, 당주들도 이것에 대해서는 뭐라하지 못했다. 내가 천주성주를 고쳐준 건 명백한 사실이니 말이다.
“난 그저 내가 본 미래를 말하는 거니,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
천주성주는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갑자기 천주성주가 저자세로 나올 줄 몰라서 종리운도 뭐라 더 말을 하지는 못했다. 천주성주는 다시 날 바라보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원래라면 그랬어야 한다는 말이었어. 마교의 습격이 시작되기 전, 본 성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서 정파의 지휘권을 빼앗아 왔을 거야.”
“원래라면?”
내 물음에 천주성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근데 그 원래에는 자네, 가주가 없었네.”
그때 그랬지. 자기 미래에 내가 없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확신을 얻은 셈이다.
“그뿐이 아니야. 어떤 미래에도 자네는 없었어. 그래서 자네가 엮이면 미래가 뒤틀렸지. 자네는 천기에 얽혀있지 않은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보고 싶었지. 이렇게 살아날 줄은 몰랐지만.”
“그럼 결론은 뭐죠?”
“아직은 모르겠다는 거지.”
결론은 그거였다. 당주들의 희비가 갈렸다. 그때 송천우가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주님. 감히 말씀을 드리자면, 정파의 부패는 이제 관습에 가깝습니다. 습관은 두 번째 천성입니다. 황금세가 가주 같은 사람 몇몇이 있다고 바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잔잔하던 분위기가 다시 긴장됐다. 이 당주는 지금 정파를 갱생 불가라고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파의 관습이라는 것들은 대개 안 좋은 것들이지. 당장 상인들에게 세금을 뜯어내고 그 돈으로 축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정파 사람들이 반발을 하려 했지만, 난 가만히 있었다. 아직 말이 안 끝났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황금세가 가주가 끼면 미래가 바뀐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한 번 시험을 해보고 싶어. 가주나 정파 사람들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천주성주가 침착하게 말했다. 허나 그 내용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침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곧 중원에 파란이 일거야. 장보도가 발견될 거거든. 다름 아닌 매화검존의 독문무공인 사자신검(四紫神劍)이지.”
나를 제외한 정파 사람들이 천주성주의 말에 기함했다. 매화검존. 이백 년 전 압도적인 천하제일인이었다.
물론 여전히 선불지회에서 천하제일인을 가리기는 하나, 모두가 진정으로 인정하는 천하제일인은 매화검존이 마지막이었다. 당연히 내 세대가 아니기에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른다. 일검에 산을 날릴 정도라고 했나. 아무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사, 사자신검이라고?”
“그, 그게 어디서 발견된다는 말이오?”
천주성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했지만, 정파 사람들은 기절초풍을 하는 듯했다. 매화검존이라는 이름은 아직까지 그렇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난 몰라. 근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 많은 피가 흐를 거라는 거.”
천주성주의 말에 사람들의 흥분이 살짝 식었다. 다름 아닌 매화검존의 비급이면 정말 전 중원이 몰려들 거였다. 비급을 가지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비급은 하나.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무인들의 충돌은 곧 피가 흐른다는 걸 뜻했다.
“확실한 겁니까?”
내가 물었다.
“애초에 저와 관련된 예언은 틀렸을 텐데 말이죠.”
내가 미래에 없다니까 당연한 말이다. 천주성주는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믿고 말고는 자네의 몫일세. 그러나 자네는 알고 있을 걸세. 생각보다 사람에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가능성이 있다는 걸 말이야.”
천주성주의 면사 사이로 눈빛이 뚫고 들어오는 것 같다. 그녀가 말하는 건 명백히 상단전이었다. 확실히 그랬다. 당장 상단전도 회귀와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럼 천주성주는 열린 상단전으로 미래를 봤다는 걸까. 역사서를 볼 때 예언자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쉽게 믿기 힘든 일인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오?”
종리운이 말했다. 성주는 즉답했다.
“그걸 피해를 최대한 줄이며 가져와보시오. 내가 아는 미래를 뒤집어 보라는 얘기요.”
“가져오라는 건 천주성이 가지겠다는 뜻이오?”
