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은원을 풀러가겠습니다
131화 은원을 풀러가겠습니다
형산파는 아직도 하산 금지가 안 풀려 있었다. 그래서 소림사의 전각에서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묵고 있었다.
“소림사한테 서한 보낸 거 맞나? 하산 금지 풀어달라고.”
“네. 분명 금방 답변 준다고 했습니다.”
옹진수는 이를 갈았다. 그 답변만 지금 며칠 째인가. 금방 답변을 준다고 해놓고 사흘이 지났다. 용봉지회가 끝나고도 사흘이 지났다는 것이다.
적어도 웬만큼 견식이 있는 무림인들은 용봉지회가 끝나기 전에 형산파 건이 마무리 된다고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소림사의 불명예가 전 중원으로 퍼질 거니까.
그러나 사흘이 지나고, 사람들도 이제 다 각자 집으로 갔는데 형산파만 못 가고 있다.
“젠장, 괜히 한다고 했군.”
옹진수는 미칠 지경이었다. 형산파는 소림사에게만 답변을 못 받는 게 아니라, 남궁세가에게서도 답변을 못 듣고 있었다. 추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 남궁세가는 생각하고 답변을 주겠다, 라는 성의 없는 대답을 준 거다.
“뭔가 있긴 한 거같군.”
“···그런 것 같습니다.”
옹진수도 강호에서 굴렀던 세월이 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이것들은 모두 하나로 결론으로 귀결된다.
일단, 소림사 입장에서 먼저 조사할 게 남았다는 것. 그리고 그 조사할 건 생각보다 꽤 중요한 것이라는 것.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소림사가 별 말 없이 대중들을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명예가 깎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실은 밝히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젠장. 다 이 전각이나 불상들도 다 부셔버리고 싶군.”
옹진수의 목소리 울림이 점점 거칠어졌다.
뭔가 자신 모르게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옹진수는 옆에 있는 의자를 벽에 던져버렸다. 나무가 박살나면서 우수수 파편들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제 직감했다. 지금 누군가 옹진수의 심기를 거슬리는 순간 최악의 꼴을 보리라고.
그때, 누군가 한 명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옹진수는 문도 두드리지 않은 놈에게 욕을 뱉으려고 했지만, 형산파 제자의 말이 더 빨랐다.
“황금, 황금세가의 가주가 왔습니다.”
“···뭐?”
옹진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
나는 별채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바깥 복도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내가 있는 방의 문도 열렸다. 곱사등이 노인이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옹진수가 이렇게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주화입마에 걸렸다는 소문도 들었고, 용봉지회에서 오다가다 스쳐봤을 때 이미 그의 모습을 본 탓이다.
“혼자 왔나?”
옹진수가 물었다. 난 담담하게 답했다.
“네.”
“허허. 그래, 그래. 소림사에서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할 리가 없지.”
옹진수는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휘휘 했다. 아직 닫히지 않은 문에는 형산파 사람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었는데, 그들은 옹진수의 손짓에 문을 닫았다.
“오룡이 된 걸 축하하네. 황금가주. 옥룡이라는 별호라. 아주 잘 어울리는 별호야.”
옹진수가 말했다. 부드러운 덕담이었다. 나는 작게 웃었다.
“감사하군요.”
“자네가 정말 이렇게 강할 줄 몰랐지. 거기다가 광랑검, 도존 같은 거물하고도 같이 다니던데.”
“이제는 같이 가야 할 사람들이니까요.”
옹진수의 눈이 빛났다. 나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 마디 하고 싶군. 형산파가 황금세가를 습격한 것도 이젠 오래전 일이지 않은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거짓말하는 혀가 뱀처럼 날뛴다. 옹진수는 나름 연기를 잘하고 있었지만, 그 속셈은 뻔했다. 지금 남궁세가와 소림사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마당에, 탈출구멍을 하나라도 만들어놓으려는 거였다. 내가 명가들과 많은 연결고리가 있는 걸 아니까 말이다.
그러나 옹진수 눈동자 끝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내게 선명했다.
“이번에 제자가 자네에게 암수를 쓴 것도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네. 물론 우리는 티끌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온전히 제자놈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관리 감독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 말이 잘 통해서 좋군!”
