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공허하냐고 물었다
142화 공허하냐고 물었다
오늘따라 당황한 사람들을 많이 보는 것 같다. 스승님을 비롯한 다른 어른들이 얼굴을 비치자, 형산파 사람들의 얼굴이 다들 사색이 됐다. 그리고 스승님을 비롯한 어른들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상황을 모르니 말이다.
난 그들을 위해 간단하게 정리해주기로 했다.
“형산파 장문인은 죽었고, 음양쌍려라는 것들도 죽었습니다. 아, 그런데 형산파 복장을 한 마교도들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형산파 사람들을 바라보자, 형산파 사람들은 내 눈을 피하기 바빴다.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일이라서,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려는 거다.
“음양쌍려를 죽였다고?”
대신 놀란 건 오히려 뒤에 있는 스승님을 비롯한 무리였다. 난 오늘 처음 들은 것이지만, 그들은 음양쌍려라는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네. 저기 있는 시체들이 음양쌍려라고 본인들을 칭하더군요.”
스승님은 물론, 적유엽, 화종도도 눈을 번쩍 떴다. 그들 셋은 바로 두 개의 머리를 둘러싸며 봤다. 유심히 보던 스승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야 용모파기밖에 본 적이 없으니. 근데 비슷하게 생긴 것 같군.”
적유엽이 혀를 차며 말했다. 허나 스승님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음양쌍려입니다. 남해 습격 때 봤던 얼굴 그대로군요.”
“그러면 진짜 저 꼬맹이가 음양쌍려를 혼자 잡았다고?”
화종도가 되물었다. 그 질문에는 스승님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 난지 모르니 말이다. 정황상 내가 죽인 게 맞지만, 그걸 못 믿는 것이었다.
대답이 나오지 않자, 화종도는 머리를 내 쪽으로 돌렸다.
“네가 정말 음양쌍려를 죽인 게 맞느냐?”
“네.”
그 말에는 화종도뿐 아니라 곽진도, 적유엽도 같이 장탄성을 내뱉었다.
“목환이가 이 정도 괴물이었군요.”
“···대단하구먼. 세가만 아니었으면 해남의 다음 장문인은 목환이었을 텐데.”
무림의 어르신 세 명이 놀라니까 새삼 음양쌍려라는 사람들이 유명했구나, 싶다. 형산파의 사람들도 음양쌍려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저들이 놀라는 건 내게는 다른 무게였다.
“음양쌍려가 좀 유명한 사람들이었나 보군요.”
“말이라고 하느냐···. 남해습격 때 수많은 고수들을 암살한 녀석들이다. 그때 당가주를 포함해서 많이들 돌아가셨지.”
그랬나. 난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날 놀라운 눈으로 바라봤다.
근데 그건 그거고. 여태까지 형산파 사람들의 반응은 애매모호했다. 싸우려면 싸우고, 아니려면 아니어야 하는데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싸우자니 삼선을 포함한 고수들이 있는데다가, 싸우지 않자니 눈앞에서 장문인을 격살한 적이 있는 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화종도는 목을 좌우로 한 번 돌렸다. 뚜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화종도는 형산파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나 좀 나와서 말 좀 하자. 나다 싶으면 말이야.”
잠깐의 정적 이후, 형산파 사람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곧 냉막한 표정의 사내가 사람들을 비집고 나왔다.
“마교도들은 전부 정리됐습니다. 자살을 해서 형체를 안 남기고 죽은 녀석들도 있지만, 온전히 남아있는 시체도 있습니다.”
난 그를 슬쩍 바라봤다. 허리춤의 매듭이 하나였다. 그러나 기도가 심상치 않았다. 사정이 있어서 숨긴 모양이었다. 내 기감도 약하지 않은데 내게서 벗어난 거다. 그것만으로도 한 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까지 들춰낼 생각은 없었지만, 뒤에 있던 화종도는 순식간에 그 앞으로 사뿐히 발을 딛었다. 한 줄기 바람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너, 누구냐? 왜 기척을 감추고 있지?”
