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끝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44화 끝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남궁세가는 납득할 수 없는 정황에 대하여 소명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황금세가가 책임을 물을 것이다.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
종이가 꾸깃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종이를 한 번에 구긴 건 남궁선우였다. 남궁선우가 손을 펴자 종이들은 가루가 되어 창문 바깥으로 흩날려갔다.
“이거 미친놈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남궁선우는 분노를 표했고, 남궁세가의 장로들 역시 분노하고 있었다. 물론 남궁선우는 남궁세가의 명예에 관해서는 일절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본인이 아는 금목환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분노를 표출한 건 장로들의 분노를 유발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굳이 그런 충동이 없더라도 장로들의 분노는 이미 끓어오르고 있었다.
분명 남궁세가가 경고를 했는데, 경고한 다음 날 이런 방이 붙은 거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금목환이라는 놈, 정말 간이 배밖으로 나온 녀석이군!”
“고작해야 오룡삼봉의 수위를 딴 것 가지고 오만하기는!”
“설마 그 친하다던 하북팽가, 무림맹, 해남파를 믿고 있는 것인가. 호가호위(狐假虎威)도 정도가 있지!”
그건 남궁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가 아니었다. 직계든, 방계든 모두가 남궁세가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막 떠오른 세가가 이렇게 시비를 거니 분노가 안 치밀어오를 수 없었다.
“지체할 것 없이 당장 방을 붙여야 합니다. 지금 모든 중원의 눈이 여기에 쏠려있습니다.”
“전 차라리 회전보다 침공이 낫다고 봅니다. 황금세가를 포함해 남창을 전부 짓밟아놓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리겠습니다.”
“황금세가가 돈으로 그렇게 많은 진법을 깔아놨다더군. 그걸 믿고 저러는 걸 수도 있어. 신중해야 하네.”
장로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남궁선우는 가만히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정파 사람들은 부추기기 쉬웠다.
마교가 작은 불을 만들어놓으면, 그 불을 가지고 이리 저리 옮겨가며 키우는 건 언제나 정파였다.
남궁선우는 한참동안 그들의 분노를 듣고 있다가 짐짓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확실하게 이겨야 하는 수를 쓰는 건 변함없소. 물론 황금세가는 우리에 비하면 별 것 없는 세가지만, 그렇다고 방심해서도 안 되오. 이빨이 다 빠진 호랑이였다지만, 형산파를 그렇게 쉽게 무너뜨렸으니.”
“···크음. 가주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남궁선우의 말에 장로들이 살짝 침착해졌다. 그들도 알고 있다. 설마, 만약에라도 그럴 일은 없지만 진다면 구파일방은 바로 신단회를 열어야 했다. 대놓고 세가끼리의 싸움에서 승패가 갈렸는데, 안 열 수가 없었다.
“그럼 일단 습격은 하지 말기로 하오. 괜히 수성전에 휘말려들면 우리만 골치 아프니까 말이오.”
“알겠습니다.”
남궁선우는 성난 말을 조련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들의 머리를 돌려놨다. 조금의 시간을 둔 후, 남궁선우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 생각에 회전을 하되,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소.”
“무엇입니까?”
“원로원의 도움을 받는 거요.”
남궁선우의 말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원로원···이요?”
“그분들이 도와주신다면 차후 세가에 개입하실 게 분명합니다!”
모든 세가나 문파에는 금분세수를 한 전대고수들을 모아놓는 원로원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남궁세가 원로원은 그야말로 남궁세가의 황금기를 보낸 세대였기에 아직도 고강한 무공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로들이 원로원을 반대하는 이유는, 원로원이 세가에 간섭하기 때문이었다.
장로회가 기를 써서 원로원과 세가를 분리시켰는데,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또 다른 잡음이 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소. 우리는 최대한 확실한 방법을 취해야 하오. 난 가주직을 내려놓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지금의 사태를 임하려 하오.”
남궁선우의 진중한 말에 회의가 한껏 엄숙해졌다. 가주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 자체가 형성이 되지 않았다.
“···그럼 원로원에 부탁을 해보겠습니다. 누구를 보내시렵니까?”
대장로, 남궁휘운이 물었다. 남궁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가겠소.”
“···그럼 그리하시지요.”
장로들은 남궁선우를 우러렀다. 그 원로원을 단독으로 간다니, 웬만한 간담으로는 힘든데 그것을 자원하는 거다. 물론 그게 가주의 역할이었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지금 갔다오겠소.”
