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당신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
158화 당신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
“후우.”
내뱉는 숨결에 흰색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태을헌원신공이 구 성에 이른 이후, 운기조식을 마치면 이렇게 충만한 기가 바깥까지 흘러나올 정도가 됐다.
눈을 뜨니 연공부 안이 하얀색 기운과 회색 기운이 혼재했다. 원래라면 운기조식 정도는 본원에서 해도 됐지만, 무의식에서 새로운 기를 발견한 이후에는 연공부에서 하기로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기라고 오해하기 딱 좋으니까.
실제로 내가 안휘로 나갔을 때, 연공부를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마기를 느껴 급박하게 보고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원래는 마기인지 뭔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적어도 명칭은 알고 있다. 남궁연화가 말하기를 이것은 태원(泰元)의 기라고 했다.
경험상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지대한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꽃 하나의 이름을 안다면, 나중에 수많은 꽃이 피어있는 꽃밭에서도 그 꽃을 찾을 수 있다.
아마 남궁연화는 내게 아무 것도 안 알려줬다고 생각할 테지만, 태원의 기라는 이름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내겐 큰 소득이었다.
태원이라는 말은 지금은 완전히 사어(死語)가 됐지만, 옛날 몇몇 고서(古書)에서는 우주, 자연 그 자체를 이르는 말로 가끔 쓰였다. 남궁연화가 아무리 나를 고평가했어도, 내가 별의 별 책을 읽어봤다는 건 알지 못했으리라.
스르륵.
소매에서 회색 기운이 연기처럼 나왔다. 확실히 웅혼한 내공이었다. 이런 내공이 내 몸 어디에서 숨어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다만 이 내공의 정체를 몰라서 적극적으로 안 썼을 뿐.
그러나 이제 남궁연화를 비롯한 천주성 사람들이 쓰는 걸 확인했으니, 안전성은 그들로서 검증한 것이다. 분명 이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것이 자연 그 자체의 기운이라면, 역천(逆天)을 하고 있는 마기는 어째서 이 기와 닮은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마기와 상극인 태을헌원신공과도 상극이어야 했다.
그러나 태원의 기는 태을헌원신공과 충돌하지도 않았다. 태원의 기가 태을헌원신공을 잡아먹으려던 것도 처음뿐. 이제 내 통제를 따라 가만히 있었다.
“흐읍.”
난 몸의 여러 군데를 돌려서 덥힌 다음 가부좌를 틀었다. 태원의 기와 태을헌원신공을 동시에 운용해 볼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 두 개의 내공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무해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남궁연화가 태원의 기로 거력을 쏟아냈을 때, 난 압박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도리어 편안했다.
물론 태원의 기가 무해하다고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태을헌원신공이 아니었다면 시도하지는 않았을 터다. 다른 내공은 어떨지 모르지만, 태을헌원신공을 구 성까지 익힌 내게는 확신이 있다. 이만큼 안전한 내공도 없다고.
상단전에 있는 태을헌원신공은 백회에서 내려가고, 하단전에 있는 태원의 기는 기해에서 올라간다.
땀이 삐질 흘렀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확신이 있다고는 해도 아무리 그래도 두 내공이 마주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책에도 나와 있지도 않았다.
두 내공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 같은 뱀처럼 머리를 곧추 세우고 경계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난 그 두 내공을 맞부딪쳤다.
쿵!
심장 쪽에서 몽둥이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일었다.
“크···읏!”
바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와서 입술의 안쪽을 씹었다. 이정도 고통은 예상했던 바였다.
아무리 그 두 기운들을 내 것으로 길들였다고 해도, 이 둘은 선천적으로 달랐다.
쇳덩어리를 핥는 맛이 났다. 피가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나 세게 씹었던지 입 안을 씹는데 이빨이 맞부딪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무해한 기들끼리 부딪쳐도 이러한 폭발력이다. 그래도 이들은 서로 피하며 내 기맥을 허락도 없이 헤집을지언정 더 터지지는 않았다. 기맥들은 찢어져 나가는 것 같았지만, 내가 내 내공에 찢길 정도로 수련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
“흐으읍!”
