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가족들이 쉬고 있거든
155화 가족들이 쉬고 있거든
- 본 천주성은 다음 원단(元旦)에 요녕에서 정파의 백년지계(百年之計)를 논할 예정. 같이 정파의 방향성을 논하고 싶은 뜻있는 자들은 참석해도 좋다.
천주성이 보낸 서한은 오만하면서도 간결했다. 정파의 방향성을 논한다니. 현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이루어진 신단회의 목적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한은 하북팽가에만 간 것도 아니었다. 이름난 문파들에게는 모두 직접 서한을 보냈으며, 다른 곳에는 방을 붙였다. 이제 전 중원인이 천주성의 목적을 알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아주 엎친데 덮친 격이군.”
진권이 염주를 굴렸다. 천주성이 지금 방을 붙인 건 명확하다. 지금같이 정파의 명가들이 흔들리고 있을 때, 확실히 존재감을 뿌리박겠다는 거다.
요녕에서 정파의 백년지계를 논하겠다. 당장 지금 정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혹할 수밖에 없는 문구였다.
“일 났군.”
지금 가만히 서안에서 황금세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진권은 또 하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사과를 하려는 사람이 가야지, 어찌 사과를 받는 사람한테 오라가라 한다는 말인가. 이건 진권도 정말 의식하지 않은 부분이었고, 그렇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진권이 오라고 했던 이유도 역시 존재했다. 먼저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반응을 취합하고 한 번에 전달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에 시간이 걸리니 오라고 한 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시간마저도 부족했다. 당장이라도 황금세가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천주성으로의 이탈이 가속화될 게 분명했다.
“공휴! 밖에 있나?”
진권이 급하게 외쳤다. 공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현재 황금세가 사람들 어디까지 왔는지 위치 파악해봐. 빨리!”
“지금 모두 신단회 준비를 하고 있어 가용 인력이···”
“빼. 빼면 되잖아!”
진권의 명 아래 신단회 준비를 하고 있던 소림사 사람들까지 동원되어 움직였다. 지금 그런 준비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목송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은 한 순간의 바람일 뿐이다.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모르쇠로 일관하고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꺼질 불꽃이었다. 근데 저런 호들갑을 떨어서 대놓고 사과를 하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정파의 명예를 얼마나 깎아먹으려는 생각인지.”
“장로의 의견에 동의하오.”
황보세가의 장로, 황보무진도 동의했다. 목송은 진권이 그랬던 것처럼 서한을 보냈다. 물론 문파나 세가에 보낸 게 아니라, 자신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냈다.
그들은 예상대로 지금 자신과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고, 지금 여기 모인 것이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는 삼선 앞에서도 못 숙이는데 황금세가 앞에 숙이라고? 그것도 애새끼인 황금세가 가주한테? 절대 불가능하지.”
“말해 무엇하겠소.”
무당파의 장로 목송, 화산파의 청양, 황보세가의 장로 황보무진, 청성파의 장로 구해윤, 아미파의 혜진 신니, 개방의 소취경 장로···.
모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중진들. 목송이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맥이었다. 그들도 목송과 같이 사과하자는 방침에 반항하여 나온 사람들이었다.
“차라리 이 인원으로 힘을 보여준 다음 사태를 가라앉히라고 하는 게 빠르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표현만 같고, 같은 내용만 돌려서 말하는 동안 목송이 말했다.
“청진아.”
“네.”
목송의 제자, 청진이 옆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황금세가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와라. 시간이 없다.”
“···네.”
청진은 잠깐 멈칫하고 대답했지만, 목송은 유별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따라 조금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한심하기는. 오룡도 못 따고 왔으면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텐데.
목송은 빠르게 등이 작아지는 청진을 보며 혀를 찼다.
서안. 두 조직이 황금세가를 찾는 셈이 되었다.
*
따뜻한 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가 주변 전체를 안개처럼 감쌌다. 여기가 바로 섬서의 온천, 화청지(華淸池)였다.
이곳에 몸을 담그면 피부가 깨끗해지고, 신경통이 사라진다는 효험을 가진 신비한 곳이었다. 잠깐 파괴된 것을 화산파와 종남파가 복구를 했다고 했지.
