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한밤의 방문자
165화 한밤의 방문자
남궁연화가 내 방에 찾아온 건 그날 밤이었다.
오늘은 꽤 방문자가 많았다. 내가 천주성주의 고독을 적출하고 돌아왔을 때, 종리운과 진권을 포함한 정파 사람들이 내 방 앞에 있었다.
그들도 당연히 내가 정신을 잃은 걸 알고 있었고, 내가 깬 걸 뒤늦게 알아채고 온 것이다.
난 그들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돌려보냈다. 설명이라고 해봤자 천주성주를 좀 고치고 왔다, 정도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을 돌려보내고 두 시진 정도 지났을까. 남궁연화가 두 번째 방문자로 온 것이다. 떼로 온 정파 사람들과 달리, 남궁연화는 혼자였다.
“들어가도 되겠나?”
“네.”
남궁연화는 굽어져 더 작은 노구를 이끌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천주성이 준비해준 방.
“방은 지낼 만한가?”
“네.”
내 간단한 말에 남궁연화는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찬장하고 서랍을 뒤지는 게 마치 집을 검사하러 온 사람 같이 보였다.
“방에 술도 없고, 차도 없고, 동경도 없고, 육포도 없고, 벽곡단도 없고. 없는 거 천지구만.”
남궁연화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침상을 꾹꾹 눌러봤다. 여전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그녀가 어째서 불편한지는 알 수 없었다.
“딱딱하군. 허리가 다 배겠어.”
그 이후로도 남궁연화는 내 방 안의 많은 걸 지적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사실상 내게 필수적으로 있어야할 건 없기는 했다. 침상 없으면 바닥에서 자면 그만이니까. 쇠사슬에 매달려 서서 잔 게 십 년 가까이 되는데 바닥 정도면 굉장히 안락한 잠자리다.
“큼. 뭐,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말이야.”
“네.”
나는 그러니까 왜 왔냐, 라는 말을 삼켰다. 사실 천주성주의 비명을 앞에서 들은 이후 현기증이 나서 좀 쉬고 싶었다. 상단전이 흔들리는 건 운기조식으로도 조정하기 힘들었다. 정파 사람들도 그래서 대충 설명하고 보낸 거다.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
“네.”
“지금 내가 들어온 이후, 네, 라는 소리밖에 못 들은 것 같군.”
남궁연화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랬나. 난 기억이 잘 안 난다.
남궁연화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난 그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확실히 성주님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어. 어떻게 했는지 물어도 대답하지 않겠지.”
“치료 과정을 숨긴다기보다는 해도 못 알아들으실 겁니다.”
“그래, 그건 중요치 않아. 우린 성주님이 괜찮아지시면 그만이니까.”
남궁연화는 쉽게 넘어갔다. 사실 성주를 고친 데는 그녀의 공도 지대한 셈이다. 혈기린 반지가 없었더라면 고독을 그렇게 쉽게 제압하지 못했을 터다.
“아직 성주님이 완벽히 나으려면 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인사를 하러왔네. 자네에게는 생명의 빚을 졌으니까.”
남궁연화는 일어나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백 살은 더 많은 사람한테 이런 인사를 받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서 이 방이 참 마음에 안 드는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그마치 성주님의 은인인데 이런 초라한 방을 주다니 말이야.”
“전 상관없습니다.”
“아니. 이건 우리의 명예에 달린 일이니까.”
남궁연화가 말했다. 우리가 이런 방을 얻은 건 처음에 계획된 것도 있을 터다. 애초에 귀빈대접을 기대하고 온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천주성이 정파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또 갈등을 겪는 미래를 본 사람이 아닌가.
“성주가 그렇게 아픈 상황인 건 몰랐습니다.”
“그렇지. 극비 중 극비니까.”
“그러면 정파에 방을 붙이고 우리를 부른 건 성주가 아니라 당주들인가요?”
“그래. 나는 반대했지만.”
나도 눈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몇 시진 전 성주실에서 나왔을 때 그들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기류를 난 눈치 챘다. 생각보다 그들도 의견이 통일된 집단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천주성은 성주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집단이군요?”
“아니야. 성주님은 과거부터 지금 상황을 예견하셨어.”
