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저한테 주셔야겠습니다
121화 저한테 주셔야겠습니다
뭔가 부딪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건 단순히 예감이 아니다. 태을헌원신공이 경고를 하고 있었다.
‘대체 뭐지?’
신기한 일이었다. 칼날에 마기가 덧씌워진 건 아닌데 마기가 느껴지다니. 하긴 칼날에 마기를 덧씌웠으면 심판이 바로 처단했을 거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못 느낄 정도의 미량이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분명히 나보다 고수들도 있을 터다. 그들이 못 느꼈다는 건 오로지 나만 느낄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당장 내가 시합을 중단시킬 수도 없었다.
왜 나한테만 느껴지는 걸까. 내가 볼 때는 태을헌원신공이 그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양 직접 경고를 한 것도 태을헌원신공의 기였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태을헌원신공은 아직까지 세상에 없는 심법이라 어떤 효능이 있는지도 다 파악하지 못했다.
“하앗!”
홍문원은 자신이 뭘 휘두르고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저 마기를 어떤 식으로 품고 있는지는 모른다. 느껴지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럼 칼 안에 밀폐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게 내가 함부로 홍문원을 안 건드리는 이유였다.
허나 홍문원은 내가 나려타곤을 하자 대번 자신감있는 표정으로 바뀌어서 검을 휘둘렀다.
“우와아아!”
형산의 검결들이 유려하게 쏟아진다. 난 당장 경신법을 썼다. 어깨로 칼을 내려치면 몸을 젖히고, 쇄골을 베려고 하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가르려고 하면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한 바퀴 뛰었다.
“이익!”
내가 반 치의 차이로 피해가니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옷깃들과 머리카락들이 잘려나갔다. 그것을 보며 홍문원은 이를 더 꽉 물었고, 구경꾼들은 묘기를 보는 듯 흥분했다.
“와! 잘 피한다!”
“나려타곤도 하는 걸 보면 아예 전문으로 익혔나본데!”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피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 몰랐을 때가 제일 어려웠다. 나도 앞으로 뛰쳐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작정하고 피하기만 한다면 홍문원의 검은 내 몸에 닿을 수 없었다.
쉬쉬쉬쉭!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방적인 공세와 수세. 난 점점 더 여유를 찾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상반된 반응도 들린다.
“홍문원이 압도적이네! 형산파가 그래도 아직 한 수를 남겨두고 있었군!”
“왜 저렇게 피하기만 하는 거지?”
보통 사람들은 공세를 펼치는 홍문원이 나를 압도한다 생각했고, 무공을 볼 줄 아는 고수들은 내 경공을 보며 의아해 했다.
“저 정도면 경공만 수련한 건가?”
“경공만 수련했다고 쳐도, 뒤로 돌아가 수도로 뒷목만 치면 되는데.”
그 중에서 곽진도는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내가 왜 이렇게 피하고 있는지는 모를 거였다.
물론 어떤 고수의 말처럼 내가 뒤로 돌아가 수도를 칠 수도 있다. 사실 내가 홍문원을 제압할 방법은 수천 개에 육박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피하는 건, 더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도망치기만 하는 것이오!”
홍문원은 얼굴을 붉혔다. 이미 호흡은 달리고 있다. 솔직히 용봉지회에 나오기는 좀 부족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난 계속, 계속 파악하려고 했다. 저건 무슨 검인지 말이다. 그리고 홍문원을 사주한 사람은 누구인지.
“그만 도망가라!”
내가 끊임없이 계속 피하자 처음에는 흥미진진하게 봤던 구경꾼들도 반응이 나빠졌다.
물론 나한테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일이었다. 난 내가 할 일이 더 중요하다.
‘일단 당장 사주한 사람을 찾기는 힘들겠군.’
어떤 이기에 홍문원에게 저런 검을 쥐어줬는가. 홍문원 본인은 모르는 것 같은데 누구끼리 작당했는가. 당연히 가장 유력한 건 남궁세가와 형산파의 회동이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거다.
문제는 당장 저 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마기는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 차라리 뺏어서 기관을 뜯어볼까 생각했다. 물론 어떤 충격이 올지 모르니 진법으로 최대한 보강을 하고 말이다.
그때, 정말 느닷없이 나는 엄청난 직감을 느꼈다. 안에 있는 마기가 순도 높은 폭발을 일으키는 직감. 난 그제야 검의 구조를 알아차렸다.
