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받든, 안 받든
138화 받든, 안 받든
“가자, 가자!”
누가 지금 형산이 공격 나올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당장 며칠 전 황금세가의 연회에서 온갖 명숙들이 모였다고 한다.
아직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달려 나간다. 허리춤에 무게감 있는 검을 차고 나니 이제야 머리에 핏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래도 마중을 나올 것이다. 경계를 계속 하고 있도록.”
확실히 옹진수는 현재 제정신이었다. 황금세가는 현재 수성을 할 수 없는 상태다. 자신들이 뱉어놓은 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중원의 무가라면 알 것이다. 선전포고를 한 측이 수비를 하는 건 굴욕적인 것이라는 걸.
제정신인 옹진수도 형산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건 동의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의 형산파에 대한 인식이 바닥날 거고, 소림사를 비롯한 명가들이 형산파를 조사하러 올 것이다.
누가 마교인지는, 지금 상황에서 알 수 없었다. 또 지금 우리가 외친다고 한들 누가 믿어주겠는가. 결국 형산은 뒤를 돌아볼 수 없이 나와야 했다.
“흐흐.”
옹진수가 문득 웃었다. 그래, 이렇게 검과 피가 날아다니는 전장으로 달려가는 게 언제였던가. 형산파 장문인을 맡은 뒤로는 정치나 말만 했지, 정작 검을 휘둘러본 적이 어디 있던가. 고작해야 제자들과 훈육을 위한 비무밖에 더 있던가.
정강산(井崗山)을 지나고 있었다. 이대로 태화(泰和), 길안(吉安)의 관도를 쭉 따라가, 장수(樟樹)를 통과하면 남창이다.
분대는 정강산의 하산 방향을 달리해, 안복(安福)의 관도를 지날 터다.
그렇게 정강산을 하산하려 할 때, 앞에서 검은 인영이 밤의 늑대처럼 휙 앞으로 나왔다. 맨 앞에 서있던 옹진수는 바로 멈췄고, 형산의 이백 제자는 일시에 멈췄다.
검은색 피풍의를 입고 있는 사내는 눈만 드러내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딱 봐도 용건이 있어 보였다.
“누구냐.”
옹진수가 물었다. 피풍의 사내는 조용히 있다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옹진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전음이었다.
“장문인은 지금 싸움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피풍의 사내가 말한 건 그것이었다. 옹진수는 눈을 부라렸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무슨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인지.
“칼을 대보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게 중원 아닌가.”
옹진수는 피풍의 사내와 같이 전음을 날렸다. 대기가 떨리는 걸 느낀 제자들은 그제야 이 고수들이 전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제자들은 순간 긴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 피풍의의 남자가 내공을 다루는 데 더 익숙한 것이다. 피풍의 남자도 전음을 썼을 텐데 대기가 떨리는 게 보이지 않았다면, 옹진수는 보였기 때문이다. 옹진수도 그걸 알아챈 듯 표정이 엄중해졌다.
“제안할 게 있소.”
“아니. 난 네놈의 정체부터 들어야겠다.”
이제부터는 피풍의 남자와 옹진수 둘만의 대화였다. 옹진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당장 이 녀석이 무공이 고강한 놈이라고 해도, 뒤에 있는 형산파의 제자들은 허수아비들이 아니다. 뒤에 제자 중 옹진수보다 강한 초절정 고수들도 많았다.
“난 이호라고 하오.”
“이호?”
옹진수는 표정을 찡그렸다. 딱 봐도 구린 냄새가 진동하는 이름이었다. 이렇게 계속 정체를 가리려고 하면 그냥 무시하고 가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호의 다음 말 때문에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왔소.”
옹진수가 눈을 번쩍 떴다. 바로 살기가 흘러나왔다. 지금 이 지경을 만든 두 가문 중 하나가 아닌가.
“무슨 낯짝으로 왔지?”
“말했잖소. 제안을 하러 왔다고.”
옹진수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자신이 미쳐있는 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분노하면 가끔 환각이 보이기도 했다.
“전에 하나만 물어보지. 남궁세가는 마교요?”
