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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127화 (128/225)

127화 중원을 바꾸려고 해

127화 중원을 바꾸려고 해

선우진의 기권. 늘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심판도 많이 당혹스러워 했다.

관객들이 분노한 건 당연했다. 그야말로 용봉지회의 꽃, 후기지수 최강자를 가리는 싸움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물거품이 된다는 건 용납못할 만 했다.

“선우진은 도망치지 말고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수많은 사람들이 구호처럼 외쳤지만 선우진이 나올 리가 없었다.

결국 반대편 대기실에 소림사의 무인이 들어가서 확인했을 때, 탁상에는 쪽지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인 즉 이랬다.

- 본 천주성은 구태 정파의 상징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들만의 잔치인 용봉지회 수상을 거부한다.

남겨진 쪽지에 적힌 건 민감한 내용이어서 심판은 내용을 밝히지 않고 그냥 기권이라는 말로 넘어갔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쪽지는 낙양의 온갖 곳에 방으로 붙어있어서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세가와 마찬가지로 천주성도 중원에 각인을 시키려 한 것이었고, 그건 성과를 얻었다.

용봉지회를 계속 봐왔던 구경꾼들에게는 선우진은 비겁한 도망자였지만 그저 방을 본 사람들은 천주성이라는 조직이 뇌리에 남을 터. 또한 그 천주성이 현 구파일방 중심의 중원을 싫어하고, 그 천주성의 후기지수는 오룡 자리가 확정될 만큼의 고수라는 것뿐이었다.

아마 선우진도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이번 기수 오룡의 으뜸이 된 다음 거부했을 거다. 그러나 그는 내게 이길 수 없다고 고백했고 이런 방법을 택한 거다. 아마 그의 선택이 아닌 천주성의 선택일 확률이 크지만 말이다.

아무튼 오룡이라는 자리에 선우진을 포함시키느냐, 마느냐는 꽤 논쟁거리가 됐다. 주최 측이 골머리를 앓은 건 물론이고, 구경꾼들도 그걸로 숭산을 고성으로 물들였으니까.

당장 그들은 천주성의 이름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올라가기를 원했을 거고, 자신들의 신념을 알리고 싶었을 거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잡으려면 싸움을 붙이는 게 최고였다.

“도망간 놈이 정파 후기지수의 상징인 오룡이라는 자리를 받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까?”“도망이 아니라 그건 신념이라고 말해야 하네. 천주성이라는 조직이 어떤 곳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말이야. 솔직히 중원의 무인들은 한 번쯤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들의 횡포가 심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안 주면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지.”

“나도 비슷한 생각이지만 좀 달라. 천주성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냐를 떠나서, 어쨌든 오룡을 확정 받은 자리야. 선우진에게 오룡의 자리를 안 준다면, 중원 무림은 우습게 될 거야.”

지금 여기 내 앞에서 싸우고 있는 종리운, 팽의석, 적유엽도 중원의 호사가들과 다를 건 없었다. 그저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외곽인 우리 거처로 와서 싸우는 것이었다.

물론 사실 주 목적은 싸움이 아니라, 폐회를 같이 가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나, 금월상, 양초원, 갈유월, 한유림도 같이 있었다. 한 곳에 오룡 중 세 명이, 삼봉 중 두 명이 있는 셈이었다.

“근데 그럼 폐회는 언제 하는 거냐?”

“한 시진 뒤라고 하던데요.”

“평소보다 좀 늦네. 선우진 때문이겠지. 어떻게 될 것 같더냐?”

“글쎄요. 사실 관심이 없습니다.”

“하긴, 넌 이미 오룡이니까. 당장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난 어른들이 싸우건, 말건 곽진도와 대화하며 폐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폐회식은 비무가 끝나고 두 시진이 지나서 한다고 했는데, 선우진 일을 처리하기 위해 네 시진 뒤로 늦춰진 거다.

이렇게 시간을 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시간을 주지 않으면 참가자들은 비무가 끝난 채로 먼지와 피가 묻은 옷으로 오룡삼봉이라는 이름을 받을 테니까.

살면서 평생 한 번 있는 명예로운 날이었다. 최대한 꾸미고, 세가의 명예를 드높여야 됐다.

“어머, 옷 너무 예쁘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도 옷을 좀 차려입었다. 내가 주로 입고 다니는 남색의 금색 수실이 들어간 옷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입은 건 그 형태에 금색이 더 많이 들어간 옷이었다.