밀폐된 공간에 마기와 자연지기를 분리해서 넣은 뒤, 그것을 안에서 합치는 거다. 기전은 알겠지만 작동 원리는 몰랐다. 분리시킬 때 얼음을 썼다든가, 그런 방식일까.
허나 지금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늦었다는 게 중요했지.
쿠···와아아아앙!
빠른 생각과 짧은 시간들이 나를 스치고, 곧바로 섬광이 나를 덮쳐왔다.
*
쿠···우우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그쪽은 남자들의 연무장이었고, 태실(太室)이라고 불리는 봉우리였다.
숭산을 뒤흔들 폭발이었으니, 여자들의 비무장인 소실(小室)에까지 안 닿을 리가 없었다.
“뭐야?”
“깜짝이야.”
폭발음 이후에 진동은 물론이고, 바위들이 구르고 나뭇잎들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폭발 때문에 산사태가 난 것 같았다. 다행히 산사태는 그리 크지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개로 극명하게 갈렸다. 태실에 아는 사람이 없는 경우 놀라기만 하고, 태실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경우 걱정이 동반되었다. 대기실 관리를 하는 소림사의 무인도 놀랐다.
갈유월은 당혹스러웠다. 곧 자신의 경기였는데 갑자기 태실에서 소리가 울린 것이다.
당연히 먼저 생각난 건 그곳에 있을 금목환이었다.
“아미타불. 소저들은 당황하지 마시오. 용봉지회 지휘부에서 별도의 명령이 없으면 소실의 일정은 계속 진행될 거요. 태실에 아는 사람이 있어 걱정되는 건 알겠으나, 자리를 이탈하지 말길 바라오. 소승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고 오겠소.”
소림사 무인은 그렇게 말하고 빠르게 나갔다. 하긴 연쇄적인 폭발은 없었고,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모르는 이상 일정은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태실과 소실은 같은 봉우리라도 중간에 준극(峻極)이라는 봉우리를 두고 있어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큰 폭발음과 진동이 울렸는데 평범한 일일 수가 없었다.
그때 갈유월은 깜짝 놀랐다. 어떤 아이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그냥 그런가보다 했겠지만, 그녀는 갈유월이 아는 사람이었다.
“···너!”
갈유월이 한유림의 손을 잡았다. 한유림의 냉정한 눈빛이 갈유월의 눈에 비쳤다.
“너도 곧 시합이잖아!”
갈유월이 외쳤다. 모든 사람들이 갈유월과 한유림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직은 부담스러운 갈유월은 이런 상황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한유림이 나가니 당황해서 잡고 본 거다.
“가주님을 뵈러 가야합니다.”
“그건 알지만···”
갈유월의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한유림이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순식간에 건물 바깥으로 나가서 사라졌다.
갈유월은 뿌리쳐지느라 시큰한 손목을 잡고 한유림이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곧 연무장 쪽에서 커다란 육합전성이 울렸다.
“황금세가의 한유림 소저, 사천당문의 당비연 소저 나오시오!”
갈유월은 당황했다. 한유림은 무림인으로써 욕심이 정말 하나도 없단 말인가.
물론 갈유월 역시 그런 욕심은 옅은 편이었다. 지금 객석에는 자신의 사부, 종리운이 있었다. 종리운이 아무리 태실 걱정을 한다고 해도, 별 다른 명령 없이는 객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종리운은 말했다. 본인이 용봉지회에서 아쉽게 떨어져 오룡 안에 못 들었을 때 굉장히 실망했다고. 그러면서 갈유월은 무조건 될 거라며 응원해줬다.
“···흐, 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문간에 있는 발은 어디로 갈지를 강요하고 있다.
다시 대기실로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밖으로 나갈 것이냐.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갈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있던가. 당장 금목환만 해도 엄청난 고수며, 같이 온 곽진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일인지도 모르는데 가는 건 이해가 안 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수없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부정을 뿌리쳤을 때, 갈유월은 바깥으로 뛰고 있었다. 그게 이성적으로 이상한 행동이라는 건 그녀 본인도 알고 있었다.
당장 스승님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은가, 스승님에게 뿌듯함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가.
그렇지만···
갈유월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달리는 데 집중했다.
*
내가 살면서 본 폭발 중 가장 커다란 폭발이었다. 눈이 부시다 못해 아플 정도로 빛나는 섬광도 처음이었다. 눈앞에서 부서진 칼날들이 함께 날아왔다.
“읏!”
정말 간발의 차였다. 내가 저 검에 마기가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폭발 직전에 느낌이 오지 않았다면 나도 꼼짝없이 잡아먹혔을 것 같다.
