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피의 응징을 기다려라
132화 피의 응징을 기다려라
생각해보면 결국 남궁홍예는 용봉지회에서 삼봉을 차지했다. 그녀의 과거가 어떻다고 해도, 결국 올라갈 수 있는 실력은 있었다는 말이다.
대외적으로 독수 계획은 남궁선우의 동생, 남궁선용이 했다고 한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추진했던 이유는 뭘까. 누가 충동을 했던 것이 아닐까.
이름도 모르는 형산의 유동해가 옹진수를 충동하여 황금세가를 치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건 참 무서운 방법인 게, 설사 당했다고 해도 당사자는 당한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그렇게 휘둘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 인정하지를 않는다.
당장 옹진수에게 유동해라는 간자 때문에 황금세가를 친 거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아니라고 분을 낼 거였다.
“···흠, 남궁세가, 남궁세가라. 남궁세가···”
화종도는 혼자 끊임없이 되뇌었다. 난 남궁세가의 음독 사건을 상기시키고, 형산파와 남궁세가의 회동에 대해 말해줬다.
당장 오대세가들이 서로 감시하고 있다고 해도, 가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정확히 모를 것이지만 우리는 애초에 가주를 감시하고 있었기에 회동을 보는 게 가능했다.
다른 세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형산파와 남궁세가의 회동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이건 우리만 아는 사실인 거다. 그러고 보면 중명각의 정보원은 꽤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썩어있다고? 아니, 그럴 만하긴 한데.”
화종도는 형산파의 거처에서 진권이 있는 전각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궁세가에 마교의 간자가 있다라···”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그 때문에 안에 있던 진권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남궁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화종도는 진권의 질문도 못 들었고 계속 심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결국 내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심증입니다.”
“심증?”
진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자네는 남궁세가가 마교라고 생각하나보군?”
“음,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심증이니까. 그런데 그 심증이라도 좀 알려줄 수 있겠나? 나는 납득이 안 되는데.”
진권은 오대세가의 수장, 남궁세가가 마교라는 가설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 것도 아닌 거지만, 그들에게만큼은 제일 중요한 것.
남궁세가는 그야말로 뼈대 있는 집안. 설마 남궁세가까지 썩었으리라, 는 마음일 거다. 당장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이끌었던 건 진권의 입김도 많이 들어가 있을 테니까.
또 그런 무형적인 걸 떠나서도 남궁세가는 중원에 끼치는 영향력이 많았다.
안휘가 장강에 껴있는 내륙이라는 요지이기도 했거니와, 많은 상단을 갖추고 있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정기적으로 물품을 공급하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들이 마교라면 우리에게 고독을 넣었겠지. 보타암이 아니라.”
“그거야 까보면 알겠죠. 그건 걸릴 위험이 컸거나, 아니면 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거나.”
생각해보면 진권과 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진권은 정파의 뿌리 깊은 명숙이고, 나는 상계에서도, 사람들의 시선 외곽에 있던 사람이라는 것. 약선이 내 말을 바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건, 그 역시 주류 문파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그래. 자네는 정파를 아니꼽게 보겠지. 그러나 그렇게 정파가 썩은 건 아니라네. 그건 우리에 대한 모욕이야.”
“형산파도 나름 뿌리가 깊지 않나요?”
“오대세가와는 비빌 수 없지.”
난 진권의 생각을 인정했다. 아무렴, 사람이 생각이 바뀌는 건 어려운 법이었다.
“이렇게 형산파를 조이다보면, 분명 튀어나오는 게 있을 겁니다.”
“난 안 그렇다고 보네.”
“네. 이해합니다.”
결국 남궁세가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 됐다. 그거야 정말 시간이 지나보면 알 일이었다. 불편한 표정을 하던 진권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여기 숭산에서 승부를 볼 장인가? 은원을 푸는 거라면 우리는 개입하지 않아. 그건 전 중원이 알고 있으니까 당위성도 충분하지. 하지만 우리는 형산파를 하산 금지에서 당장 못 풀어. 일단 확실히 서역의 만년한철이라는 결과가 나와 봐야 알지.”
물론 그 결과는 나오려면 꽤 걸릴 것이다. 그러면 숭산에서 있었던 나와 형산파의 일은 어느 정도는 중원에 알려졌을 거다.
난 숨통을 조이고, 풀어주고를 반복하며 형산파를 조련할 예정이다. 결국 형산파는 답답해 폭발할 수밖에 없을 거다.
“저희는 숭산이나 낙양에서 피를 볼 생각은 없습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싸우는 게 맞죠. 제가 지금 남창으로 돌아가 형산파를 치면 중원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비겁한 놈들이라고 하겠지.”