“예견이요?”
“성주님은 신기가 있는 사람이야. 미래를 엿보시지.”
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이해가 안 되니 일단 계속 듣기로 했다.
“그렇게 자세히는 말고. 띄엄띄엄 예언하시지. 정파 거물 중 간자가 있다는 거나, 어디서 어떤 싸움이 벌어질 거라는 거나, 어디 가면 영약이 있다거나. 아마 그런 천기를 보시기에 저렇게 아프신 건 아닐까.”
“그건 아닐 거예요.”
그들은 모르겠지만, 천주성주의 언어기능이 퇴화된 건 좌뇌에 붙은 칠색고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건 상단전 때문이 아닐까.
미래를 볼 수 있기에 아픈 게 아니라, 아픈 대가로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거다. 순서가 바뀌었다.
하긴 나도 상단전이 열리고 나서 과거로 회귀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상단전에는 내가 모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걸까.
그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시기상조다. 아직은 추측일 뿐. 나는 일단 남궁연화의 얘기를 계속 들었다.
“···뭐. 그건 추측일 뿐이니까. 또 너도 들어봤겠지만, 언어 기능을 상실하신 것뿐이니까. 가끔 비약이 심하고, 가끔 본인만 알아듣는 소리를 하고, 가끔 말과 말 사이에 중간이 없는 것뿐이지.”
가끔이라. 내가 볼 때는 전부 그랬었는데. 아마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헛소리도 많이 했겠지. 그걸 받아들고 해석해야 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좀 답답했으리라.
“우리가 강호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해주면, 지침을 내려주는 식이야. 그 중 너를 말할 때 계속 반응이 있으셨고, 오랜 대화 끝에 성주님이 널 원한다는 걸 알게 됐지. 그 대화가 자그마치 육 년이 걸렸어.”
“육 년이요?”
“네가 이청명의 목을 벴을 때부터, 성주님은 너를 원하셨어. 우리가 못 알아들었을 뿐.”
난 살짝 눈을 좁혔다. 육 년 동안 못 알아들었다니. 그들이 어떤 난관을 겪었을지 대략 짐작이 갔다.
대체 성주는 내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천주성주가 미래를 본다니까 내게 했던 이야기의 편린이 이해가 됐다.
그의 미래에 내가 없었다고 했지. 천주성주가 회복되면서 말까지 회복될지는 모르겠으나, 깨고 나서 덜 아플 때 말하면 그나마 좀 더 알아들을만 할 것이었다. 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로 했다.
“애초에 성주는 누구죠? 성주는 당신들에게 뭐죠?”
“그것 참 쉬운 문제군.”
남궁연화의 말은 꽤 복잡한 대답이 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성주님은 우리의 전부지. 태원의 기라는 걸 나눠주셨으니까.”
“나눠줬다고요?”
“그래. 그건 마르지 않는 힘이야. 자연이 우리에게 준 잠재력 같은 거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지만 그걸 몰라. 우리가 숨 쉬는 걸 의식하지 않는 거와 같지. 그러나 의식하면 한없이 의식되는 거야. 성주님은 우리에게 태원의 기를 계속해서 보여줬고, 우리는 오랜 기간 끝에 그 힘을 감응하고 찾아낼 수 있었지. 그 힘을 얻고 복수를 할 사람은 복수를 했고, 강해지고 싶은 사람은 강해졌고,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지킬 수 있게 됐지. 원래는 꺼져가야 마땅한 내 수명도 이것 때문에 늘어난 거지. 그런 신력을 퍼주시면서도 우리에게 바라는 건 정(正), 그거 하나뿐이었어.”
천주성이 그래서 고지식한 집단이 된 걸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것보다 태원의 기란 사람들이 모르는 잠재력 같은 거였다. 아이를 구하려고 어머니가 내는 괴력 같은. 근데 오랜 기간 끝이라니. 난 한 번 무의식 속에 갔다 와서 건져온 건데. 이게 그렇게나 대단한 힘이었다는 걸까.