“우스운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이호의 말에 옹진수는 큭, 하고 웃었다. 정말 의미 없는 질문이기는 했다. 저게 거짓인지, 진실인지 당연히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추궁할 꼬리는 남아있었다.
“어쨌든 남궁세가에서 준 무기가 마교의 것임이 드러나지 않았나.”
“글쎄. 중간에 검이 바꿔쳐졌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래, 제안할 건 뭐지?”
옹진수가 씁쓸하게 물었다. 어쨌든 남궁세가의 제안은 들어볼 가치가 있었다.
또 여기서 남궁세가로 기수를 여기서 돌릴 이유가 없다. 황금세가나 남궁세가나 찢어죽일 놈들이고, 남궁세가는 형산파보다 강할 게 분명했다. 황금세가는 말만 무성할 뿐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당장 오룡삼봉의 세 명을 배출해냈다는 건 엄청난 업적이지만, 중요한 건 세가의 최고수는 누구고, 절정고수와 초절정고수는 몇 명이나 있냐는 거다.
아직도 최고수가 곽진도 하나뿐이라면. 초절정 다섯 명을 붙이면 할 만했다.
“모든 건 황금세가의 계략과 함정이었다고 방을 붙이고, 형산파의 현판을 내리시오.”
옹진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전음으로 되물었다.
“돌아오는 건 뭐지?”
“장문인 만큼은 우리가 신원을 바꿔 남은 여생 평탄하게 살 수 있게 해주리다. 농사를 짓고 싶으면 농사를 지어도 되고, 물고기를 잡고 싶으면 물고기를 잡아도 되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요.”
옹진수는 이호가 말하는 도중부터 큭큭, 웃었다. 그의 눈에 벌써 불이 붙고 있었다. 허나 이호는 옹진수를 처음 보니 그런 기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아주 끝까지 빨아먹으려고 하는군.”
“당신에겐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하오.”
옹진수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그 노구가 이호 앞으로 간 건 눈 깜짝할 새였다. 옹진수는 커다란 대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쿵!
옹진수는 이호 앞에 있는 땅을 크게 밟았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휘둘러진 검강에 주변 나무들이 썰려서 넘어갔다. 다만, 이호는 뒤로 이미 멀찍이 물러나있었다. 확실히 옹진수보다 무공이 고강한 것이었다.
“당신의 대답은 알겠소.”
이호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궁세가가 마교인지, 아닌지에 대한 대답은 당신의 믿음 속에 있다오.”
이호의 목소리가 정강산 봉우리 전체를 울렸다. 육합전성으로 처음 목소리를 낸 것이다.
“죽어라, 이 개자식!”
마지막까지 조롱을 하는 이호에게, 옹진수와 형산파의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호는 콩알과 비슷한 크기의 물체를 바닥에 던졌다. 안개가 펼쳐졌고, 그 안에서는 기감도 펼쳐지지 않았다. 산공독을 섞은 안개인 것 같았다. 이호는 그렇게 사라졌다.
“하하.”
그 안개에서 빠져나온 옹진수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늘 느끼는 거지만,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황금세가까지 행군은 계속 됐다. 태화에 내려오자 먹구름이 꼈다. 그 구름은 비를 계속 머금어서 무거워진 듯 땅을 향해 뭉툭하게 튀어나온 것 같았다.
비가 내렸다. 어차피 고수들이라서 비에 젖을 일은 없었다. 다만, 비오는 이 와중에 관도를 우루루 몰려가는 게 처량했다.
젖은 흙에서 비린내가 났다. 아직은 줄기가 연약했던 것 같은 꽃의 허리가 꺾여 머리를 쳐박았다. 어째 옹진수가 보는 광경들은 야속하게도 처참하기만 했다.
비는 계속, 계속 쏟아졌다. 하늘이 열린 것만 같았다. 태화에서 길안으로 가는 관도. 물결처럼 형성된 지형이 있었다.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가면 더 큰 언덕이 있는 요상한 지형이었다.
