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새로운 오대세가가 탄생했네
157화 새로운 오대세가가 탄생했네
가족들은 내가 생각한대로 잘 움직여줬다. 아니, 내가 생각한대로는 아니다. 이건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짠 전략이었다.
난 가족들에게 불청객이 찾아온다고 알렸고, 가족들은 당연히 불청객이 누구고 어떤 목적으로 찾아오는지 궁금해 했다.
이제 가족들도 강호가 돌아가는 꼴은 대충 알고 있으니, 조금만 알려줘도 척하면 척이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누님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요.”
“왜. 충분히 이 상황에 가산점이 될 수 있었지. 나같은 예쁜 애가 그런 수치를 당했는데 말이야.”
금수린이 어깨를 쫙 피고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히 수건으로 옷을 감싼 채가 아닌, 황금세가의 남색 복장을 입은 채였다.
난 그냥 진권을 포함한 다른 수장들을 불러놓고, 이들의 태도를 보여주려고한데 그쳤지만, 금수린이 그런 사람들은 인성의 밑바닥을 보여줘야 된다면서 그런 상황이 계획된 거다.
“다음 번에는 누님의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에구, 우리 목환이가 화가 났구나. 누나가 미안해.”
“화 안났습니다.”
금수린이 내 볼을 콕콕 찔렀다. 금월상과 금화청은 그걸 재밌다는 듯이 바라봤다.
나 역시 가족들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했지만, 왠지 다른 가족들이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걱정이 된다. 내가 집을 나선다고 하면 덮어놓고 걱정하는 그들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금수린이 뭐라도 하겠다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고 금수린이 의도했던 상황이지만, 그 탐욕스러운 늙은이들이 금수린을 쳐다보는 눈빛은 막상 보니 굉장히 불쾌했다. 그러니 이제 금수린의 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강하면서도 은근히 극단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라 어디로 튈지 몰랐다.
“굉장히 무례한 생각을 하는 눈빛이야.”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금수린은 내 말을 못 믿는 듯 손가락을 두 개로 늘려 내 볼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바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던 금월상, 금화청, 금수린의 표정이 굳었고 난 표정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들어가도 되겠나?”
진권의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형제들을 바라봤다. 형제들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마자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금화청과 금수린이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 보면 금화청과 금수린은 강호의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부리며 세가에서 인정받는 그들. 그들에게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장문인, 장로들은 그냥 나이 많은 사람에 불과했다.
저렇게까지는 안 해도 됐지만, 확실히 그들이 당황하기는 한 것 같았다.
“가주의 형제분들이 화가 좀 난 것 같군.”
“그럼요. 여전히 무가들은 상가를 무시하나봐요. 숙녀의 몸을 훔쳐보고서도 뻔뻔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꼴이라니.”
금수린이 한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기인 걸 아는 나도 등줄기가 살짝 싸늘해질 정도였다.
“···크흠.”
당연히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사람들이 금수린의 계획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 역시 금수린이 비명을 질렀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딸뻘의 여자아이가 중장년의 사람들을 질책하는 모습은 꽤 볼만했다. 실제로 그들은 금수린의 의도대로, 목송을 비롯한 사람들의 행동에 강한 수치를 느끼는 듯했다.
“낭자에게는 정말 미안하네. 내 사제이고, 우리 문파의 장로이니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무당파 장문인인 목진이 고개를 숙였다. 난 그를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금수린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처량해보였다.
“이건 비단 무당파의 잘못은 아닐세. 안부터 곪아있는 걸 보지못한 우리 모두의 잘못일세. 당장 문파의 명성을 올리고 싶어서 명예를 깎아먹은 짓이었네.”
진권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가 서로 간섭할 수 없기에 이렇게 된 건 변명이라고 생각하네. 그 누군가는 의미없는 자존심 경쟁의 고리를 끊자고 말하고, 본디 정파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같이 노력하자고 말했어야 했어.”
모두가 침통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여기 온 사람들은 진권의 의도에 긍정하는 사람들만 왔으니. 다행히도 구파일방의 꼭대기까지 썩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틀린 길을 가고 있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곳을 건너지는 않은 셈이다. 만약 더 나아갔다면 목송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거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면 옹진수 같은 괴물이 탄생했으리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행히 그 정도 분별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금목환 가주의 행동은 정파의 타산지석이었네. 세가의 명예를 드높이면서도, 정파의 가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네. 그런 점에서 난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과를 표하고 싶네. 내가 자네에게 서한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고, 아마 명석한 자네라면 알고 있었겠지.”
진권은 그렇게 말하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뒤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은 진권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요.”
내가 답했다.
“제가 방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파의 가치를 지키고 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가의 명예를 드높이고자는 했지만, 그것은 우리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지 공명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진권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 깊이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진권은 날 보며 정파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고 있을까. 난 진권의 눈빛을 보며, 뒤에 있는 사람들의 수치감을 느끼며 정파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몰랐던 것은 아닐 거다. 세상의 모든 것은 쫓아가면 떠나는 반발력을 가진다는 점을 말이다. 그들은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있었던 거다.
