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164화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패자에게 말은 없다는 것일까. 천주성의 호위 무인들은 내가 성주실로 들어갈 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날 대접하는 건 아니었고 그저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성주실의 문을 여니 맞은편에 바로 벽에 기대어진 침대가 보였다. 침대의 사면에는 하얀색 천으로 된 발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들렸다. 성주는 깨어있었다. 천 사이로 앉아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가 내 쪽으로 돌아서는 게 보였다.
“너, 뭐?”
짧은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기야 그렇게나 비명을 질러댔는데 목이 정상일 수는 없었다.
난 잠시 생각했다. 방금 말로 바로 알아챘다. 성주와의 이야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이다.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
“알아. 내 물음은 부정. 틀린 정답.”
“···음.”
뭔 소리일까. 해석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어쨌든 내가 잘못 말한 것 같았다. 성주는 안다고 했다. 그렇겠지. 성주가 나를 불렀다고 했으니까. 부하들은 어떻게 날 부르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미 날 알고 있으니까 내 대답이 적절하지 않다?”
난 한 번 확인했다. 긴 침묵이 감돌았다. 그 문장을 해석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림자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맞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니다. 좌우로 흔들린다. 그냥 목 운동을 한 것 같았다. 웬만한 인내심이 있지 않은 이상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불가능해보였다. 난 한숨을 쉬고 막을 걷었다.
천주성주의 모습은 내가 어깨 너머로 봤던, 흉한 꼴 그대로였다. 닦아내긴 한 것 같지만 뭉개진 이목구비에 핏자국들이 드문드문 남아있었다.
“키야악. 눈. 실명.”
천주성주가 소리를 쳤다. 마치 짐승이 경계를 하는 목소리였다.
아마 부하들에게는 이 막을 걷는 게 용납되지 않았을 거다. 말은 못 알아들어도 불쾌함은 충분히 전달됐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당신이 아프다는 걸 알아.”
“실명! 어둠! 암전!”
“당신의 모습을 누구에게 보이기 싫군.”
“정답!”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통한 것 같다. 아마도 부하들도 이런 스무고개 같은 질문을 넘어서 나를 불렀으리라.
“내 머리는 불가능. 미래에 너는 없다. 왜. 너. 어떻게.”
뭔가 모르긴 몰라도 내게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됐다. 그녀는 계속 이어지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고, 심지어 말도 안 되는 단어까지 썼지만 다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난 천주성주의 머리에 손을 댔다. 보이기만 했던 성주의 기가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성주는 마혈이나 수혈 같은 것을 짚어서 기절할 단계가 아니다. 내가 성주를 기절시켰을 때 다른 사람들이 놀란 이유도 그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용써도 성주를 잠재울 수 없었을 거다.
왜냐하면 지금 성주의 기는 안에서 계속 폭발하고 폭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가 계속 난폭하게 뛰고 있기 때문에 마혈이든, 수혈이든, 경맥이든 모든 게 오랜 세월 뒤틀리고 있었을 터다. 그렇다면 혈이 아예 파괴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니 혈을 짚는 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나조차도 말이다.
난 그냥 폭주하는 기를 태을헌원신공으로 잠재웠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시도도 못할 방법이었다. 타인의 기가 어떻게 흐르는지 명확히 알아야 하니까.
바깥에서 흐르는 기의 흐름과 안에서 맥동하는 흐름이 부딪치게 되면 바로 폭발이 일어나는데, 그런 방법을 어떻게 쓰겠는가. 나같이 상단전으로 성주의 내공을 면밀히 보는 사람이나 가능했다.
“흐, 으으으윽···”
다시 천주성주가 굼벵이처럼 몸을 앞으로 말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이었다.
난 그녀의 머리를 짚었다. 성주의 몸에서 다시 거칠게 흐르는 내공이 느껴졌다. 주화입마 때 오는 내공의 흐름과 같았다. 내공의 느낌으로 봤을 때, 천주성주는 정순한 기를 가진 고수였던 것 같았다.
지금 천주성주의 상태를 간단히 말하자면, 주화입마 때 겪는 고통을 계속 받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 고통을 못 견뎌 죽는 사람도 있는 걸 감안하면, 천주성주의 인내는 굉장한 것이었다.
물론 이대로 놔두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천주성 당주들이 탈출하려는 혈들과 장기들을 막고 있다고 해도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내 내공이 천주성주의 몸을 하나씩 훑어갔다. 임맥부터 독맥, 기해부터 백회까지.
“음.”
난 그리고 천주성주의 상단전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그맣게 말려있는 무언가였다. 그것을 기로 슬쩍 건드리자, 그것은 굽은 등을 바짝 곧추세우며 독기를 내뿜었다. 천주성주의 몸에서 나오는 독기는 이 녀석의 것이었다. 상단전, 뇌에 기생해서 독소를 내뿜는 것. 그건 고독이었다.