전신에 있던 진기들을 모두 심장으로 불러 모았다. 기들은 소용돌이치듯 내 심장으로 빨려갔다.
고오오···
내 몸에서 나오는 진동에 연공부 건물이 함께 공명했다.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손을 심장에 대보았다. 심장에 두 가지 기운이 태극도(太極圖)처럼 엉겨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태을헌원신공의 도도한 물결이 더 거세졌다. 십 성, 극성으로 올랐다는 것이었다.
난 바로 송로를 들어 휘둘러보려고 했다. 늘 그렇듯, 송로에 태을헌원진기를 불어넣는다.
뿌각.
그때였다.
“응?”
송로의 검면에 금이 나기 시작한 건 말이다. 나는 재빨리 내공을 회수하고 송로를 바라봤다. 그러나 송로는 깨지는 걸 멈추지 않았다. 파편이 하나둘씩 땅에 떨어졌다.
땅에 박힌 파편에 비치는 내 눈빛이 반짝거렸다. 파편이 떨어지면서, 송로는 새로운 검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
“가주. 검집이 바뀌었군. 검도 바뀐 것 같은데. 원래 걸레짝 같은 천 같은게 감겨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걸레짝이라니. 송로입니다. 무림맹 천기고에 있던 걸 준 건데요.”
“좀 훌륭한 검을 주지. 왜 그런 이빨 다 빠진 검을 줬는가?”
“본인이 가지겠다고 한 겁니다. 알고 말하시죠. 선배님.”
팽의석과 종리운은 여전히 투덜거렸다. 실제로 나는 검집은 바뀌었다. 송로가 조금 더 얇아져서 얇은 검집이 필요했다.
종리운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팽의석에게서 벗어난 후, 내게 슬쩍 다가왔다.
“그럼 송로를 버린 건가?”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렇지?”
종리운은 서운할 뻔했다는 표정으로 내 등을 탁탁 두들겨줬다. 아무튼 송로는 무림맹 천기고에서 가져온 게 맞으니, 어떻게 보면 종리운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 송로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걸 들으면 기뻐할까. 아니. 이 검이 송로라는 걸 밝혀봤자 믿지도 않을 거고, 나도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연공부에서는 몇 번 써봤지만, 연공부에서는 내공을 강하게 담을 수도 없으니 실전에선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사용해보면 송로가 어째서 이렇게 변했고, 무엇이 정확히 변했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천주성을 가고 있으니까.
난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소수로 구성된 사람들이 말을 타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천주성에 가는 인원들은 나름 의미 있는 구성을 했다. 지금 중원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 미래 중원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섞은 것이다. 물론 내가 뽑았다.
그러니 내가 편한 사람 위주로 뽑았다. 하북팽가의 팽의석, 팽상문. 무림맹의 종리운, 갈유월, 소림사의 진권과 공휴. 그리고 나와 명재희였다.
여기서 제일 눈에 띄는 인물은 명재희였다. 그녀는 드러난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건 예전에 해남을 같이갔던 갈유월과, 밑에 두었던 종리운 정도.
“허허. 그때 그 아이가 이렇게나 자랐었구나.”
“맹주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금목환 가주가 잘 대해주고 있지?”
“잘 대해줄 것도 없어요. 제가 알아서 잘하고 있기 때문에.”
명재희는 중원의 거물들 사이에 있는 건데도 크게 기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싹싹하게 인사를 하고, 잡무를 하고 다녀 어른들의 예쁨을 받았으면 받았지.
아무튼 그녀를 동행시킨 이유는 당연히 천주성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천주성은 정보가 폐쇄된 곳이라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그녀의 주장이 일리 있었기 때문이다.
“···야.”
어느새 종리운에게서 떠나 내 옆에 붙은 명재희가 조용히 물었다.
“응.”
“저 아가씨랑 싸웠어?”
명재희의 시선 끝에는 무표정으로 말을 타고 있는 갈유월이 걸려있었다.
“아니.”