남궁선우는 번쩍 일어나서 회의를 나갔다. 안 봐도 뻔하다. 회의실에는 자신을 찬양하는 말이 오갈 것이었다. 장로회는 자신이 꽉 잡아놓고 있었으니까.
사실 원로원과 세가를 분리한 것도 남궁선우의 교묘한 유도가 있었다. 장로회는 그걸 눈치도 못 챘지만.
이제 마지막 고비가 남아있었다. 그건 바로 원로원을 직접 설득하는 것이었다.
남궁선우는 세가에서도 가장 심처(深處)에 있는 원로원 앞에 섰다.
남궁선우 역시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원로원의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회를 부추긴 거고, 지금 상황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간단한 술수 아닌가.
원로원과 남궁선우의 사이는 처음부터 나쁘지 않았다. 원로원은 외동인 남궁선우를 금이야, 옥이야하고 키웠고 남궁선우도 원로원을 곧잘 따랐으니 말이다.
관계가 틀어진 건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 남궁진혁이 죽고 나서였다.
당연했다. 가주가 된 남궁선우는 원로원의 마음대로 움직여주기 않았기 때문이다. 가주가 된 이후로는 원로원을 찾아간 적이 없는데, 지금 들어가는 거였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
남궁선우가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벼락 같은 노성이 들려왔다. 원로들 역시 고수들. 남궁선우가 오는 건 진즉에 알고 있던 것이다.
남궁선우는 바로 그 앞에서 부복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아무리 원로원이라도 세상 일에 아예 귀를 닫고 있는 건 아니기에, 어느 정도 생략한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야 뒷방 늙은이들이 필요해졌다 이거군.”
“허허. 어떻게 세가를 다스리기에 마교라는 소리를 듣는고?”
“진혁이도 무심하지. 저런 망나니만 놔두고 세상을 떠나면 안 되는 것을.”
남궁선우는 가만히 무릎을 꿇어서 원로들의 말을 들었다. 가운데에는 남궁선우의 고모할머니가 아무말 없이 심유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로원주 남궁연화. 과거에는 려봉(麗鳳)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고, 과거에는 창천현녀(蒼天玄女)라는 별호를 가진 초고수. 남궁세가가 배출한 최고의 여류 고수가 그녀였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이제 피부가 쳐져 검은 눈동자만 남게 됐다. 그건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섬뜩함을 느끼게끔 했다.
“그만들 하거라. 여하튼 남궁세가가 모욕을 당한 건 맞으니까.”
남궁연화의 말에 모든 원로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계속 삐뚤빼뚤대는 입이 아직도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남궁연화의 말은 그토록 지엄했다.
“우리를 마교라고 한 자들이 형산파라고?”
“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황금세가입니다. 형산파는 이제 문파로서의 힘과 명예를 전부 잃었습니다.”
남궁선우의 대답에 뒤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남궁선우를 아니꼽게 보고 있는 장년의 남자는 격패검존(擊覇劍尊)이라 남궁현극이었다.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칠존 중 하나로 초절정 고수 중 하나였다.
“···고모님. 그것보다 우리가 어째서 마교 취급을 받는지에 대한 변(辨)이 필요해 보입니다.”
남궁현극이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당장 형산파 주변에서 마교도들의 물건이 발견됐으며 싸움 도중에도 마교의 간자들이 잡혔다고 합니다. 음양쌍려의 소식을 못 들으셨는지···”
“현극아.”
남궁연화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분노도 담겨있지 않고 담담했다.
“그럼 정말 저들이 말한대로 우리 세가가 마교라는 게냐?”
말투만 들어보면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지만, 남궁연화의 왜소한 몸에서 풍겨나오는 기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옛되고 고고한 정파의 세가가 지금 감히 마교라는 것이냐. 남궁연화는 그렇게 묻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궁현극은 말이 끊긴 이후로 어떤 말도 못하고 있었다.
원로원에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그 침묵을 깬 건 침묵의 장본인, 남궁연화였다.
“그 누구보다 정파를 수호해온 우리에게 마교라니, 그것만으로도 남궁세가를 지켜온 역대 조상님들을 모욕하는 발언이다. 너희들이 선우를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원로원이 나서야만 하는 문제구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우야.”
남궁선우는 조아리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이런 정파의 퀴퀴한 늙은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지겨웠던 찰나였다.