고독은 상단전 왼쪽에 붙어 독소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난 이곳에 붙는 고독을 하나 알고 있었다.
“···칠색고.”
그건 놀랍게도 전생의 나를 그렇게나 괴롭혔던 칠색고였다.
이 칠색고는 언제부터 붙어있었는지 도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공이 빨린 상단전은 말라 비틀어졌고, 그에 따라 틈이 생겨 억지로 열린 상태였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좌뇌가 고독으로 인해 망가지니 언어의 체계가 깨진 거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독은 종류도 많고, 기생하는 곳도 다 다르지만 하나만큼은 공통적이었다. 그건 바로 통각을 제어한다는 것이었다.
상단전을 계속 먹어가면서, 그 힘으로 통증을 내뿜는 거다. 상단전이 망가진 숙주는 필연적으로 정신 이상을 겪고 엄청난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고 보면, 내 예상은 맞았던 셈이다. 난 극심한 고통과 정신적 피로로 상단전이 자극받아 열렸다고 생각했으니. 실제로 천주성주의 상단전이 열린 상태는 내 상단전의 상태와 유사했다.
다만 나는 그 고통을 과거에 두고 왔고, 천주성주는 현재에도 느끼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천주성주가 내질렀던 비명이 내게 와닿은 건 그저 동정심이 아니었다. 나 역시 그와 같은 비명을 질렀었기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거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고 고독했을까.
난 그리 생각하면서 혈기린이 남긴 고독을 움직였다. 칠색고가 움츠러들었다. 난 칠색고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자결하라는 명령이었다.
“읏!”
갑자기 칠색고가 몸을 강하게 웅크렸다. 무지갯빛 등에서 독이 더욱 세게 뿜어져 나왔다.
“캬아아아아악!”
칠색고가 웅크린만큼 천주성주의 몸도 꺾였다. 나는 성주의 사지를 최대한 내 팔다리로 묶어놓으려고 했다. 그의 팔과 다리는 안 쓴지 오래된 듯 비틀어져 있어 멈추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성주의 비명이 내 상단전을 직격하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고독이 상단전을 괴롭혀 나오는 비명이니, 같은 상단전을 공명시키는 힘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건물 안에서 들었어도 타격이 조금 있었는데, 직접 들으니 바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크, 으···”
이제는 천주성주의 입이 아니라 내 입에서도 신음소리가 나왔다.
난 최대한 정신을 잡고 내 머리 안의 고독에게 계속 명령을 내렸다.
칠색고를 죽여라. 칠색고를 죽여라···
그렇게 사지를 붙잡고 일 각은 있었을까. 비명이 멈추고 천주성주의 머리가 왼쪽으로 꺾였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기울어진 쪽의 귀로 손톱의 반만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화려한 등의 색깔. 칠색고였다.
“후우.”
그제야 나는 성주의 팔다리에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 떨어져 나온 칠색고를 집어서 들여다봤다. 이 작디 작은 것이, 나를 괴롭혔던 놈이었다. 그리고 천주성주를 망가뜨리기도 했다.
검지와 엄지의 사이를 좁혀 결국 맞닿는다. 그 사이에 있던 칠색고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처럼 부서져 먼지가 됐다. 칠색고와 나와의 은원은, 이렇게 허무하게 정리됐다.
일단 계속 고통을 주는 칠색고는 제거했다. 그러나 몸이 많이 약해져있어 치료는 일단 여기까지 해야 했다. 일단 고독을 뺀 것만으로도 천주성주의 몸에는 부하가 많이 들어갔으리라.
나는 천주성주를 침상에 각을 잡아 눕히고 일어났다. 천주성주의 호흡은 전보다 편안해진 것 같았다.
*
그 비명소리는 길고 끔찍했다. 천주성주의 고통에 찬 비명을 오랫동안 십이당주도 이렇게까지 끔찍한 비명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금목환이 천주성주를 고친다는 얘기를 믿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할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니면 팔 당주의 단전을 파괴시켰으리라. 물론 애초에 단전을 파괴시켰어도, 팔 당주가 천주성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것이다. 다른 당주가 그것을 깨는 건 명예롭지 않았다.
만약 혹여 금목환이 천주성주에게 해를 끼친다고 해도, 그건 금목환보다는 팔 당주의 잘못이었다. 약속한 사람은 다름 아닌 팔 당주니까. 약속에는 응당 명예가 따르기 마련이다.
금목환이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논리 구조였지만, 그들의 이런 사고방식은 천주성주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고지식할 정도의 올바름. 정파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 의협근본주의. 천주성주가 태원의 기와 함께 그들에게 심어준 사고방식이었다.
“팔 당주가 헛짓거리만 안 했어도 이렇게 불안에 떨 일은 없었겠지.”