원래는 금색 수실을 양팔 부분만 해놓았지만, 모든 옷의 테두리를 금색으로 두르고, 좌우 팔의 수실은 용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나는 소매를 좌우로 둘러보면서 말했다.

“좀 과한 거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용봉지회에는 이 정도는 해야지.”

금수린이 바로 정색을 했다. 그렇다. 이 옷은 금수린이 내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금수린은 금월상이 초유열과 붙어 다쳤을 때, 금월상을 병간호한다며 안 나갔었다. 그런데 사실 오히려 병간호는 거짓 핑계였고, 그때부터 내 옷을 만들어주고 있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누나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대단한 것밖에 없구나.”

금수린은 등을 곧추 세우며 두 손을 양쪽 허리에 짚었다. 콧바람을 잔뜩 내뱉는 걸 보면, 본인은 아주 만족한 것 같았다. 하긴 난 나를 제대로 못 보니, 금수린의 눈이 정확할 수도 있었다.

“···아가씨, 입고 나왔어요.”

내 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걷는 느낌이 대청마루에 느껴졌다.

금수린은 내 쪽으로 서있어서 목소리의 주인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곧장 금수린이 입을 벌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와, 너무 예쁘다. 목환아, 너도 좀 봐봐.”

난 허리를 돌려 뒤를 봤다. 나와 비슷한 옷이지만 그 옷에는 용이 아닌 봉(鳳)이 수놓아져 있다. 그렇게 부드러운 옷의 곡선을 따라 위로 올려다보면, 얼굴을 붉힌 한유림이 보였다.

한유림은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돌렸지만, 확실히 금수린이 놀랄 만한 정도로 많이 바뀌기는 했다.

그녀는 원래 검을 휘두르는 데 방해되지 않게 머리의 뒤를 말총처럼 묶고 다녔는데, 그것을 완전히 풀어 앞머리가 어깨와 허리선을 타고 내려오게끔 했다. 퍽 차가워 보였던 인상은 색조 화장으로 밝히니, 그야말로 조화로운 아름다움이었다.

평소 무인인 만큼 화장도 하지 않고 무복만 입는 그녀였기에 더 극적인 변화로 보였다.

“예쁘네.”

“···네? 아, 음. 네, 감사합니다···”

나는 일어났다. 이제 한 사람만 기다리면 됐다.

그때 한유림이 나온 곳 맞은편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는 한껏 찌푸린 갈유월이 있었다.

“불편하네.”

그녀의 옷차림은 분홍색 화복(華服)에 붉은 장미가 수놓아져 있었다. 역시 화려한 복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난 갈유월이 화장한 것도 한 번도 못 봤다. 왜냐하면 그녀도 무인이니 말이다. 한유림과는 좀 다른 화장이었다.

갈유월의 화장법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까칠한 눈매를 더욱 돋보이게끔 했다. 딱 고양이의 얼굴을 인간으로 옮겨놓으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또한 교소농염(嬌小濃艶)이라고 충분히 칭할 만한 작고 선명한 입술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원한 건 아닌 듯했다. 그냥 무림맹의 시종들이 그녀의 얼굴에 가장 어울리는 걸 해준 것이겠다.

“와, 와.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왜 목환이 근처에는 다들 예쁜 애들밖에 없을까.”

금수린은 바로 뒤에서 갈유월의 어깨를 잡고 내 앞으로 끌어왔다. 갈유월은 당황하면서도 뿌리치지는 못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갈유월은 의외로 금수린에게는 순순했다.

“어때?”

금수린이 물었다. 난 눈을 잠깐 깜빡이다가 아까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예쁘네.”

“시시한 대답이야.”

금수린이 힘 빠진 목소리를 냈다. 내게 뭘 더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갈유월도 준비됐으니 우린 다시 숭산으로 올라야했다. 태실과 소실의 중간, 소림사가 있는 준극(峻極)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다 같이 불러서 가려고 할 때, 뜬금없이 갈유월이 날 불렀다.

“야.”

난 갈유월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내 눈동자를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듯 원형으로 구르고 있었다.

“혹시, 정확히 어떻게 예쁜지 말해줄 수 있어?”

갈유월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나나 금수린에게만 들릴 정도의 말이었다. 금수린은 뒤에서 두 손을 입에 모으며 눈에 호선을 그렸다.

크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난 내가 생각했던 걸 그대로 말했다.