“아니, 그건 아니오. 그냥 내가 본 미래와 다르기만 하면 되오. 그 비급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당신들의 할 일이지. 화산파에 돌려주든, 직접 익히든.”
천주성주의 말에 정파 사람들의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허나 생각해도 별 소용은 없었다. 공격하냐, 마냐는 천주성의 권한이기 때문에 정파는 선택할 겨를이 없는 거다.
또한 그렇게 어려워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 모인 이들은 정파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까지 통제할 수는 없겠지만, 별개로 띄어놓고 봐도 전력이 강하니 경쟁에서도 제일 유리할 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럼···”
“잠시만요.”
종리운이 말하려고 했지만 내가 끊었다.
“여기는 제가 대표로 왔으니, 제가 결정해도 될까요.”
“···그게 맞긴 하지.”
종리운은 살짝 무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난 종리운에게서 시선을 떼고 천주성주를 바라봤다.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조건을 걸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가주는 내게 은인이지만, 개인적인 은원으로 정파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난 고개를 저었다. 천주성주가 간과한 게 있었다. 내가 미래에서 온 걸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건, 나 역시 내가 살아있었을 때까지는 예언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 나 역시 곧 장보도가 풀릴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정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로 쉽지 않을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우리 힘이 빠졌을 때 천주성이 우리를 먹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하하.”
천주성주가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순진한 면이 있다. 자신의 진심을 우리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당주들은 바로 반발하려 했지만 천주성주는 손을 들어 막았다.
나 역시 천주성이 정신적 결벽이 있는 집단인 걸 알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지금 중원을 대표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군.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어. 그럼 그 조건은 뭐지?”
“비급을 찾는 동안 천주성 당주들을 전부 제 밑으로 배속시켜주시죠.”
스물네 개의 눈빛이 날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그들의 표정은 둘 중 하나였다. 모욕을 당한 듯 하거나, 어처구니 없어하거나.
“···그건···”
천주성주가 난색을 표하려 할 때, 나는 그녀에게 전음을 날렸다.
천주성주는 몸이 얼었다. 좀 놀랐을 거다. 난 그녀가 반응할 수밖에 없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전음을 보낸지 모르는 당주들은 바로 분노를 토해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어찌 천주성 사람이 중원 사람 밑으로 들어가겠는가!”
“성주님, 이건 저희에 대한 모욕입니다!”
당주들은 거의 거품을 물었다. 특히 중원을 싫어하는 이 당주 송천우는 당장 날 죽이고 싶어하는 기세였다. 그러나 천주성주의 말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다.
“···그래.”
“예?”
당주들이 한 입을 모아 되물었다. 어느 정도 갈려있던 계파도 잠시 합쳐졌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혹시 네놈이 고치면서 성주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 아니냐!”
송천우가 외쳤다. 아무리 천주성주라고 해도 납득할 수 없는 게 있는 모양이다. 천주성주는 난처할 거다. 자기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날린 전음이 있기 때문에.
“납득할 수 없으면 납득시켜주지.”
내가 말했다. 난 엄지손가락으로 검자루를 밀었다. 살짝 올라간 칼날에 광채가 비쳤다.
“정파의 방식으로 말이야.”
“···허.”
송천우는 천주성주를 바라봤지만 천주성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결심했다는 듯 나를 다시 노려봤다.
“그럼 내가 이기면 네 조건은 없던 걸로 하겠다. 성주님, 그건 괜찮겠습니까?”
“그러지. 내가 철회할 테니 굳이 성주의 의견을 물을 필요 없어.”
내가 말했다. 성주는 여전히 묵묵했다. 사실상 결투의 허락이었다. 그녀는 나한테 허락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난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결투가 끝나면 천주성주와 개인적으로 독대할 기회가 있을 거다. 아니, 당장 천주성주가 날 독대하고 싶어 몸이 달 것이다. 그럼 우리는 상단전이 열린 사람들끼리 좀 더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을 터다. 난 그게 벌써 기대됐다.
그러나 그러려면 먼저 저 앞에 있는 송천우를 이겨야했다. 송천우와 내 눈빛이 서로 엇갈렸다. 잠깐이지만, 난 봤다. 송천우의 눈에 띄는 살기를. 그는 나를 죽일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