“그리고 성주님이 누구시냐면···”
난 남궁연화의 입에 집중했다. 그거야말로 궁금했다. 천주성주의 내공을 보면 절대 이름 없는 하수가 아니었다. 주화입마에 걸리기 전에는 종리운이나 팽의석, 아니, 그 이상의 고수였을 거다. 직접 진맥을 해본 내가 판단한 것이니 정확할 터였다.
“모른다.”
“···후.”
남궁연화의 말에 난 눈을 감았다. 왠지 이럴 것 같기는 했다. 천주성주의 모습은 누구라고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으니까. 그것도 천주성주가 깨어나면 알게 될까.
“알려주고 싶지만, 나도 모른다. 나이조차 짐작이 안 돼. 목소리는 상해있고, 피부는 고통 때문에 뻣뻣하게 굳어있어 시체와 같으니까.”
“처음부터 그랬나요?”
“한 십 년 전쯤이었지. 내가 성주님을 처음 뵌 게. 그때도 지금과 생김새는 같았어. 그리고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고 계셨지. 처음엔 그냥 의사를 불러 고쳐줬지만, 가면 갈수록 범상한 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지.”
그럼 천주성이 세워진 건 길어봐야 십 년 정도라는 거다.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된 집단은 아니었다.
“어쩌다가 궁금증을 해결해주러 온 셈이 됐군. 내가 온 건 그 때문이 아닌데 말이야.”
“방을 점검하러 오신 건가요?”
“그것도 아니야. 줄 게 있어서 왔다.”
남궁연화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혈기린반지도 그렇고, 남궁연화에게서 무언가를 자주 받는 것 같다.
“이건 뭔가요?”
“우리는 태원단(泰元丹)이라 부르지. 우리 십일 당주가 만든 건데, 만들기 너무 어려워서 지금 우리에게도 세 개밖에 남지 않은 거야.”
“이건 성주님이 주는 건가요?”
“그렇다고 봐야지. 성주님을 고친 대가로 받는 거니까.”
남궁연화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환단을 건네줬다. 중원칠종신기라는 혈기린반지를 줄 때도 이 정도의 조심스러움은 없었다. 난 환단을 받았다. 그냥 검은 환약이었다.
“태원의 기에 더 감응이 잘되게 해주는 약이야. 엄청나게 귀한···”
“아. 그런가요.”
난 그렇게 말하고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내 주머니에 들어가는 태원단의 모습을 남궁연화는 안타깝게 바라봤지만, 내 것을 내가 이렇게 다루겠다는데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거니까 소중히 다뤄주게나.”
“네.”
애초에 감응이라 함은 감응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약이었다. 난 이미 태원의 기를 내 기와 합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하게 다루고 있으니까. 나한테 크게 도움은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여기 오신 목적은 끝이군요.”
“그렇지.”
남궁연화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났다. 난 그녀를 문 앞까지 전송했다. 남궁연화는 문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모양새였다.
“당주들을 조심하게. 특히 이 당주. 송천우 당주를 말이야. 그는 우리 중에서도 태원의 기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야.”
남궁연화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났다. 송천우라. 나는 남궁연화의 작아지는 등을 보며 문을 닫았다.
*
모두가 초조한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두 손을 입 앞에 모으고 있었고, 누군가는 다리를 떨고, 누군가는 손을 턱에 괴고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떨 수밖에 없었다. 매번 고통의 신음을 내뱉는 성주만을 보다가, 안정적인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성주를 보니 오히려 더욱 불안한 거다.
천주성주는 천주성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었다. 그들은 천주성주에게 은혜를 받았고, 천주성주가 미래를 예견하는 걸 봤다. 그리고 정(正)으로 이끌라는 인도마저 해주신다. 그야말로 선대 고인이 보낸 사도(使徒)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러다 영영 못 깨어나시는 건 아닌가?”
이 당주, 송천우가 말했다. 모두가 송천우의 말에 침음을 내뱉었다. 금목환이 다녀간 후 사흘이 지났다.
그들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샜고, 주치의인 십일 당주 당공현이 매일 같이 진찰을 했다. 그러나 십일 당주도 송천우의 걱정에 확답을 못했다. 그 역시도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원에서도 천주성주 같은 사람은 없었다. 천주성주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대체 언제···!”
참다못한 다른 당주가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였다.
천주성주의 눈이 번쩍 떠진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