그렇기에 지금 팔 당주, 조현극에 대한 성토가 나오고 있었다. 조현극은 말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남궁연화가 조용히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지. 이 당주.”
“같은 중원 강호 출신이라고 감싸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남궁연화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 당주는 늘 이런 식이었다. 실제로 천주성은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원 주류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넘어온 사람, 비주류 중원에 속해있거나 새외 사람들.
이 당주인 송천우는 후자에 속했다. 여기서 대다수는 정파에게 화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고, 송천우도 그 중 하나였다. 남궁연화는 그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송천우는 후자 쪽을 반중원파, 남궁연화를 위시한 중원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중원파라고 지칭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나마 이번 정파 사람들이 온다고 했을 때, 조현극과 송천우의 생각이 같아 잠시 조용했을 뿐. 원래 이렇게 물고 물어뜯는 관계였다.
“이러다가 만약 고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셈이지?”
“성주님이 치료받으면 좋은 것이 아닌가?”
“당연히 좋지. 그러나 정파놈들에게 빌미를 주게 되지 않나.”
이 당주, 송천우의 말에 당주들이 끄덕거렸다. 일 당주 남궁연화, 팔 당주 조현극, 십일 당주 당공현을 제외하면 모두 현재 정파를 갈아엎어야 된다고 극렬하게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사실 팔 당주도 그 황금세가 가주라는 놈이랑 짜고 쳤던 것이 아닌가? 괜히 우리와 의사를 같이 하는 척하면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라!”
“조용.”
조현극이 분노를 터뜨리자 남궁연화가 조용히 말했다. 천주성주의 비명은 여전히 극점을 돌파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천주성주의 비명소리가 멈춘 것은.
그리고 바로 천주성주의 문이 열리고, 금목환이 나왔다.
“쉬게 놔둬.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할 거니까.”
금목환은 짧게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갔고, 십이당주들은 바로 성주실로 들어갔다.
고작해야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한나절보다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성주님, 성주님은 어떤가.”
조현극이 물었다. 그는 금목환에 대한 패배감도 패배감이지만, 외부인과 성주를 독대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는 것이 더욱 신경 쓰였다.
만약 여기서 성주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면, 그는 다른 당주에게나, 본인에게나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터였다.
남궁연화는 막을 걷었다. 원래라면 남궁연화는 막을 잘 걷지 않았다. 천주성주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걷어냈다면, 그건 천주성주가 자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천주성주는 정자세로 자고 있었다. 십이당주는 천주성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뭔가.”
누가 입을 뗐다. 그러나 말이 이어져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인정하기 싫었던 탓이다.
“달라졌군요.”
결국 목단화가 말했다. 그들이 십 년 남짓을 노력해도 전혀 차도가 없던 천주성주의 상태를, 금목환이 하루 만에 바꿨다는 걸 말이다.
천주성주의 표정은 편안했다. 그들은 천주성주의 편안한 표정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고통에 일그러졌던 표정.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발작이 더 늘고 고통도 더 심하게 호소하는 듯해서, 사람들은 사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궁연화를 비롯한 당주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건 연명(延命)이지 치료가 아니라는 것을.
“···어이가 없군.”
십일당주, 당공현이 말했다. 사천당문의 방계인 그는 천주성주의 주치의기도 했다. 사천당문은 독을 배우면서 약도 같이 배우니까.
“맥이 완전히 안정되어 있어.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성주님이 데려오란 것에는 다 뜻이 있었던가.”
남궁연화가 말했다. 조현극은 그 말에 후회했다. 천주성 사람들은 당연히 기존 정파에 대한 혐오감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천주성주가 알려주기 전에도, 그들이 부패했다는 건 자명했으니까. 천주성의 당주들은 남궁연화를 제외하면 구태 정파의 협잡질에 피해자들이었다.
그러나 황금세가 가주는 그렇지 않았다. 정파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그가 부패한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애초에 보여줄 신성으로 나타나 보여줄 겨를도 없었지만.
그런 면에서 조현극은 금목환과 다른 정파의 사람들을 동일시한 거다. 다른 정파 사람들은 몰라도, 금목환은 성주의 손님이었다.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됐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죠?”
목단화가 물었다. 금목환이 이미 꿰뚫어보기는 했지만, 그들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근데 그것들이 전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 물음에 긴 침묵이 이어지고, 남궁연화가 힘겹게 대답했다.
“성주님이 깨고 난 다음에 결정해야지.”
“정말 황금세가 가주가 성주님을 고친 거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목단화가 물었다. 천주성도 돈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황금세가에 비교하면 우습다.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이제는 혜성처럼 나타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뒤집어씌운 금목환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할지가 걱정이었다.
물론, 천주성의 모든 사람이 남궁연화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성주의 안심된 표정을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하는 다른 당주들을 보며 남궁연화는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