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과하게 느껴지지 않다
134화 과하게 느껴지지 않다
합비의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풍요로운 땅, 안휘의 성도에는 빈 거리마다 싸늘한 바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보통 성도는 그 성을 대표하는 문파 및 세가와 기운을 같이한다.
남궁세가가 풍요로우면 안휘도 풍요롭게 되기 마련이고, 남궁세가가 안온하면 안휘도 안온하고, 남궁세가가 조용하면 안휘도 조용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무공을 안 익힌다고 해도, 본능은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남궁세가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합비의 사람들이 눈치 채고 사리고 다니는 것이다.
가주의 기분이 안 좋으면 세가원들은 불안에 떨게 되고, 그렇게 불안해진 무사한테 목이 날아가는 것만큼 개죽음은 없기 때문이다.
“근데 가주는 언제 나온대?”
“몰라. 용봉지회에 돌아와서는 계속 칩거하고 있다니까.”
“내가 남궁세가 본가 무인을 아는데, 세가 분위기가 그렇게 음험하다는군.”
흉흉한 분위기의 근원,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선우는 현재 낙양에서 돌아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합비가 조용한만큼, 남궁세가 주변은 어둡고, 남궁세가의 본원은 싸늘했다.
사람들은 용봉지회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아니냐, 구파일방과 충돌이 있지 않았겠느냐 추측성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그 무엇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생각에 남궁세가는 대단하고 완벽한 사람이었다. 남궁선우의 나이는 이제 불혹 안팎이었지만 이미 칠존, 십왕과 무력을 나란히 할 정도라고 했다. 지금 칠존과 십왕의 나이대가 지천명에서 칠순을 오가는 나이라고 하면, 굉장한 기재인 것이다.
나중에 삼선의 일원이 되어 중원 정파의 온갖 존경을 받게 될 게 분명한 사람이 마교의 간자일 거라고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푸르륵.
머리를 터는 새 앞에는 서한을 읽고 있는 남궁선우가 있었다.
- 형산파의 하산 금지가 풀렸습니다. 지금 호북의 의창(宜昌)을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형산에 도착하려면 이틀은 걸릴 겁니다. 저희는 모두 준비 완료했으며, 명령의 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궁선우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계속 서한을 뒤로 넘겼다.
형산파에게 마교라고 뒤집어씌우는 작업에 관련한 서한이었다. 이제 명령만 하면 형산파는 빼도 박도 못하게 마교로 취급받을 거다. 마교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형산 근처에 쥐덫마냥 뿌려놨으니 말이다.
좋은 소식이었지만 입이 씁씁한 것은, 생각보다 준비가 늦게 끝났기 때문일 거다.
그 이유는 황금세가가 형산파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변수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건 남궁세가 입장에서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형산파가 처분되는 건 좋다지만, 그건 본인들의 의지 하에 처분되어야 맞았다.
“어쩌면 소천마님과 대등할 지도.”
이제는 남궁선우도 금목환을 단순한 꼬맹이로 보지 않았다.
어쨌든 황금세가와 형산파는 한 판 붙을 게 분명해졌다. 그 싸움은 황금세가가 이길 게 분명했다.
당장 황금세가 주변에 붙어있는 우호 세력들만 몇 개인가. 해남파, 하북팽가, 무림맹.
하북팽가야 멀어서 지원이 힘들다고 해도, 해남파와 무림맹은 직접 지원이 가능한 정도다.
반면 형산파는 어떤지. 구파일방에 근접할 때는 많은 명문 문파들과 교류를 나눴지만, 봉문 이후에는 아무도 손을 건네지 않고 있지 않은가.
“심계를 포함하면 소천마님보다 더 낫겠는걸.”
남궁선우는 곧바로 평가를 수정했다. 형산파에게 선전포고한 것은 정말 기가 막힌 전략이었다.
이빨이 다 빠졌지만, 이름은 남아있는 형산파는 모두에게 지금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형산파의 명예는 그대로 삼킬 수 있으니까.
당장 종남파는 형산파에게 문파를 팔라며 회유를 시도하지 않았는가. 옹진수가 쌍욕을 하면서 거부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근데 황금세가가 선전포고를 한 이상, 모두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황금세가가 은원이 확실하니까.