“나는 잘 모르겠네. 어려운 문제야. 정파라는 단어 안에 담겨있는 걸 생각해봤지만 이젠 잘 모르겠네. 옛날에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앎이라는 건 무지의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폐를 움직이는 것이 숨을 쉬는 방법임을 몰라도 알아서 하듯 말이죠.”
“내가 자네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자네는 말하는 게 자네 나이답지가 않아.”
진권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푹 뱉었다.
“일단, 오늘 여기로 찾아왔던 녀석들은 모두 제자를 들이지 못할 걸세. 문파나 세가에서 어떤 영향력 있는 활동도 하지 못할 거고. 그들이 반성하기 전에는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쉽게 바뀔 거라고는 생각 안한다. 평생동안 쌓아온 것이다. 자긍심과 아집이 뒤엉켜 제대로 분리하기는 어려울 거였다. 다만, 그들 역시 정파였고 기회는 줘야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청진처럼 말이다. 그가 어떤 계기를 통해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이들에게 그런 계기가 안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시죠.”
“그럼 얘기를 정리해볼까.”
진권이 목을 꺾었다. 목이 굳어있었던지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당금 정파는 마교의 간자, 내부의 불건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위험한 상황일세. 그 와중에 오대세가의 기둥이었던 남궁세가가 힘을 잃었으니 그 위험이 도를 넘었다고 볼 수 있지.”
“그렇죠.”
“용봉지회에서 말했던 그 말. 아직도 유효한가?”
신단회에 참여하겠다는 말. 준비되어 있다는 말. 명백히 떠오른다.
지금보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원할 때, 정파 내부가 격동하는 이 중요한 때다.
“네.”
“그 말로 오늘 새로운 오대세가가 탄생했네.”
진권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의가 있냐는 몸짓이었고, 아무도 이의가 있을리 없었다.
이렇게 간신히, 정말 간신히 천주성이 움직이기 전 오대세가가 됐다. 아직 중원은 모르지만, 이들이 공언한 이상 황금세가는 오대세가의 일원이 되었다.
“신단회의 일원이 된 이상, 하나 제안해도 될까요.”
내가 말했다. 진권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래도 금수린이 이렇게까지 그들에게 빚을 지워놨는데 써먹을 건 써먹어야 했다.
“뭔가?”
“이번 천주성에 사람을 보낼 때, 제가 총 책임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천주성은 원단에 정파들을 도발했다. 정파를 대표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안 갈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 당장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안 가면, 천주성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천주성에 보낼 사람을 골머리 썩이고 있을 터였다.
“그래주면 나야 좋지. 현재 정파에서 떠오르는 자네가 맡아준다면 잡음도 덜할테니.”
진권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긴 그들은 지금 정파를 대표하기에는 신뢰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그들의 가려운점을 긁어주는 일이기도 했지만, 내게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정파의 대표로는 가야 천주성주가 나를 접견하는 것이 아닌, 동등하게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황금세가의 가주로 가는 것과 정파의 대표로 가는 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낼 터였다.
“그럼 천주성에 관한 건 제가 일임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진권의 확답에 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천주성을 갈 차례였다.
*
오대세가. 중원을 대표하는 명문. 당연하지만, 오대세가가 바뀌었다는 건 중원을 강타하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남궁세가 대신 황금세가가 오대세가가 됐다며?”
“허, 정말 용봉지회에서 말한 그대로군.”
“···금목환 가주가 난 사람은 난 사람이군. 최연소 오대세가 가주지?”
“내년에야 약관이라는데, 정말 괴물이 따로없군.”
당장 몇 년전, 다른 세가에 유린당하며 돈만 굴리는 곳이었던 황금세가가 중원을 대표하는 오대세가가 됐다.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이후, 금목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모르거나 얕보는 사람들은 있었다. 대단하기는 하지만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것이다.
허나 이제 금목환은 오대세가의 가주였다. 이제 전 중원에 금목환을 모르는 사람은커녕, 어리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최연소 오대세가의 가주다. 그것만으로 금목환은 일약 중원의 신룡(新龍)이 된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별로 부를 기회도 없었던 옥룡(玉龍)이라는 별호가 금목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잘생긴 후기지수라는 말에 가둬두기에는 그는 거물이었다.
소제(小帝).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중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오대세가의 가주를 그렇게 부르기로 합의했다.
- 천주성은 숨겨진 바가 너무 많은 조직이므로, 정의를 논하기에는 이르다. 본인을 정파의 일원이라 생각한다면 천주성에 가지 않는 것을 권고한다. 대신 정파를 대표해서 나를 비롯한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 가겠다.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
최연소 오대세가의 가주.
제(帝)라는 별호를 약관 전에 처음으로 받은 무인.
그의 첫 행보는 중원에 방을 붙이는 걸로 시작됐다.
원래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천주성에 자진으로 참여하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비슷한 방을 많이 붙였었다. 그러나 다른 문파들의 가치 판단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황금세가가 붙인 거다. 그들은 낯설어하면서도 오대세가로 처음 선보인 황금세가가 어떻게 할지 궁금해 했다.
그러나 황금세가는 잠잠했다. 이름 있는 무인들을 부르지도 않았고, 힘을 과시하지도 않았으며, 연회를 열지도 않았다.
천주성이 말한 원단까지는 고작해야 사흘이 남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