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많은 걸 배웠습니다
133화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제 걸 보시려면, 약선님도 하나를 보여주셔야 할 겁니다.”
화종도는 그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이 꼬마 가주가 뭐라고 한 걸까? 정말 세이경청을 하고 다시 듣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름 아닌 삼선 중 일인, 약선의 가르침이다. 가르침을 주겠다는데 저런 말을 뱉는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저번부터 살짝 느낀 거지만, 금목환은 강호의 예의가 묘하게 떨어졌다. 뭔가 흉내를 내고 있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하는 건 아닌 느낌. 애초에 무표정이니까 뭐가 진심이고 아닌지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보여드리겠습니다.”
금목환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검을 휘둘렀다. 마치 약선의 것을 아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검수의 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하얗고 고운 손이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작은 검도 그에 따라 그어지는데, 당연히 손의 동심원보다 컸다.
금월상, 팽차월, 한유림의 검에서 독자적으로 흘러나오던 기가 금목환의 검으로 휘말리듯 빨려갔다. 그들의 기는 금목환의 기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미약해보였다.
고오오···
대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를 터뜨리지 않아서 고작 이 정도라는 것이었다.
“···허어.”
금월상이 탄성을 내질렀다. 한유림과 팽차월도 커다란 눈이 된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이제 훌륭한 무인들이다. 해석할 수 없는 현묘함이라는 게 어떤 의미라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금목환은 검격을 하나둘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금월상과 한유림, 팽차월은 뒤로 물러났다. 금목환이 펼치는 검법의 범위가 너무 넓은 것이다.
검으로 바닥을 쓰는 것이 마치 커다란 물이 시전자, 금목환을 중심으로 회오리를 치는 것 같고, 올려칠 때는 용오름, 내려칠 때는 벼락이었다.
만천조종검의 세 번째 초식까지 연달아 펼쳐낸 것이다. 첫 초식, 대라회연, 두 번째 초식은 태경용출(太鯨湧出), 세 번째는 만천앙복(萬川仰伏).
기를 뿜어낸 것도 아닌데 거대한 공기의 흐름이 금목환의 검에 꿰인 듯 이리저리 휘날렸다.
그리고 금목환은 검을 조심스레 납검했다. 납검하면서 긴장되었던 대기가 풀렸다.
“허.”
화종도가 탄성을 내뱉었다. 훌륭한 무공이 아니던가. 대양(大洋)을 담은 게 해남의 무공인 것 같았지만, 저런 무공은 당최 본 적이 없었다.
“네 스승이 누구냐?”
화종도가 물었다. 금목환은 바로 대답했다.
“곽진도 사부님께 사사했습니다.”
“···그래?”
천류유성검이라. 남해삼객이라고 들어본 적은 있다. 그러나 약선은 최소 스승이 칠존 급은 된다고 생각했기에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곽진도도 중원의 알아주는 고수인데도, 화종도에게는 그 정도에 그쳤다.
“이제 보여주시지요.”
화종도는 문득 그 말에 머리를 번쩍 들었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금목환이 목을 뻣뻣이 치켜들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화종도는 묘하게 흑도한테 삥을 뜯기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그래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런 느낌과 비슷할 것 같았다. 훌륭한 검을 보기는 했지만, 바로 내놓으라니.
허나 화종도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본인의 무공은 한 번 보여준들 따라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한 번 본다고 따라할 수 있으면 모두가 삼선이고 칠존, 십왕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삼선 중 약선의 무공이다. 나머지 이선. 검선 오유해는 만병지왕인 검을 쓰고, 만리유유선(萬里流流仙) 소취악은 장법과 권법을 쓴다.
대개 대중적으로 쓰이는 무공의 갈래를 택하는 그들과 달리, 약선은 특이하게도 판관필과 침이 주 무기였다.
“그럼, 잘 지켜보거라.”
금목환을 비롯한 금월상, 한유림, 팽차월의 눈이 빛났다. 화종도는 그들의 앞에서 독문무공, 괴해필법(壞骸筆法)을 펼쳐나갔다.
약선은 그야말로 인체, 혈자리의 달인. 필법 하나로 뼈를 뭉개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휘두른 초식만으로도 몇 백 명은 거뜬히 죽이고 남았을 잔혹한 필법이 연노란 햇빛이 마루를 넘은 장원에서 유유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오.”