그리고 그 제일 큰 언덕 끝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남색 피풍의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형산파의 사람들은 흠칫했지만, 옹진수는 말없이 쭉 갔다. 마치 그 사람이 없는 듯. 그 사람도 딱히 움직일 생각은 없는 듯 언덕 위에서 팔을 늘어뜨린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비가 그의 몸에 묻기 전에 튕기는 게 보였다.
이제 옹진수는 피풍의의 사람하고 열 걸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 사람과 다른 점은 피풍의 색만은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이호라는 녀석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여기 이 사람은 얼굴을 안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가 마중 나와 주다니. 이토록 영광스러울 수가.”
옹진수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그야말로 함박웃음이었다. 언덕 끝에서 조용히 형산파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이었다.
시간은 한낮이었지만 구름이 잔뜩 껴 어두웠다. 그럼에도 금목환의 하얀 피부와 조각 같은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올려다보니 마치 신을 모시는 어린 사자(使者)처럼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장문인.”
형산파의 무사들이 검병에 손을 댔다. 당연히 이제 그들도 금목환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적의 수장이 나타났으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주다니,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대화만 들었다면 친근한 주인과 손님이라고 착각했을 터다. 허나 옹진수의 우수(右手)는 간지럽다는 듯 도통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제안할 게 있습니다.”
바로 검을 뽑으려던 찰나. 금목환이 말했다. 옹진수가 픽 웃었다.
“아주, 둘이서 지랄을 하는구나.”
“남궁세가가 먼저 왔었나보군요.”
“그래. 별 병신 같은 제안을 하기에 당장 꺼지라고 했지.”
“그랬군요.”
궁금할 게 분명함에도 금목환은 그것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역시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 나이에 어찌 저리 맑은 명경지수를 가지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자네의 제안은 무엇인가?”
옹진수는 검을 꺼냈다. 일종의 대답이었지만, 금목환은 칼은 보지도 못한 듯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제자를 돌려서 남궁세가가 마교라는 방을 중원에 전부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옹진수는 금목환의 제안과 상관없이 바로 베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재미있지 않은가. 둘 다 똑같은 제안을 하다니. 이로써 하나는 밝혀졌다.
이들 둘이 같은 편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자네는 마교도인가?”
“아뇨. 남궁세가에 마교도들이 있을 겁니다.”
성실한 대답이었다. 옹진수는 이호의 말을 떠올렸다. 믿음 안에 정답이 있다는 것. 황금세가가 마교인지, 아닌지도 저 대답에 걸려있는 게 아닌 자신의 생각에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제 누가 마교인지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냥 베어버리고 싶을 뿐이다. 전신에 개미가 기어가는 듯 부르르 떨린다. 빨리 피육을 가르는 이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도, 마지막이다. 한 마디 정도는 더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나마 이것도 금목환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기다려주는 거였다. 전음을 써서 말하던 이호보다, 금목환처럼 당당히 말하는 게 나았다.
“그럼 돌아오는 건 뭔가?”
금목환은, 이호와 달리 마지막 말에서 전음을 썼다. 옹진수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면서 크게 광소했다.
웃음소리가 관도를 전부 메웠다. 그 웃음에는 처절함, 유쾌함이 동시에 담겨있었다.
“내가 강호에 출도한 이후, 가장 모욕적인 제안이구나! 남궁세가보다 더한 제안이야!”
“그럼 안 받으시는 건가요?”
“말이라고 하나? 깔끔하게 무인으로 죽는 게 낫지.”
옹진수가 칼등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이미 형산파의 제자들 모두 눈을 불태우며 적의 수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목환은 고개를 낮게 숙이더니, 몸을 언덕 아래방향으로 살짝 숙였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곧 금목환의 손이 움직여 검병에 닿았다. 완전한 발검 자세였다. 손끝이 검병에 닿자마자, 옹진수를 포함한 모든 형산파의 사람들은 느꼈다. 숨이 막혀올 것만 같은 압박감을 말이다.
“이 제안을 받든, 안 받든 당신은 제 손에 죽을 것입니다.”
다시 옹진수의 입이 귀에 걸렸다. 금목환은 일자로 입술을 닫은 채 옹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호랑이의 멈춰진 눈빛이었다.
순식간에 관도 주변의 진흙들이 터지며 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