나도 역시 갈유월을 봤지만, 갈유월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팽하니 돌렸다.
“싸운 거 같은데?”
“아니야.”
“그럼 왜 저러는 건데?”
“나도 몰라.”
명재희는 갸웃했다. 갸웃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난 갈유월하고 싸운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허나 같이 가는 사람들끼리 모르는 게 있어서는 안 되는 법. 나는 말을 늦춰서 갈유월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갈유월은 고개를 푹 숙이고 걷다가, 내가 가만히 있는 걸 보고 소스라쳤다.
“악! 깜짝이야···”
“그렇게 놀랄 정도였어?”
무인이라 기감도 있을 텐데 놀란 걸 보면 확실히 평소 같지는 않았다. 난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
“문제?”
갈유월이 목을 아래로 하면서 날 바라봤다.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는 듯했다.
“없지.”
“근데 왜 그래?”
“내가 뭘?”
갈유월은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옛날 해남 때 그녀를 보는 듯했다.
“없으면 됐고.”
“···그래.”
그러나 더 없다고 하니 더 묻지는 않았다. 내가 말의 고삐를 이끌러 앞으로 가자 명재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 뭐해?”
“뭐가.”
“딱 봐도 뭐가 있는데 없다고 돌아오면 돼?”
“없다고 했잖아.”
“네가 언제부터 사람 말을 그렇게 잘 믿었어?”
“믿을만한 사람이잖아.”
나도 갈유월을 알고, 갈유월도 나를 아는데 거짓말을 할 필요가 무어 있다는 말일까. 명재희는 나를 계속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심이니?”
“내가 너한테 진심이 아닐 이유가 뭐가 있겠어.”
“웩.”
내 말에 명재희는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곧 이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청 흘리고 다니네. 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못 알아들었으면 됐어.”
명재희는 말의 고삐를 조여 멈췄다. 그녀는 갈유월 쪽으로 합류해 또 뭔가 소근거렸다. 거의 전음 수준으로 말하고 있어서 듣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그녀들만 통하는 무언가는 있는 듯하나, 천주성으로 가는 길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보였다.
나는 말을 타면서 개방이 조사해온 천주성 설명 종이들을 펼쳐서 읽어봤다. 말 정도는 허벅지 만으로도 좌우로 움직일 수 있고, 그렇게 빨리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느리게 걷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여유있고 천천히 간다는 것을. 이건 자존심 싸움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냐의 문제니까. 적어도 지금만큼은 정파 전체의 인식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자처해서 대표를 맡은 것이니 그만큼의 의무는 져야했다.
나는 멈춰섰다. 나뿐 아니었다. 모두가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멈춰섰다. 관도를 걷고 있었지만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벌레가 풀잎을 뒤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 거리를 살펴봤다. 아직 천주성이 있는 요녕까지는 한참이었다. 지금 하남에서 하북을 건너고 있으니, 그들을 만나려면 한 성을 더 통과해야 했다.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군. 마중도 나와주고.”
허나 그러지 않아도 됐다. 관도 맞은편에서 백마를 타고 온 사람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말뿐 아니라 복색도 흰색으로 칠한 걸 보면, 그들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왠지 미친놈들같군.”
“미친놈들 맞습니다.”
종리운의 말에 난 조용히 대답해줬다.
우리는 멈춰섰고,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천주성의 무리 앞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뭔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날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주겠다는 느낌이었다.
아무 말 없는 대치에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누군지 알아냈다.
“목단화 당주.”
천주성의 십이당주 중 일익. 내가 어렸을 때 등령당에서 만난 목단화였다. 그의 얼굴은 곽진도와 싸웠던 그때와 비교해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
목단화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장난치듯 포권했다. 목단화가 말에서 내려와 포권하니 천주성에 있는 사람들이 일시에 말에 내려와 포권한다.
“오랜만이야. 황금세가의 어린 가주. 천주성에 오지 말라는 발칙한 방문은 잘 봤네.”
“당신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
목단화와 내 눈이 마주쳤다. 목단화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나 역시 같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천주성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고.”
목단화의 미소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