옹진수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구석 찬장을 열었다. 그곳에는 주둥이가 긴 백자기가 있었다. 딱 봐도 술이었다. 난 손바닥을 내밀었다.
“술 마시기는 싫군요.”
“···허허. 그래?”
옹진수가 내가 거절할 줄 몰랐다는 듯 다시 자리로 걸어왔다.
“그래. 그럼 여기 온 이유를 듣고 싶군.”
옹진수가 말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가 나를 증오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좀 억울한 부분이 있다. 난 그냥 황금세가의 가주고, 내가 형산파의 봉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건 맞지만 형산파는 그걸 모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장문인.”
“음?”
난 옹진수에게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황금세가가 무슨 연으로 무림맹을 포섭하고, 형산파의 공세를 막아냈는지 말입니다.”
내 말에 옹진수의 표정이 일변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우리도 알고 있어. 동맹의 주체가 황금세가인 것도, 무림맹이 따라다녔다는 것도, 동맹이 결성된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꽤 명민했지.”
옹진수가 말했다. 아까의 부드러움은 완전히 사라져 소리가 건조했다.
당연하지만 이미 그도 알고 있을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지수인 게 있습니다.”
“계속 말해보게나. 난 자네가 이러는 이유가 미지수인 것을.”
“과연 누가 이걸 주도했냐는 겁니다.”
당장 외세에 휘말리던 때, 누가 그렇게 움직였냐는 말이다. 옹진수는 눈을 착 가라앉혔다. 내가 우호적인 의미로 온 게 아니라는 걸 완벽히 알았을 거다.
“곽진도겠지.”
옹진수는 뻔한 대답을 했다. 그를 탓할 수는 없다. 황금세가의 몇몇을 제외하고 모든 중원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밀을 난 말하려고 한다.
“아뇨, 접니다.”
그 이후, 난 내가 형산을 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를 얘기했다. 옹문규의 목을 베고 화골산으로 녹인 것도, 쥐새끼처럼 도망치던 옹소후의 목을 베어버린 것도.
소림사 방장과 약선에게 해줬던 말보다 더 상세하고 생생했다. 옹진수의 표정도 점점 일그러져갔다. 직감적으로 내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거다.
내가 말을 끝내자, 옹진수는 이미 흉신악살의 표정이 돼있었다.
“그래. 쥐새끼야. 지금 내게 와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뭐더냐?”
이제는 호칭도 천박해졌다. 물론 난 거기까지 떨어질 생각은 없었다. 할 말만 하고 나오려고 하니까.
“저희는 형산파와 달리, 기습적으로 습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뭐?”
옹진수가 귀를 의심한다는 듯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하지만 다시 말해줄 의리는 없었다.
“조만간 은원을 풀러 가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일어났다. 바로 책상이 아래에서부터 갈라졌다. 나도 발검해서 그걸 막았다. 내 발이 당겨지듯 뒤로 끌렸다.
“이런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감히 나를 농락해!”
옹진수의 등이 살짝 펴졌다. 기로 억지로 허리를 피는 것 같아. 뼈가 억지로 움직이는 소리가 기괴했다.
바로 강력한 강기들이 내 온 몸을 덮치려고 한다. 마치 수천 마리들의 뱀이 내 몸을 뜯으려고 달려드는 것 같다.
옛날 조흠이가 구향검법을 알려줬을 때 본 적이 있다. 구향검법 마지막 초식. 구류산해(九流山海)였다.
투두두둥!
아무 것도 부딪치지 않았는데 강기가 대기에 부딪쳐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옹진수가 아무리 주화입마에 걸려있다고 해도, 아직 형산파 장문인이자 옛 고수다. 그의 강기는 여전히 강맹했다.
난 맞받아서 대라회연을 펼쳤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기는 파도처럼 솟아 건물 천장을 부쉈다. 내가 쓰고도 놀랄 정도로 강한 패력이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옹진수는 그 강기를 찢어발기고 내 앞으로 날아왔다. 발목과 팔뚝 부분에 강기에 쓸린 상처가 푸르뎅뎅하게 부풀어있었다.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옹진수가 이렇게까지 피해를 감수하고 왔다는 건, 이제 마지막이라는 거다. 고작 한 합을 겨뤘는데, 그는 이미 끝인 거다.