“근데 여기는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금수린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모두가 알 정도의 명소고, 광활했는데 사람은 우리 다섯밖에 없었다.
“하루 샀어요.”
내가 말했다. 금화청이 물었다.
“하루에 얼마냐?”
“원보 세 개면 되던데요.”
“나쁘지 않네.”
금화청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월상, 금수린도 적절한 금액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곽진도만 얼굴이 찌푸려질뿐.
“너희에게 상식을 알려줄 필요가 있겠구나.”
“무슨 상식입니까. 장로님. 부자가 돈을 쓰는 것만큼 상식적인 일이 어디 있다고.”
“맞아요. 장로님도 이제 돈 좀 쓰고 다니세요. 어차피 이제 봉급도 스스로 결정하시잖아요.”
이제 우리 형제들도 곽진도가 한 마디하면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금월상과 금수린이 반박하자 곽진도가 움찔했다.
“···많이들 컸구나.”
“스승님도 편히 좀 쉬세요.”
내가 말했다. 휴양지는 쉬려고 온 것.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세상만사가 다 잘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 거다.
“난 가끔 네 머리를 열어서 구경하고 싶다.”
“잔인한 말씀이시네요.”
곽진도는 투덜거리면서도, 내 형제들과 같이 화청지로 들어갔다. 화청지는 관리하는 사람도 최소한으로 내가 줄였다. 고작해야 안내하고 탕의 효능에 대해 설명해줄 사람 두어명이면 충분했으니.
그 다음부터는 정말 우리는 화청지를 즐겼다. 남자들인 우리는 연화탕(蓮華湯)으로, 금수린은 혼자 해당탕(海棠湯)으로 갔다. 금수린은 혼자 해당탕으로 가는 것에 불만이 있어보였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우리가 같이 욕탕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와아···”
화청지에 무슨 기연이 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즐기는 것뿐이었다. 여유있게 말이다.
금월상은 수건을 접어 이마에 놓고 목을 꺾고 있었고, 금화청은 눈을 감고 있었으며, 곽진도는 슬슬 자맥질을 하고 돌아다니며 물을 어딘가로 몰아갔다.
“좋구나.”
“으어어. 으으으으음···”
사람들의 피로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말로 녹아난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여기서 힘들지 않았던 사람 어디 있으랴.
금화청도 매일 오랫동안 앉아서 서류를 보고, 금월상은 강운의 혹독한 훈련을 받고, 곽진도 역시 세가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사람이다.
몇 마디씩 얘기하던 형제들도 온천이 주는 노곤함에 모두 퍼졌다. 마치 기절이라도 한 모양새다.
난 그들이 쉬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모두가 온천에서 녹아나고 있을 때 난 슬슬 일어났다.
“어디 가냐?”
조용히 나가려고 했지만, 나지막하게 곽진도가 물었다.
“주무시고 계시던거 아니었습니까?”
“맞는데. 움직이니까 깨지.”
휴양지에 왔으니까 좀 덜 민감해도 될 것을. 나는 미소를 지어줬다.
“전 피부가 좀 쳐지는 것 같아서 잠깐 나가있으려고요.”
“참나. 약관도 안 된 놈이 피부가 쳐지기는···”
곽진도는 젖은 바위에 두 굵은 팔을 얹어놓고 기댔다. 안개가 짙었지만 두터운 몸에 있는 상처들은 선명했다. 저게 바로 강호인의 흔적일 터다.
“나야 몸 풀리고 좋다만, 여기 온 이유가 뭐냐?”
“몸 풀려고 온 겁니다.”
“진권한테 좀 일찍 오라고 얘기 들었다면서. 근데 왜 안 찾아가는 거냐. 자존심 싸움?”
“자존심은 아니고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요. 천주성이 서한을 돌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역시 천주성의 서한을 받았다. 요녕으로 오라나. 물론 나는 그 서한 밑에 조금 특별한 문구가 있을 뿐이었다.
-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에게 접견을 허락한다. 천주성주.
“그게 왜?”
“정파가 분열될 겁니다. 그건 천주성이 노리는 바고, 소기의 성과를 얻겠죠.”