화종도의 특이하고도 화려한 움직임에 금목환이 탄성을 내뱉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화종도는 그 탄성에 뭔가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다음에는 저런 꼬마에게 인정받아서 좋아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곧 화종도의 필법이 횡으로 중선(中線)을 깔끔하게 내리그으며 무공 시연이 끝났다.
“방금 내가 펼친 건 괴해필법이다. 원래는 내가 했던 대로 판관필로 펼쳐야 하지만, 만류귀종이라. 다른 무공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을 너희도 필시 알 것이다.”
화종도는 아이들을 둘러봤다.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무공을 펼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가르침은 가르침이니 가벼이 대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금월상과 한유림, 팽차월이 잠깐 시현한 무공에서 화종도는 그들이 부족한 걸 눈치 챘다. 그래서 최대한 그들에게 필요한 초식을 과장되게 펼쳐주었다. 이제 깨달음을 얻는 건 그들의 몫이었다.
그때 금목환이 금월상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휘저어보였다. 금월상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금목환은 옆으로 몸을 틀어 한유림, 팽차월에게도 손바닥을 흔들었다.
‘···허! 다들 오성들이 대단하구나!’
화종도가 감탄했다. 무공에 있어서 재능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리라. 둔재는 백 개를 가르쳐야 하나를 알고, 범재는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알고, 수재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고작 하나만 깨달았다고 저리 깊숙하게 생각의 심연에 빠져있지는 않으리라. 이들은 전부 수재인 것이다.
“다 가르쳐볼만한 재능이구나.”
“훌륭하죠.”
화종도의 감탄에 금목환이 맞받았다. 자연스레 화종도가 우측으로, 금목환이 좌측으로 가서 소리와 대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기막을 펼쳤다. 호법을 서는 것이었다.
“근데 너는 뭐 안 깨우쳤냐?”
화종도가 물었다. 다른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이지만, 제일 궁금한 건 역시 금목환이었다.
당연히 집중 상태에 있는 아이들에게 영향이 닿지 않도록 음을 조절했다. 금목환도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조절하며 대답했다.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래?”
뭔가 미심쩍고 찝찝한 대답이었다. 보통 깨달음이라면 집중을 하고 순도 높은 진원지기를 회전시키는 것이 아니던가. 근데 금목환은 깨달았다면서 그렇게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게 없었다.
“정말? 뭐를 배웠는데?”
“일단 투척법에 대한 걸 배웠습니다.”
“투척?”
화종도가 되물었다. 너무 광범위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무언가를 던진다는 얘기였다. 근데 무언가를 던진다는 거에 방법이 있는가? 물론 더 강하게 던지는 방법은 있겠지만,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애매하다.
근데 지금 금목환은 투척 자체를 배웠다고 하니 어찌 보면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약선께서 전각을 부쉈을 때 날렸던 침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저는 굉장한 공력을 느꼈습니다. 그 공력은 놀랍게도 좁쌀보다도 작은 극(極)에 모여 있더군요. 그 방법론에 대해서 지금껏 생각했었는데, 방금 약선님의 무공을 보니 알 것 같습니다. 진기를 이렇게 돌려야 한다는 걸요.”
금목환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허리부터 어깨, 어깨부터 팔뚝을 휘감아 내려오듯 그었다. 얼핏 대충 보이는 손짓이었지만 화종도는 그것이 정확히 맥을 짚고 경맥에 따르는 움직임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
“그리고 말입니다. 또 아까의 움직임에서는···”
금목환은 계속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을 이어나갔다.
“···아, 근데 중간에 이런 게 있었군요. 그렇다면 이 중과 변의 묘리를 합치면 일기(一技)에 천변만화(千變萬化)가 깃들고, 변화 속에 태극(太極)이 생기니···”
세 명의 호법을 서고 있기에 기를 발출할 수도 없었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하고 있을 뿐이지만 금목환의 눈이 어느새 손가락 끝에 완전히 붙어 같이 움직였다. 본인의 말에 본인이 몰입하는 것이었다.