바깥이 곱사등이처럼 보일 정도면 속은 얼마나 곪아있을런지.
허나 여기서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때, 절묘하게 옥색 침 하나가 멀리서 날아왔다.
크기는 침이었지만 그것에 담긴 괴력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와 옹진수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쿠구구구궁!
그 작은 침 하나가 소림사 전각의 기둥을 부수고도 계속 날아갔다.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건물이 기울었고. 옹진수와 나는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건물들의 조각이 굴러다니고, 흙먼지가 하늘까지 올라갈 정도로 자욱해졌다.
“···뭣들 하는 겐가?”
싸움을 멈춰준 사람은 바로 약선 화종도였다. 화종도는 크게 눈을 뜬 채, 나와 옹진수를 번갈아봤다. 옹진수는 기를 당겨 쓴 값으로 피를 울컥울컥 토했다. 약선은 옹진수의 몸에 침 몇 개를 날려줬고, 바로 피가 멈췄다.
“···저 놈이 먼저 도발한 겁니다. 약선 선배.”
“별 말 안했습니다. 은원을 정리하자고 말했을 뿐.”
내 말에 옹진수가 이빨을 뿌득 갈았다. 화종도는 날 놀란 눈으로 봤다. 일단 그는 나와 옹진수를 떨어뜨려놓는 게 목적인 듯 나를 데리고 형산파 거처에서 빠져나갔다.
그는 내 소매를 잡았는데, 내가 어떤 반항을 해도 못 풀리라는 걸 직감하고 그냥 얌전히 걸었다.
난 뒤를 살짝 바라봤다. 뒤는 무너진 건물과 흙을 뒤집어쓴 형산파 사람들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태풍을 겪은 사람들 같다.
난 바로 다시 앞으로 목을 돌렸다. 무너진 형산파 거처는 어차피 소림사 무인들이 와서 상황을 듣고 수습을 할 것이었다.
뒤통수가 뜨겁다. 아마 옹진수를 비롯한 형산파 무인들이 보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렇게 내 뒤통수가 식어갈 때, 화종도는 그제야 묵묵하던 입을 열었다.
“이러려고 만나겠다는 거였냐?”
“네.”
“소림사 내부에서 행패를 부렸으니 진권이 징계를 내릴 거다.”
“무슨 징계요?”
난 되물었다. 화종도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 답했다.
“건물 부서진 값, 다시 올리는 값. 추가 노동비, 벌금까지. 엄청난 부담···”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화종도도 중간에 말을 멈췄다.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긴 무인들끼리 싸우는데 서로 구속하고 그러지는 않겠지.
정확히 말하면 약선의 개입으로 건물이 부서진 것이고, 조금 덜어서 옹진수와 나의 책임을 반반씩 물을 거다.
“형산파에는 부담이겠죠. 오 년 동안 외부활동 안 했으니 돈을 까먹기만 했을 테니까요.”
화종도가 날 바라봤다.
“왜 싸운 거냐?”
“형산파를 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미친놈. 그걸 장문인한테 직접 가서 얘기해? 네가 이렇게 감정적일 줄 몰랐구나.”
이제야 나는 화종도를 바라봤다. 화종도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화종도는 내 눈을 자세히 보더니 무언가를 눈치 챘다.
“계산된 거냐?”
“네.”
“왜?”
내가 잠깐 생각한 듯 대답했다.
“형산파 조사가 꽤 오래 걸릴 것 같거든요. 비슷한 말만 돌고 돌겠죠. 그럴 바에는 그냥 이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언제까지 낙양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리고?”
난 의외라고 생각하며 화종도를 바라봤다. 내 눈에서 뭔가를 더 읽은 것이다. 여기까지 내 마음을 읽은 사람을 본 적은 없다. 화종도는 내 표정을 보고 도리어 어이없어 했다.
“야, 임마. 내가 삼선인데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죄송합니다.”
난 다시 표정관리를 하고 말했다.
“어차피 형산파는 풀일 뿐입니다. 뱀은 따로 있겠죠. 그 뱀을 부르려는 겁니다.”
“타초경사라. 그 뱀은 마교를 말하는 건가?”
“아닙니다.”
화종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난 주변의 기감을 펼쳐본 다음,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