오룡삼봉도 오룡삼봉이지만, 결국 중요한 건 역사다. 황금세가가 형산파를 삼킨다면, 그 부족한 역사를 어느 정도 메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그렇지?”
“맞습니다.”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이호가 답했다. 이렇게 황금세가가 형산파를 집어삼킨다면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골치 아파질 것이다.
남궁선우의 전략은 양동이었다. 형산파를 마교라고 부채질해서 고립시키면서도, 암살자를 형산의 사람으로 위장시켜 금목환을 죽일 생각이었다.
“본산에선 누굴 보냈지?”
“음양쌍려(陰陽雙戾)입니다.”
“오, 괜찮은데.”
남궁선우가 이 일을 중하게 여긴다니, 본산에서 그걸 받아준 듯했다. 음양쌍려라면 같은 마교인 남궁선우도 꺼릴 정도로 지독한 수를 쓰는 놈들이었다. 암살을 하기에는 최적의 무공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 형산파 멸문은 예정된 일이니, 금목환의 주살에 주력하라.
남궁선우는 간단하게 답서를 쓰고 새의 다리에 묶었다. 새는 다리에 무언가가 느껴지자 바로 솟구쳐 높이 날았다. 새는 바로 구름 뒤로 감춰졌다.
저 정도로는 높이 날아야 모두에게도 들키지 않고 천산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
황금세가는 아마 중원에서 가장 큰 장원을 가지고 있을 거다. 외원으로만 장원을 한정해도 다른 문파들과 비할 수 없을 거다.
근데, 저 사람들의 밀집도는 뭐란 말인가.
“저러다 사람이 깔려죽는 건 아닐까요.”
“깔려죽으면 우리 세가의 무인이 될 자격도 안 되는 거지.”
“냉혹하군요.”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구나.”
금화청과 나는 차를 마시면서 황금세가에 지원을 한 무인들을 둘러봤다. 명성을 올렸으니 그에 걸맞는 덩치를 키워야 했다.
원래 세가는 보통 직계와 방계로 이루어져있고, 사위도 데릴사위로 들이는 둥 보안이 철저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무인이 되고 싶으면 일단 오라는 방문을 강서 전체에 붙였기 때문이다.
“흑저(黑猪)도 우리 황금세가에 지원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꽤 유명한 낭인 아닙니까?”
“권법과 각법의 달인이라고들 하지. 하긴 낭인들 중에 돌아다니고 싶어 돌아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내가 알기로 흑저는 포달랍궁에서 도망쳐 나온 낭인이었다.
흑저를 포함한 다른 낭인들에게도 황금세가의 지원은 매혹적이었을 테다.
당장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처럼 출신성분을 많이 따지는 것도 아니며, 그에 더한 복지와 보수를 받으니 말이다.
“이러니까 남창이 황금세가 같군요.”
“맞아. 실제로 남창 칠 할의 땅은 우리 세가 소유다.”
“그렇게나 됐나요.”
“억지로 팔라고 협박한 건 아니야.”
“그렇겠죠.”
그야말로 문전성시. 금화청은 교묘하게도 우리가 돌아올 때쯤에 무인들을 받았고, 우리의 화려한 귀환은 무인들이 지원할 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쳤을 거다.
“아버지는 어떠신가요.”
금화청이 흠칫했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금화청은 고민하는 듯 말했다.
“식사는 같이 하게 됐다. 원래 우리가 점심을 같이 먹지 않느냐.”
“대화는 아직 안 하시고요?”
“응.”
더 듣다 보니 금화청의 내정이 날카로운 건 아버지의 몫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도 내정 몇 가지를 맡아서 하신다니까.
그리고 의견을 교환해야 할 상황이 오면 서로 서신을 나눈다고 한다. 아주 귀찮은 방법일 텐데, 그들에게는 그게 편할 터다. 아직은.
“이제 피의 응징을 할 시간이냐?”
금화청이 말했다. 살짝 웃음을 참는 듯했다.
