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준비한 게 있을 텐데
119화 준비한 게 있을 텐데
심장 소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형적으로 뛰고 있다. 검을 꺼낼 준비가 됐다는 거다. 검이 검집에서 나오자 검극에 눌려있던 매화향이 연무장 전체에 퍼졌다.
‘···막막하군.’
금월상은 그 감각을 맛보고 있었다. 초유열의 자세에선 어떠한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커다란 벽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법.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짐이 되면 안 됐다. 심지어 금월상은 맏이였다.
‘왜 이렇게 막막할까.’
반면 막막한 건 초유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금목환과의 비무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정말 금목환이 자신을 뛰어넘는 고수인 걸까.
물론 초유열도 당시 모든 힘을 낸 건 아니지만, 금목환에게선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기 맞은편에 서있는 금월상. 금목환보다 훨씬 몸집도 크고, 흘러나오는 기도도 심상치 않았다. 황금세가는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이렇게나 훌륭한 무인들이 많다니 말이다.
“화산파의 초유열이오.”
초유열이 먼저 포권을 했다. 맞은편의 금월상은 살짝 당황했다. 인사할 줄 몰랐던 것 같았다.
“황금세가의 금월상이오.”
“긴장을 하시는 것 같소.”
초유열의 말대로 금월상의 몸과 얼굴은 굳어있었다. 용봉지회 예선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봤지만, 본선은 그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여기 연무장 앞줄에 위치한 사람들은 무림의 명숙이다. 어느 세가의 가주, 어느 문파의 장문인, 이름이 알려진 고수 등.
그들은 당연히 연무장에서 조용히 하는 대화도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저 상황이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초유열이 누구한테 먼저 말 거는 건 거의 처음 보는군.”
“하긴, 자기 사부한테도 포권만 하는 녀석 아닌가.”
정말 자신이 궁금한 것만 물어보거나, 흥미가 가는 사람한테만 말을 먼저 걸었던 초유열이다. 황금세가가 용봉지회에서 파란을 일으킨 건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그건 고작해야 예선이었다. 초유열이 인사할 정도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였다. 금월상한테든, 황금세가한테든 말이다.
사람들은 금월상과 초유열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당연히 긴장되지 않겠소. 황금세가라는 이름을 걸고 나왔으니.”
“난 그런 생각을 안 해봤다오. 화산파는 내가 소속한 문파일 뿐이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소. 나는 나를 극복하려 나온 것이지, 화산을 대표하는 게 아니오.”
“그렇군. 그건 나와는 좀 다르군.”
초유열의 말에 화산파 장문인 곽정회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화산이 초유열한테 준 건 거의 없었다. 무공도 거의 본인이 습득했고, 저만큼 경지로 올라선 건 오로지 초유열의 노력과 재능 덕분이었다. 굳이 화산의 무공을 안 배웠어도, 초유열은 중원에 이름을 날릴 사람이었다.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화산파 장문인 입장에서는 씁쓸한 거였다.
“그럼 건투를 비오.”
“당신도.”
초유열과 금월상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서로의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웅성이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모든 소리가 가라앉았을 때, 심판이 외쳤다.
“시작!”
시작 소리와 함께 관객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금월상의 발밑에서 뇌기가 연무장을 가를 것처럼 퍼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다음 넓적하고 커다란 도에서도 뇌기가 천둥소리를 내며 나왔다. 소담스러우면서도 유유한 초유열의 검에 비해 요란하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금월상으로 몰렸다.
“···진짜 강뢰도법을 쓰는군.”
“그러게. 난 그냥 하위호환의 뭔가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금월상이 도에서 뇌기를 뿜어낼 때, 객석 앞쪽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들도 본선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어떤 무공을 쓰는지는 다 사전에 입수했다. 거기서 가장 놀라운 건 황금세가의 출전자 중 한 명이 강운의 강뢰도법을 쓴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거짓이네, 뇌기만 같지 강뢰도법은 아닐 것이네 했지만, 정말 강뢰도법이었던 것이다.
쿠콰쾅!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기가 연무장의 땅을 타며 초유열에게 쏟아졌다.
쿵!
초유열은 검으로 뇌기의 중심을 찍었다. 시퍼런 뇌기가 초유열의 뒤로 비산했다. 그 다음은 초유열의 차례였다.
초유열의 검 끝에서 매화가 하나, 둘씩 펼쳐나기 시작한다. 매화나무의 사계를 눈 깜빡할 새에 보여주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펼쳐지는 매화, 꽃이 활짝피는 순간, 고된 눈발을 버티는 순간, 관객들은 바라보며 검술이라기보다 자연의 신비를 느꼈다. 물론 고수들은 검술을 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열여섯 개!”