화종도가 갑자기 가까워지자 주변 형산 사람들이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바로 그 사람을 중심으로 원형 공간이 생겼다. 당장 마교도들이 형산파로 위장해 습격한 게 어제 일도 아니고, 방금 전이다.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냉막한 표정의 남자는 손을 가슴쪽으로 넣었다. 옷 안에서부터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선배님까지 오실 줄은 몰랐군요.”
대충 예상은 했다. 인피면구 특유의 냉막한 표정도 있는데다가, 감추는 데 자신이 있었는지 인피면구도 대강 썼다. 자세히 보면 구레나룻 쪽이 울어있었으니까.
드러난 얼굴은 우뚝 솟은 콧대와 용 같은 눈을 가진 미중년이었다. 난 당연히 누군지 몰랐지만, 바로 주변에 있는 형산파 사람들에게서 반응이 왔다.
“···허억!”
형산파 사람들뿐인가. 곽진도와 적유엽, 심지어 정체를 밝히라고 한 화종도도 놀랐다.
“···운봉검, 자네인가?”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약선 선배님. 광랑검 선배님도 오랜만이군요. 천류유성검도 오랜만이야.”
운봉검이라. 난 그 별호를 들은 적이 있었다. 형산삼절 중 하나이자 최고수 중 하나. 그가 잠적하고 유동해라는 간자가 나타났고, 옹진수가 장문인으로 올라섰다. 그 정도만 알고 있었다. 아, 또 이름이 홍백규라는 것도.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건 그게 끝이었다.
당연히 형산파에 관심 없고 잠적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뜬금없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사, 사숙님을 뵙습니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형산파 사람들은 운봉검을 앞에 두고 바로 바짝 부복했다. 우리가 어떤 짓을 할 지 모르지만, 그건 몸에 붙어있는 예였다.
“됐다. 다들 일어서라.”
운봉검, 홍백규가 나지막한 소리를 했다. 그 조그마한 소리에도 정순하면서 거대한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드러난 것으로만 봐도, 옹진수보다 두 수 위의 내공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 옹진수는 주화입마에 걸리고 난 후의 기준이기에 본 실력으로 하면 비슷할 수 있었다.
“선배님들 앞에서 기척을 숨긴 점 죄송합니다.”
“···뭐, 왜 숨기고 있었지? 아니, 당최 강호에 다시 돌아온 건가?”
“아뇨. 오늘 처음 나온 겁니다. 형산파가 황금세가를 친다는 이야기를 듣고요.”
그 말에 분위기가 살짝 오묘해졌다. 계속 잠적을 하다가 황금세가를 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왔다라. 난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황금세가와 은원이 있으신지요. 단순히 형산파의 일원이라 나오신 건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 음, 은원이라. 은원이라면 은원이겠지.”
운봉검의 말에 분위기가 한껏 긴장이 됐다. 허나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강호에 출두하지도 않은 사람이랑 내가 무슨 은원이 있겠는가. 홍백규는 내가 이해 못할 걸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번에 자네에게 폐를 끼쳤던 홍문원이라고 있지 않나. 불행하지만 그게 내 자식놈일세.”
그 말에 주변이 전부 놀랐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형산파의 사람들도 놀라는 걸 보면, 그건 비밀이었던 것 같았다.
“원래 그 녀석이 반항이 좀 심해서 말이야. 하고 싶은 대로 좀 살거든. 그래서 내 가르침도 마다하고 형산 본산으로 내려가더니, 그 꼴로 죽을 줄은 몰랐지.”
홍백규는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나온 게야. 시신도 수습할 겸, 피해자인 자네도 좀 멀리서 볼 겸. 굉장히 훌륭한 무위를 가지고 있더군. 나도 보면서 감탄했다네.”
운봉검 홍백규의 자식이 홍문원이었다라. 당연히 난 그런 사실은 몰랐다. 평생을 같이 지내온 형산파 사람들도 모르는데, 내가 그걸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홍백규가 나온 것도 이해가 된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부자였다고 해도, 자식이 죽었으면 나오니까.