“맞습니다.”
진권이 내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든 일이 끝나고 형산파와 한 판 한다는 거지? 알았어.”
“그건 아닌데요.”
내가 진권의 말을 막아섰다. 얘기를 끝낼 예정이었던 진권의 입이 무안하게 됐다.
“이것도 심증만 있는 거지만, 형산파는 그 칼자루에 마기가 담겨있으리라는 건 몰랐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장 제가 들어가기 전에도 여유롭지 않았습니까.”
“···심증이 난무하는군. 그래서?”
“도망칠 가능성이 있는 건 몸통입니다. 그러기 전에 빨리 거슬리는 팔다리를 제거해야죠.”
“그 몸통이 있다는 것도 자네 심증이겠지.”
진권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남궁세가의 음독, 형산파와 남궁세가의 회동. 난 이것 둘이 독립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형산파를 빨리 치고 싶다는 게 자네 생각이지?”
“네. 맞습니다.”
“결국 만년한철의 출처가 정확해지기 전에 하산 금지를 풀어달라는 말로 이어지게 되겠군.”
“맞습니다.”
진권도 이제 내 화법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역시 구파일방의 너구리들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눈치가 빠르다는 거다.
“어떻게?”
진권이 물었다.
난 다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 형산파의 압박을 푸는 듯하면서, 불쾌감을 남기는 방법을 말이다.
“홍문원을 죽이면 됩니다.”
내 말이 뜬금없긴 했나본지, 물어본 진권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중얼거리고 있던 화종도의 고개도 벌떡 일어났다.
*
이제 중원에는 커다란 소문이 퍼질 거다. 이건 퍼질 수밖에 없다. 소림사가 전체적으로 보내는 서한이니까. 그 서한은 지금 나와 화종도도 보고 있었다.
- 용봉지회 폭발 사건과 관련하여, 형산의 파문 제자 홍문원을 참수했음.
당연히 용봉지회에서 있었던 폭발 건은 이미 중원에 많이 퍼진 상태였다. 그것의 마무리를 짓는 서한인 거다.
“홍문원은 그럼 어디다 뒀다고?”
“소림사 내에 안가가 있다는 군요.”
“그래?”
물론 홍문원을 진짜 죽인 건 아니었다. 그저 형산파를 풀어놓을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거짓이기는 하지만, 소림사는 이걸로 논란도 종식됐으면 좋을 거라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림사의 서한보다는 다른 서한에 집중했다.
- 형산파에게 지난 오 년 전의 침략과 내부 간섭의 죄를 물을 것이다. 피의 응징을 기다려라.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
그건 내가 중명각에 명령한 서한이었다. 소림사의 서한이 풀릴 때 맞춰서 같이 풀라고 했다. 이건 그냥 가벼운 기만술이었다. 남궁세가에게 두 정보를 겹쳐서 줌으로써 소림과 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다.
그걸 알아낼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른다. 지금 당장의 목적은 형산파를 치는 거니까.
우리가 무가로 거듭났다지만, 계속 우리는 일을 만들어야 했다. 진흙에 물을 한 번 뿌렸다고 굳지는 않는다. 계속 햇볕을 쬐어줘야 하는 법이다.
“근데 피의 응징이라니.”
화종도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난 중명각에 그냥 형산파에 선전포고만 하라고 했다. 근데 저런 거친 단어를 쓸 줄은 몰랐다. 좀 우스꽝스럽지 않나, 고민했다. 화종도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어 살짝 발을 뺐다.
“제가 쓴 거 아닙니다.”
“그래? 잘 썼다고 칭찬하려고 했지. 원래 중원 전체에 돌리는 격문은 유치하다시피 내용을 강조시켜야 돼. 그런 점에서 피의 응징이라는 단어 선정이 아주 빼어나군.”
“아, 그런가요.”
오히려 중명각이 나보다 이런 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슬슬 우리 세가도 전문화 분업이 되어가고 있다. 나 혼자 모든 걸 처리할 수는 없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아무튼 이제 진짜 선전포고를 했구나. 근데 형산파를 이길 거라고 확신하냐?”
“모르죠. 싸움에는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구파일방 근처까지 왔던 곳이야. 만만하지 않을 걸. 형산에 숨어있는 고수들이 많을 거야.”
“그렇겠죠.”
“넌 본인 일을 남의 일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구나.”
화종도가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나는 그냥 선전포고를 그냥 지른 게 아니다. 중명각에 부탁해서 형산파의 전력을 많이 살펴봤다.