“그새 또 늘었다고?”
앞줄에 있는 고수들이 깜짝 놀랐다. 초유열의 검끝에서 핀 매화가 열다섯 개였기 때문이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칠 성에 올랐다는 증거였다.
저 나이에는 사 성만 달성해도 부족함 없는 적전제자라는 소리를 듣는데, 초유열은 벌써 칠 성인 것이다. 심지어 육 성으로 오른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정말 대단하긴하군.”
“···허허. 다음 세대는 화산파군.”
고수들은 초유열을 바라보고, 화산파 사람들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천하제일인이 있는 문파라니. 그야말로 최고의 영예 아닌가. 또한 어찌 저러한 재능이 화산파에 들어갔는지, 배도 아플 노릇이었다.
물론 초유열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모른 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됐지?’
사실 초유열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칠 성으로 오른 건, 바로 지금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수련해도 감도 안 잡히던 칠 성의 벽이 오늘 갑자기 깨졌다는 말이다. 문득 초유열은 금목환과 비무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검로를 강제당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이 무공의 상승은 금목환 때문인 걸까.
“흡!”
초유열이 당황한 가운데, 금월상의 도가 대기를 갈랐다. 푸른 도강들이 몸을 누에고치처럼 감쌌다. 매화들이 강기에 닿고 폭발하고. 강기는 그 틈을 메꾸려 애쓰고, 매화는 침투하려 했다.
“오오!”
사람들은 매화에서 느꼈던 전율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초유열과 금월상이 보여주는 강기의 두터움에 소름이 돋았다.
“저 사람 뭐야?”
“···와.”
초유열이 대단한 걸 보여준만큼 그걸 막아내는 금월상에게도 커다란 관심이 쏠렸다. 연무장 전체에서 천둥이 치는 듯 굉음이 가득 울렸다.
‘···이게 대체 무슨 강함이지?’
초유열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사실 금목환만 염두에 두고 있어 금월상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금월상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고수였다.
금월상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그어지며 모였던 강기가 회오리치며 비산했다.
콰콰쾅!
곧 회오리에서 풀린 커다란 번개줄기가 초유열 쪽으로 향했다.
“우와아!”
초유열이 순식간에 수세로 몰리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용봉지회 본선, 그것도 결승도 아닌 곳에서 초유열이 수세에 놓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쾅!
연기가 퍼졌지만, 그 연기는 곧장 사라졌다. 금월상과 초유열의 칼이 부딪쳐 그 파장이 퍼졌기 때문이다.
“···강운이 대단한 놈을 키우고 있었군.”
“그러게 말일세.”
고수들은 오히려 초유열보다 금월상에게 더 놀라고 있었다. 초유열이 천고의 기재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금월상은 이름도 몰랐기 때문이다.
금월상이 도를 할퀴듯 초유열에게 달려들었다. 초유열이 검을 올려치려고 했지만, 위에서 내리치는 금월상의 힘에 밀려 손목이 살짝 꺾였다.
“오오.”
사람들이 설마, 하는 침음을 섞기 시작한다. 금월상의 강력한 뇌기가 초유열을 압박하고 있었다.
물론 금월상은 알고 있었다. 지금 초유열과 자신에게는 커다란 벽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저 초유열은 당장 당황했을 뿐이다.
‘보여줘야 돼.’
금월상의 도가 더욱 강맹해지고 빨라졌다. 초유열의 발걸음이 뒤로 밀렸다.
채채챙!
사람들은 이제 환호할 생각도 않고 치열한 공방을 감상했다. 서로의 검은 보이지 않았지만, 간간이 비치는 빛과 소리가 부딪치고는 있다는 정도만 알려주고 있었다.
허나 금월상의 공세는 곧 수세로 바뀌었다. 초유열도 마음을 다 잡고 다시 검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거다.
사람들은 오히려 초유열이 아닌 금월상이 밀리자 아쉬워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초유열에게 돈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월상에게 이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연무장 바닥에 피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금월상의 몸에서 긁힌 상처들이 나고 있는 것이었다.
얇게 벌어진 상처들은 곧 깊게 패이고, 연무장 바닥이 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초유열이 심판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중지시켜도 되지 않을까 정도였다. 허나 심판은 중지키시지 않았다. 금월상은 그렇게나 많은 피를 흘렸음에도 눈빛이 또렷했다. 그건 모든 관객들, 고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지 않겠소?”
초유열이 뒤로 쓱 도약하며 말했다. 처음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금월상과 초유열은 애초부터 차이점이 있었다.