우리에게는 참 낯선 단어가 아닐 수 없다. 피의 응징이라. 상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입에 담아보지도 못할 거다.
“그래야죠. 피의 응징.”
“이제 형산파가 막 형산에 들어왔다고 하는구나. 언제 출발할 거냐?”
“시간은 좀 줘야죠. 저희 문파를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요.”
일단 저 무인들을 추리는 데도 한 세월이 걸릴 거다. 저들에게 줄 무공들도 하나 만들어볼까, 생각도 된다. 명성을 높이는 건 크게 실감이 안 났지만, 그에 뒤따라오는 물적인 확장의 규모는 나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제 나 혼자 주장했던 황금세가 가주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게가 지워진 것만 같았다.
“그러면 넌 좀 쉴 거냐?”
“아뇨.”
금화청은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도 안 쉬시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버지가 일하고 나면서부터는 좀 쉬었다. 한 이틀?”
“많이 쉬셨네요.”
금화청이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였다. 나도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럼 너는 뭐할 거냐?”
“저들이 황금세가를 강서의 대표 자리로 이끌었으니, 대표의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표의 행동이라.”
나는 강서를 좀 돌아다니면서 관도를 좀 정비할까 했으나, 금화청은 아예 다른 생각인 모양이었다. 지금까지는 남창에 또아리를 틀던 황금세가가 아니었다. 강서에 손아귀를 뻗칠 차례였다.
“그렇지. 그런 대표의 행동이 중요하지.”
“그럼 관련해서 중명각 한 번 들르겠습니다. 보고 받을 게 많기도 했고요.”
“안 된다.”
난 그렇게 말하고 바로 나가려고 했지만, 금화청이 한 뜻밖의 언사에 발걸음을 멈췄다.
“네?”
“안 된다고. 너 지금 내가 세가 내에서 어떤 직위를 맡고 있는지 아느냐?”
“모르죠.”
직계들은 자기가 원하는 직위를 만들어서 맡고 있을 테니까,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대전 전주, 황금세가 외원주, 중원상인협회 회장, 광주 서역교역 총책임자···”
금화청이 가진 직위는 참으로 많기도 했다. 내정을 하려면 저렇게 귀찮은 직함을 모두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금화청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줄줄이 나오는 금화청의 직위 마지막에 방점은 이렇게 찍어졌다.
“황금세가 가주 보좌.”
나는 눈을 끔뻑였다. 금화청은 자신의 책상에서 종이 하나를 들어 내 앞에서 펄럭였다.
- 황금세가 가주 보좌직에 임명함. 황금세가 가주 대리. 금화청.
정말 합리적인 임명장이었다. 내가 그걸 멍하니 보고 있자 금화청은 말을 이었다.
“넌 쉬어야 된다. 그리고 그게 지금 네 가주로서의 역할이다. 넌 바깥의 책임만 보는 구나. 안의 책임도 지어야지.”
금화청이 타이르듯 말했다. 난 그러면 무슨 계획이 있냐고 되물었지만,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만 듣고 본원으로 돌아왔다.
본원 앞에는 기철이 정자세로 서있었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 후부터 쭉 서있던 걸 테다.
“자세 풀어.”
내가 말했지만, 기철은 풀지 않았다.
“본가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기철은 말했다.
“가주님.”
왜일까. 난 사실 지금까지 오 년이라는 세월을 느끼지 못했는데, 기철의 모습에 그제야 시간이 지난 걸 실감했다. 전생의 소심했던 내 어린 모습, 과거의 열심히 살았던 내 어린 모습, 그리고 분명 없었던 천진했던 내 모습까지 보였다.
나는 묘한 감정에 이끌려 기철을 따라 내 방에 들어왔다. 기철은 잠시 나갔다. 곧 향긋한 차 냄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차 냄새가 구수한 걸 봤을 때 군산 은침이었다.
언제 찻잎은 우린 건지, 대단한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차 우리는 데 천하제일인을 가리자면 아마 기철이가 아닐까.
나는 방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나의 방이었다. 주홍색 노을이 방을 가득 채웠다. 의자에 달려있는 용과 금장이 노을에 받아 번쩍번쩍 빛이 난다.
난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조각들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