고양이 같은 얼굴이니, 교소농염의 입술이라느니, 하는 말들. 난 말을 더 해주려 했지만 바로 갈유월이 하얀 손바닥을 내 얼굴에 내밀었다.

“그만!”

“왜?”

“그냥, 그만.”

갈유월은 마루에서 내려오며 신을 신었다. 웬일인지 갈유월이 크게 얘기했다.

“다들 가시죠.”

그녀의 말에 우리는 전부 모여서 숭산으로 향했다. 난 숭산에 도착할 때까지 갈유월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계속 내게서 얼굴을 돌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

소림사가 있는 준극은 이미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매달려 있었고, 현판 앞에는 푸른 용과 붉은 봉황의 조각상이 좌우에 있었다.

오룡삼봉의 이름을 갖게 될 사람들은 근처를 구경도 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인도를 받았다.

그곳에는 쥐색 법복을 입은 한 스님이 있었고, 초유열과 삼봉 중 하나인 익숙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남궁홍예였다.

딱히 뭐라 말할 것도 없지만, 말하기 전 스님은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오룡삼봉이 전부 모였군요. 제 이름은 공휴입니다. 여러분께 몇 가지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자신을 공휴라고 소개한 그 스님은 폐회식에서 지켜야 할 예의, 폐회식의 절차, 우리의 동선은 어떻게 되는지 말했다.

공휴가 설명을 잘하기도 했거니와 딱히 복잡한 부분도 없어서 모두가 한 번에 이해한 것 같았다.

“혹여 질문 있으십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자 내가 말했다.

“아뇨.”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후에 안내를 따르시면 됩니다.”

공휴는 그렇게 말하고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개회식과 더불어 중요한 절차, 폐회식. 그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꽤 소림사는 분주해보였다.

난 남궁홍예를 슬쩍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갈유월에 대한 독수를 안 썼어도 되는 거였다. 아니면 갈유월을 제외한 다른 여자 후기지수한테 수를 썼던가.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시선을 눈치 챈 남궁홍예가 날 마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꽤 독기가 받친 눈빛이었다. 독수를 쓴 건 그들인데, 왜 나를 노려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남궁홍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내렸다. 내 옆의 갈유월과 한유림이 더 사납게 바라본 것이다.

사실 오룡삼봉 중 태반 이상이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니, 남궁홍예가 여기서 뭘 할 수는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아는 듯 다음부터는 땅바닥만 보며 조용히 있었다.

꽤 우리의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예정되어 있던 폐회식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초유열이 말을 걸었다.

“자네가 올해의 수룡(首龍)이군. 축하할 일이야.”

“음, 너도 오룡이 된 걸 축하해.”

“조금 씁쓸한 축하군.”

초유열이 말 그대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뭔가 실망하거나 낙담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날 보는 눈빛에는 전보다 더 진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난 이번 패배에서 값진 걸 느꼈네.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야.”

“모두가 그럴 거야. 나도 앞으로 정진할 거고.”

“그것도 맞다. 허나 길을 헤매거나, 흐릿한 안갯길을 걷는 사람보다는 내가 더 빠를 거다.”

초유열이 자신 있게 말했다.

“난 천하제일인이라는 목표가 있거든. 그러기 위해서 폐관수련을 하려고 해.”

그 말에 모두 초유열을 바라봤다. 이번 기수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당당히 천하제일인이라는 목표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크게 이상한 말도 아니었다. 사실 내가 없었으면 초유열은 올해 용봉지회의 주인공이었을 테니까.

심지어 그 나이에 폐관수련이라니. 오룡도 됐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강호의 영향력 있는 무인으로 발돋움하는 길을 미룬 셈이다.

“너는 목표가 뭐지?”

초유열이 물었다. 난 바로 말했다.

“황금세가를 천하제일세가로 만드는 것.”

그 말에 남궁홍예가 크게 움찔했다.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천하제일세가라고 하면 당연히 남궁세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궁홍예가 여기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중원을 바꾸려고 해.”

난 말을 이었다.

그 말에는 남궁홍예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중원 전체를 바꾼다는 말이 어쩌면 그들에게 오만하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그때 우리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오룡삼봉 분들은 저희를 따라오시죠.”

폐회식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나와 남궁홍예의 눈치를 보며 슬슬 일어났다.

내가 여기서 굳이 목표를 밝힌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장 오늘 폐회식에서부터 중원이 바뀔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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