금월상이 전력이었던 반면, 초유열은 힘을 남겨두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금월상이 낮은 성취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웬만한 명가의 후기지수들보다 강했다. 또한 처음에 힘을 감추고, 나중에 힘을 드러내는 건 비무에서는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상대에게 전력을 내보이지 않은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초유열도 금월상에게 약간의 미안함이 있었다. 금월상은 상계 사람이라서 그런 암묵적인 것이 있는지도 몰라 그저 눈빛만 불태우고 있을 뿐이지만.
“내가 말했지 않소. 난 황금세가를 보여주러 나왔다고.”
“그만하면 충분히 보여줬소. 지금 주변 사람들의 눈빛을 보시오. 당신에게 모두 감탄하고 있지 않소.”
초유열의 말대로였다. 초유열의 강한 검격도 검격이지만, 오히려 많은 관객들과 고수들은 뜻밖의 실력을 보여준 금월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충분히라는 건 없소.”
금월상은 도에 강기를 계속 불어넣었다. 구름 속에 번개를 담은 듯 도에서 쿠릉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내 동생들은 세가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고 있는데, 맏이인 내가 상처가 좀 났다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초유열의 검에도 하얀 강기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침묵이 내려앉은 연무장에 두 개의 빛살이 쏘아지고 부딪쳤다. 폭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해졌다.
심판이 두 팔을 이용해 연기들을 걷었다. 원래 초유열이 서있던 자리에 금월상이 엎어져있고, 금월상이 서있던 자리를 초유열이 뒤돌아 보고 있었다.
“승자, 초유열!”
심판의 선언이 이어졌지만, 오히려 좌중은 환호보다는 침묵으로 이어졌다. 금월상이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무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곧 누군가 조용히 연무장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들어와 금월상을 업었다.
지금 당장은 금월상과 초유열에게 집중이 쏠려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업는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는 않았다. 허나 초유열은 가까이 봐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앳된 청년. 그는 바로 황금세가의 가주 금목환이었다.
금목환은 초유열을 일별하고 금월상을 업어서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초유열은 멍하니 금목환이 나간 쪽을 바라봤다.
마지막 합을 나누기 전, 금월상이 남긴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 조심하시오. 내 동생은 나보다 훨씬 강하니.
“용봉지회는 잠깐 연무장 정비를 하고 다시 진행하겠소!”
심판이 크게 외쳤다. 초유열은 여전히 연무장에서 내려가지 못한 채였다. 연무장 바닥에 나무 뿌리를 누인 것처럼 보이는 뇌기의 흔적들이 선명했다.
*
나는 금월상을 업고 의원실로 갔다. 용봉지회는 진검을 빼고 하는 비무이니, 당연히 의원실이 있었다.
이미 의원실에는 금수린을 포함해 곽진도도 있었다. 그렇게 피를 많이 흘렸으니 당연히 의원실에 왔을 거라 생각한 거다.
“괜찮은 거지?”
금수린이 내게 물었다.
“당연하죠.”
금월상의 옷에는 물든 피와 딱지들이 많았다. 누가 보면 곧 운명할 정도의 상태 같았지만, 초유열이 일부러 맥과 혈을 피해 피육만 갈라서 큰 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상처는 버틴 금월상이 만든 거라고 봐야 했다.
“그래도 그 초유열한테 이 정도까지 보여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곽진도가 말했다.
“애초에 월상이가 무공을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초유열하고 붙여놨겠지. 원래 용봉지회는 무작위로 붙이는 게 아니거든.”
나도 대충 대진표를 보니 어느 정도 인위적인 게 보이기는 했다.
지금까지 볼만했던 경기는 금월상과 초유열의 비무 뿐이었다. 왜냐하면 본선에서 강자로 뽑히는 이들을 예선에서 올라온 이들이랑 다 붙여놨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강자를 최대한 분배시켜 공정한 오룡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지만, 당연히 악용되고 있을 터였다.
“가끔 문파들끼리 갈등이 있으면 이런데서 은원을 풀기도 해. 물론 구경만하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그래서 이런 대진이 붙은 건가봐요.”
“그렇지. 형산파의 녀석이지?”
“네. 홍문원이라는 사람이더군요.”
“뭐, 들어본 적은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한 합에 끝낼 거냐?”
곽진도가 클클 웃었다.
“아뇨. 최소 열 합은 할 것 같은데요.”
내 대답에 곽진도는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떴다.
“왜?”
“그들이 준비한 게 있을 텐데, 봐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내가 미소를 지었다. 분명 남궁세가와 형산파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었다. 만약 그가 만약 숨긴다면, 난 끝끝내 그것을 파헤칠 거다.
붙이는 건 그들의 마음대로라고 해도, 언제 끝나는지는 내가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