내가 호신강기로 나를 보호하고 나서 바로 폭발했다.
물론 호신강기를 몸을 둘렀다고 해도 급하게 한 거라, 그 폭발력과 칼날 파편을 전부 막을 수는 없어서 난 뒤로 크게 날아가야 했다. 물론 이거라도 늦었다면 난 고기 완자가 되었을 거다.
폭발력에 날아가는 느낌이 나서, 최대한 등 쪽에 기를 둘렀다.
쿵!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 났다. 마치 충차가 성문에 박히는 소리가 나고, 숨이 턱 막혔다.
“컥···”
충격의 반동 때문에 몸이 앞으로 튕겨 나왔다. 갑자기 목에서 쓴 맛이 올라왔고 난 엎드려서 피를 한 움큼 뱉어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심판은 바로 연기를 걷었다. 홍문원은 칼자루만 잡고 멍하니 서있었다. 역시 기관으로 폭발의 충격이 앞으로 나가게 되어있었다.
난 뒤의 관객석을 바라봤다. 군데군데 있는 고수 때문에 칼날 파편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폭발도 폭발이지만, 핵심적인 건 폭발의 위력을 담은 칼날 파편이었다.
“뭐야, 뭐야?”
“지금 암기를 쓴 거야?”
“진천뢰만큼 큰 소리였어!”
사람들이 웅성인 건 연무장이 패여서 날린 먼지들이 걷어질 때였다. 그만큼 너무 빨리 상황이 흘러간 거다.
내가 호신강기를 펼치고, 폭발이 터지고, 칼날파편이 날아오고, 충격에 날아가고, 심판이 먼지를 걷은 게 눈 깜짝할 새였으니 말이다.
“괜찮느냐?”
세 명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어왔다. 어느새 내 앞에는 곽진도, 적유엽, 팽의석이 와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분노와 당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팽의석과 적유엽은 새까맣게 몰랐다고 해도 곽진도는 나와 무언가 수작이 있을 걸 논의한 사람이다. 곽진도도 그렇지만, 나 역시 이 정도로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원래 연무장 난입은 실격 사유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아우성치지 않았다. 심지어 내 상대인 홍문원마저도. 당연하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직후였기 때문이다.
“저 자식이 암기를 썼다!”
“쓰레기 같은 새끼!”
“정파의 명예를 더럽히는 놈이 어찌 나온 거냐!”
사람들의 분노는 바로 홍문원에게 돌아갔다. 홍문원은 넋이 돌아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리며 바닥에 검병을 떨어뜨렸다. 쩡, 하는 소리가 났다.
저런 폭발음에도 견디는 걸 보니 만년한철이겠거니, 했는데 역시 만년한철이었다. 떨어질 때 울리는 소리가 달랐다.
만년한철에 바닥에 닿고, 소리가 사라질 때 어느덧 홍문원 앞에는 한 사람이 생겼다. 분명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손으로 홍문원을 점혈했다. 눈은 깜빡이는 걸 보니 마혈을 짚은 것 같았다.
“아미타불. 잠깐, 휴회를 하겠소. 소림의 제자들은 연무장을 정리하고, 금목환 소협을 의원에 데려다주도록.”
침착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소림사의 방장이자 올해 용봉지회의 총책임자 진권이었다.
그렇게 진권이 제압한 홍문원과 그가 떨어뜨린 검병을 잡고 가려고 할 때, 내가 무릎을 지지대로 삼아 다시 일어났다.
“잠깐···”
말을 이으려 할 때, 아직 몸 안에 죽은 피가 남아있어 피를 한 번 다시 게워내야 했다. 진권과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괜찮느냐?”
비틀거리던 내 몸을 곽진도가 잡아줬다. 그 역시 내 몸을 만졌으니 알 거다. 깊은 내상은 아니고 잠깐 혈류가 꼬였다는 걸 말이다. 그걸 알자 귀신같이 잔소리가 들어왔다.
“준비한 걸 다 본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네요. 그래도 끝까지 볼 가치는 있었습니다.”
난 곽진도에게 먼저 대답했다. 진권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엄청난 피해를 받았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멀쩡히 대화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나도 곽진도에게서 눈을 돌려 진권을 바라봤다.
적어도 난 이 자리에서 받을 게 있었다.
난 아직 흔들리는 손가락으로, 진권의 손을 가리켰다.
“그거, 저한테 주셔야겠습니다.”
아무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지만 마교의 기관인 그 칼자루를 들고 있는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