“그거야 그렇겠지. 그런데 우리가 한 일도 비슷하지 않느냐?”
“네. 맞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끼리 끈끈하게 묶여있을 때, 무림맹이라는 제 삼의 세력을 만들어내고, 하북팽가와 해남파와 연을 만듦으로써 분열시킨 게 맞았다. 다만 천주성과 나는 분열을 시킨 목적이 다르다. 천주성은 정파를 꿀꺽 삼켜버리는 거니까.
“그래서 분열은 가속화가 될 겁니다. 저희에게 우호적인 세력, 우호적이지 않은 세력. 그들이 당장 저희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들의 말대로 해준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분열할 시간을 최대한 줄 생각입니다.”
“흐음. 그러니까 가져갈 사람만 가져가겠다는 뜻이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구파일방, 오대세가. 이제 힘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나 역시 그것들의 힘이 필요했고, 나를 중심으로 개편이 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시간을 주는 게 중요했다.
“그렇구나. 그러나 원체 한 몸이었던 사람들을 물과 기름처럼 분리시킬 수는 없을 게다.”
“그렇겠죠.”
“그럼 그 불순물은 들고가겠다는 생각이냐?”
“아뇨.”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걸음걸이가 경계를 할 정도는 아니라, 곽진도와 나는 그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가 났다.
“누구시오?”
“화청지 관리자입니다.”
“네. 어떤 일이시오?”
“손님이 왔습니다. 가주님을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손님이라.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 손님일지는 아직 몰랐다. 그래도 나 혼자 만나야 될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스승님. 스승님은 몸을 더 담그고 계시죠. 저에게 온 손님이니까요.”
“축객령 한 번 고급스럽구나.”
곽진도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아는 사람. 대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곽진도는 다시 탕으로 돌아가 물을 입까지 잠갔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스승님도 좀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난 온천용에서 황금세가의 복식으로 갈아입었다. 기감을 대충 탐색해보니 내력이 대단한 인물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관리인은 내게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방을 안내했고, 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난 의외의 얼굴을 맞이해야 했다.
“이렇게 다시 보는군. 청진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나는 청진의 말에 갸웃했다.
“원래 그렇게 존댓말이었나?”
“지금까지의 예가 잘못된 것이었죠.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난 살짝 떨떠름했지만 청진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갑자기 왜 이런 태도로 바뀐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 무엇 때문에 찾아온 거지?”
“협박을 할 겁니다.”
대뜸 청진이 말했다. 나는 계속 청진의 말을 들었다. 청진은 구구절절 말을 했다.
자신의 스승인 목송이 황금세가에게 사과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모았고, 그들로서 황금세가를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들이었다.
난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직 그들은 현실 파악이 안 되는 것 같다. 과거의 영광에 너무 취해있을 수도 있고.
그보다 난 먼저 물어야할 게 있었다.
“이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원래 나를 싫어하지 않았나?”
“바뀌었습니다.”
간단하면서 명료한 말이었다. 그가 곧 들통날 이런 말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러면 그의 말마따나 바뀌었다는 단순한 정답이 맞을 터다.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지.”
청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에 입 하나 안 대고 조용히 일어났다.
“전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디로?”
“일단 스승님께 보고는 드려야죠. 원래 당신의 위치를 보고하는 게 제 임무였습니다. 운이 좋게 먼저 찾아서 이런 시간을 나눌 수 있었던 거고요.”
“그렇군.”
난 청진의 어깨를 툭 쳐줬다. 청진은 내가 그럴 줄 몰랐다는 듯 흠칫했다.
“곧 다시 보겠군. 목송이 여기를 온다는 이야기니까.”
“아뇨. 여기서 피하셔야 하니까요. 제가 방금 누구누구 오는지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들었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중진들이라고.
“난 근데 여기를 벗어날 수 없어.”
“···무엇 때문입니까?”
나는 웃었다.
“가족들이 쉬고 있거든.”
청진이 그 말에 벙졌다. 난 그리고 종이와 붓 하나를 꺼내들었다. 써서 보낼 서한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난 망신을 당하고 갈 거야.”
난 서한을 쓰며 말했다. 옆에 있던 청진은 그저 멍하게 날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