옛날엔 고수가 많았지만, 옹진수 전부터 초절정 고수 전력이 급감하더니, 봉문 이후부터는 많이들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형산파 사람이라도 형산파가 마음에 안 들면 떠나기 마련이니까. 그런 사람들은 보통 낭인이 된다. 형산파 정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떠났다는 건 곧 옹진수가 잘못된 문파 운영을 했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냐?”
“집으로 가야죠. 형제들도 피곤해 하고요.”
“그러냐.”
화종도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려했다. 나도 이제 숭산을 내려가 낙양의 황금세가 거처로 가려고 했는데, 뭔가 그 고민하는 눈빛이 인사를 건네기도 어렵게 했다. 고민 끝에 나온 말은 나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도 같이 가자꾸나.”
“왜요?”
“왜라니? 내가 가고 싶으니까 가는 거지. 남들이면 삼선 중 한 명과 동행하는 걸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일인 것을···”
화종도는 혀를 찼다. 삼선 중 하나라는 걸 계속 내게 말하는 걸 보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자랑할 만한 일이고, 누구나 인정할만한 일이니까.
“그럼 같이 가시죠.”
“마치 내가 같이 가달라고 조르는 모양새가 됐구나.”
“제가 같이 가자고 먼저 말씀드린 건 아니니까요.”
“좀 꼬마답게 귀여우면 안 되겠느냐?”
“이제 약관의 성인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화종도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밀었다. 단순히 미는 건데 난 그 손가락을 피하지 못했다.
“네가 스물이 되든, 서른이 되든, 마흔이 되든 나한테 꼬맹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이 녀석아.”
“그런가요.”
“···큼.”
우리는 그렇게 소림사 전각에서 잠깐 헤어졌다. 화종도도 정리해서 가지고 나올 짐이 있고, 나도 정리해서 가지고 나올 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짐을 싼 우리는 숭산을 내려갔다. 이제 소림이 해줄 일은 끝났다. 다음부터는 나의 몫이었다.
난 낙양으로 내려가 우리 거처로 왔다. 내가 문간에 서자마자 금수린의 두 팔이 내 목 좌우로 들어왔다.
“왔구나! 목환아. 이제 낙양도 지겹다. 집 가자, 집.”
“네, 그래야죠.”
금수린이 내 어깨를 받침으로 목을 들었다. 화종도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딱히 관심은 없는 듯했다. 원래 금수린은 이런 면이 있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딱히 무슨 의심이 없는 것.
“바로 집 가는 거야?”
“네. 준비하시죠.”
나는 금수린을 떼어놓고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에는 무언가가 휘둘러지는 소리와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슬쩍 보니 금월상과 한유림이 비무를 펼치고 있었다.
“호오.”
나보다 뒤에 있는 화종도가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비무에 집중하느라 우리가 온지도 모르고 있었다.
“저 친구가 도룡이고, 한 쪽은 설봉이군.”
“네, 맞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그 비무를 구경했다. 괜찮은 합이 계속 나눠졌다. 금음검법으로 한기를 가득 뿜어내는 한유림과 강뢰도법으로 냉기를 찢어발기는 금월상. 비무인지라 강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서로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들이었다.
“재밌군.”
화종도가 말했다. 그때, 금월상이 내가 있는 쪽을 봤다. 그는 바로 뒤로 도약해 한유림과 멀어졌다. 한유림도 뭔가 알아차렸는지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아, 가주님. 오셨···”
“어, 목환아, 이제 왔···”
금월상과 한유림의 말은 중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끊겼다. 그들은 내 뒤에 있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아마 이해가 안 될 것이었다. 며칠 전 계단에서 별호를 나눠준 사람이 보이니 말이다.
“···야, 약선님···”
“···약선님을 뵙습니다.”
금월상과 한유림이 곧바로 예를 갖춰서 인사했다. 화종도는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지.”
화종도는 날 바라봤지만 난 외면했다. 굳이 마음에 내키지 않은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런지요.”
금월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긴 삼선은 높은 자리기는 하다. 내가 좀 이런데 무감각해서 그렇지.
나도 왜 따라오는지는 궁금해서 화종도를 바라봤다. 화종도는 골똘하게 생각했다. 내가 볼 때는 딱히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딱히 이유는 없는데.”
그건 정답이었다. 그러나 화종도가 뒤에 이을 말은 생각하지 못했다.
“일단 너희들. 검법과 도법을 쓰면서 실수들을 하고 있구나.”
“네?”
금월상과 한유림이 긴장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초조함과 기대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약선의 한 마디면 충분히 기연이라 할 만하니까.
“일단 너희들이 가진 무공으로 초식들을 펼쳐 보거라.”
“네, 네!”
금월상과 한유림이 바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했지만, 그때 우악스러운 손이 내 뒷덜미를 들었다.
“너도 포함이다. 가주야.”
난 화종도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