그러나 홍백규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홍문원은 안 죽었습니다.”
“···응?”
홍백규가 잠시 멈췄다. 형산파의 사람들도 벙졌다.
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얘기해주었다. 형산파의 하산금지를 풀기 위하여 홍문원을 죽였다고 발표한 것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홍백규는 그 말들을 들으며 시시각각 표정이 변해갔고, 형산파 사람들도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다 들은 홍백규는 침중한 표정으로 아랫입을 내밀었다.
“···그런가. 그렇군. 일단 알았네. 형산파 사람들은 내가 돌려보내지. 옹진수가 아니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형산파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나와 싸워야겠지. 나도 어찌됐든 형산의 사람인데 그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군요.”
“지금 당장은 우리가 열세기도 하니, 자네가 허락을 해줘야 우리가 회군을 하겠지만.”
홍백규가 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마교의 간자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 장문인의 시체를 망연하게 보는 사람들 등 형산파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홍백규가 날뛴다고 해도, 약선 한 명 선에서 전부 정리될 게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돌아가서 먼저 문파를 추스르시죠.”
“그래. 그럼 우리는 돌아가겠네. 그리고 형산파의 패배를 중원에 알린 다음, 남궁세가가 마교와 관련이 있다고 방을 붙이지.”
난 슬며시 웃었다. 마지막에 옹진수가 중얼거릴 때, 난 전음을 보내는 걸 알았다. 그건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게 홍백규에게 보내는 건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옹진수 역시 홍백규가 이곳에 참가한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홍백규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은 건, 마지막 남은 무인의 자존심이었던 걸까.
하긴 옹진수는 자신감이 강했다. 내가 들은 그의 마지막 유언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 네 신의를 믿는다.
원수인 내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옹진수는 그렇게 죽었다. 허나 내 신의를 믿는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옹진수가 황금세가에게 했던 행동들, 하려고 했던 것들은 의미 없었다. 그 순간은 진실이었고, 나 역시 신의를 지켜야만 했다.
“그게 형산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말이야.”
내가 옹진수에게 말한 건, 형산파의 보존이었다. 옹진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멸문을 시킬 명분은 없다. 당장 원래 생각도 멸문까지 시키면 좀 과할 것 같아 안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젠장. 괜히 따라와서 귀찮은 꼴만 맡게 됐군. 문원이 놈이 그렇게 명줄이 길 줄 몰랐는데.”
홍백규는 말하면서도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하긴 죽었다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걸 들으면 누구나 그럴 거였다. 관계가 어떻든 간에. 그게 가족이라는 거니까.
“나중에 한 번 찾아보겠네. 문원이 녀석은 형산파로 돌려보내주길 바라네. 내가 흠씬 혼낼 테니 말이야.”
“그러시죠.”
내 말에 홍백규는 손을 들어 형산파 사람들을 정리했다. 여기서 홍백규에게 저항할 배분은 아무도 없었고, 형산파 사람들은 우리의 눈도 못 마주치고 돌아갔다.
나는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았다. 스승님, 적유엽, 화종도도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운봉검이라. 강호가 혼란하기는 한가보군. 저 고집 센 놈을 강호에 나오게 하다니 말이야.”
화종도가 말했다. 홍백규의 얼굴은 곽진도보다 어려 보였지만, 말하는 걸 보면 적어도 종리운과 팽의석 배분 사이로 보였다. 하긴 형산파에서 업무를 안 보고 무공만 닦았다면 충분히 더 한계를 깼을 터다.
남아있는 시체들을 봤다. 형산파의 사람들은 자신 문파의 사람, 옹진수를 포함한 유해들만 거두어 갔다. 마교도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우리가 거둬야 했다.
퍽 질긴 형산파와의 은원이, 오늘로서 끝났다. 난 내 스스로에게 공허하냐고 물었다.
“비가 그치는구나.”
스승님이 말했다. 난 스스로 대답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니 공허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