남궁선우가 머리를 들자마자 남궁연화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마치 바둑알 두 개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 남궁연화는 그렇게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삼십 년을 마교의 간자로 살았던 남궁선우의 간담도 서늘하게 할 정도였다.
그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보이는 듯했다.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꽂던 그때. 아버지, 남궁진혁의 믿을 수 없다는 눈.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피를 토하고 죽어버린 아버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궁연화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가보거라.”
그 말에 남궁선우는 퍼뜩 환상에서 깼다. 깨고 나니 등허리에 땀이 한가득이었다.
어느새 남궁연화는 자세를 뒤로 돌려 앉고 있었다.
다른 원로들의 악의 담긴 눈빛보다, 어떤 감정도 가지지 않은 남궁연화의 왜소한 등이 크게만 보였다.
남궁선우는 바로 일어나 원로원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어쨌든 원로원의 지지는 받았으니 결과는 좋은 셈이었다.
*
약선 화종도. 이제 백수(白壽)를 훌쩍 넘고 이십 해를 더 살았다. 이제는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쌓인 내공과 무공이 결려야 할 허리, 목, 어깨를 받치니 자연스레 죽을 수도 없게 됐다.
그렇게 살면서 어쩌다 삼선이라는 이름을 받게 됐고, 어느새 무림의 가장 최고 어른이 되어버렸다.
원체 그런 대접을 바란 것도 아니지만, 삼선 중 하나라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곳에서 존경을 표하고 우러러 봤다. 그래서일까. 화종도는 이제 본인이 그런 존경을 받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졌다.
이제 본인의 말은 본인의 말 이상으로 해석되고 분석되며, 본인의 행동은 본인의 행동 이상으로 해석되고 분석된다.
그랬어야 할 터다.
“끝났습니다.”
“응?”
“끝났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냉담하다기엔 차가움이 없고, 따뜻하다기엔 열이 없는 무채색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앞에서 목을 위로 뻣뻣이 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금목환이었다.
“아, 그래. 그렇구나.”
한유림, 팽차월, 금월상도 화종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종도가 알려준 건 별 것 아니었다. 검을 횡으로 한 번 벤 것뿐이었다. 느리게 말이다.
화종도의 무기는 정작 판관필과 옥침이지만, 만류귀종이라 검법을 못 가르칠 것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죠?”
금목환이 물었다. 화종도는 할 말이 없었다.
그 검법 자체에는 어떠한 의미도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베어주면, 많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약선의 내리그어지는 검에 가늠도 못할 현기가 담겨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한다. 그러면 검을 최대한 느리게 휘두르며 본인의 무공을 처음부터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그렇게 집중하여 처음부터 지금까지를 돌아보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방식이었다.
물론 전부가 깨달음을 얻는 건 아니지만, 깨달음을 못 얻은 사람들은 그러면서 계속 본인의 무공에 뭐가 잘못된 것인지 찾아보게 될 것이며 결국 깨달음에 이르게 될 터였다.
삼선 정도 되는 사람이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기연이었다. 화종도는 실제로 이 방법으로 천 명이 넘는 사람의 벽을 깨줬다.
근데, 이건 뭐란 말인가.
한유림과 팽차월, 금월상은 당연히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처음에 칼을 빼고 느리게 쳐내려갔다. 표정에는 의아함 하나 담겨있지 않고,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가득했다. 저런 눈빛을 가진 자들은 보통 깨달음을 얻는다. 화종도는 이렇게 세 명에게 기연을 주는구나, 뿌듯해 했지만 중앙에 있는 금목환 때문에 다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쇅.
금목환은 그냥 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어버린 거다.
그리고 눈치를 보던 다른 사람들도 그냥 그었고.
“···다르다.”
화종도는 오랜 생각 끝에 고개를 저었다. 금목환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혹시 권위에 기대어 대충··· 읍.”
“그리고 넌 따라와라.”
이와중에 눈치도 더럽게 빠른 금목환이 진실을 밝히기 직전, 화종도는 금목환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읍, 읍···”
“나머지는 다시 휘둘러봐라. 내가 휘두른 검하고, 너희가 휘두른 검은 명백히 다르니까 말이야.”
화종도는 그렇게 말하고 금목환의 입을 막은 채로 본원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역시 금목환에게는 특별 수업이 필요했다. 나머지 세 명은 멍하니 그걸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