화종도는 금목환 머리맡에서 뭔가가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건 화지장개에 이은 개화한 한 송이 꽃이었다. 그 꽃은 눈이 부실듯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꽃은 더 이상 사람이 쳐다보지 못할 빛을 내뿜더니 유리가 깨지듯 파편을 남기며 깨졌다. 다시 보니 금목환의 머리맡에는 황금색 테두리가 휘휘 돌고 있었다.
“···야, 야!”
화종도는 멍하니 그걸 보다가 금목환에게 소리를 죽여 외쳤다. 지금 저런 밀도 있는 기를 발출하면 아이들이 망가지지 않겠는가.
“괜찮습니다. 제가 제 사람들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눈은 멍했지만 금목환은 똑바로 발음해서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백색 기에서는 황금빛 줄기가 약하게 깃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기와 어울리고 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몰입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듯했다.
화종도는 깨달음을 얻으며 호법을 서는 진기한 광경을 봤다. 무당의 양의심공(兩意心功)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한들, 무의식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근데 그걸 저 고작 약관도 안 된 꼬맹이가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화종도의 삶은 백하고도 스물이 더 됐다. 온갖 기인이사들과 기묘한 신수들을 봤다지만, 이것보다 더 괴상한 광경은 없었다.
“그러면 천혜침법이란 결국 이런 것이겠군요···”
화종도는 알아서 자신의 무리를 넓혀가는 금목환을 보며 확신했다. 이런 괴물을 곽진도가 가르쳤을 리가 없다. 이런 괴물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니까.
‘난세가 올 텐가.’
이 정도의 괴물이 중원에 떨어졌다면, 그에 응하는 파탄이 올 것만 같았다.
*
화종도는 그 이후에도 금월상과 아이들의 무공을 살펴봐줬다. 내가 봐도 그들의 무공은 정말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역시 삼선은 허명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화종도가 아이들을 채근하며 가르치고는 했다. 나름 아이들에게 애정까지 가진 듯했다. 거기서 나는 제외였다.
난 화종도에게 얻은 깨달음을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늘 그렇듯 개념은 되는데 몸이 안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개념조차 흐릿하다. 분명 노을을 쬐며 집중했을 때는 명확해보였는데, 다시 깨니 흐릿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다보니 우리는 남창에 도착했다. 우리는 용봉지회가 끝나고 바로 출발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소문은 이미 널찍이 퍼져있었다.
“이번에 황금세가가 오룡삼봉 중 세 명을 배출했다며?”
“심지어 수룡이 황금세가 가주인 금목환이라더군.”
“···허, 만약 장가라도 들려면 비무초친이라도 해야겠군. 무공도 고강하고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겼으니 말이야.”
난 마차 안이었지만 내 기감은 그들이 말하는 얘기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화종도가 괴해필법을 보여주고 나서부터 기감이 더 확장된 것 같은 느낌이다.
“금목환 가주님을 내 품에 안을 수 있다면··· 정말 원이 없을 텐데.”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우아하시고 기품 있으실까.”
“저분이라면 오첩으로 들어가도 좋아···”
정확한 건 내가 직접 운기행공을 해보고 다듬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가끔 헛소리도 들리는 듯 하니 말이다.
“이제 강서에도 무가가 하나 생긴 셈인가?”
“그렇다고 봐야지. 당최 오룡삼봉 중 세 명이 있는 곳이 무가가 아니면 어디가 무가라는 말인가.”
“허어, 혹시 무인을 받는다면 나도 한 번···”
확실히 우리 세가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외곽에서 둘러 오면서 본 건데, 이제 남창은 사실상 황금세가의 거점이 되어있었다.
앞집 사는 사람은 황금상단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옆집 사는 사람은 황금표국에서 표사로 일하는 사람이 있는 식이다. 이제 남창은 황금세가 없이는 못 돌아가는 곳이 된 거다. 어느 한 집이 황금세가와 안 엮인 곳이 없으니 말이다.
금화청은 이제 황금세가가 눈치를 보지 않고 날개를 펼쳐야 될 걸 알았다. 지금은 마음대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확실히 금화청은 내치에는 도가 터있었다.
“이제, 황금세가 도착입니다!”
앞에서 마부가 외쳤다.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황금빛의 세가가 내 눈을 찔렀다. 찔려도 아프지 않을, 뿌듯한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