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뭘 가져갈 생각이냐
116화 뭘 가져갈 생각이냐
팽의석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적유엽이 말을 뱉었다.
“목환아. 오룡에게 주는 신물은 단지 신물만의 의미가 아니다. 신물에 담긴 역사가 있고, 그 역사를 받는 것이니 명예로운 거다.”
“그것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켜보건대, 정파 사람들은 명예라는 허울을 앞세우고 있지만 누구보다 실속을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왜 부족할 것 없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들이 오룡삼봉을 차지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는가.
“신물 자체의 가치도 무가지보이지만, 당장 신물을 받으면 문파, 가문에 방문자들이 늘겠죠. 지금도 많은 곳들이 용봉지회나 선불지회에서 받은 신물을 전시해서 방문객들을 부르고, 그에 따른 돈을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방문객들한테는 무의 묘리를 뺀 운동법을 평민들에게 팔고. 무당파가 돈 걱정을 안하는 이유는 유구한 역사도 있지만 삼재검법하고 태극권 때문 아닙니까.”
내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내뱉을 수 없는 문제였던 거다. 그들 역시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니까. 허나 명예를 중시하되 돈을 바라는 건 무슨 생각일까.
애초에 돈은 시기를 불러와 명예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돈이 속됨의 상징이 되었는지.
“···그럼 넌 대체 용봉지회에서 뭘 가져갈 생각이냐?”
많은 이들이 돈을 쫓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속됨의 상징이라고 불러도, 결국 남는 것은 돈이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명예는 극점에 오르지 않은 이상 헛된 것이 된다.
당장 나도 역대 최강 천하제일인으로 불렸던 매화검선이나, 무공의 체계, 흐름만 바꿔놓았던 조사들 정도나 알고 있지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명예만큼 쌓기 어렵고 무너지기 쉬운 것은 어디 있으며, 얻을 때의 고통에 비하여 돌아오는 게 없는 건 무언가.
그렇지만 말이다. 난 그걸 알고 있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명예입니다.”
*
남궁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허리가 굽어 어깨와 머리를 수평에 맞춘 노인이 슬슬 걸어오고 있었다.
“남악검군. 오랜만이오.”
“반말하는 꼬라지는 여전하군.”
평소 남악검군을 알던 사람이 있었으면 저 용태에 많이 놀랐을 터였다. 태산처럼 거대한 몸과 우락부락한 근육은 어디가고, 곱사등이에 어깨가 안으로 몰린 노인만이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타고난 덩치가 사라진 건 아니라고 해도, 전보다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선배들을 대우 안하면 나중에 선배 대접 못 받는다고 말했을 텐데.”
“남궁세가의 가주 정도면 구파일방 장문인과 동급으로 대우해주는 거 아니오. 형산파니까 말할 것도 없지.”
남궁선우는 말했다. 확실히 남악검군, 형산파의 장문인인 옹진수는 노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넌 갈기갈기 찢겨져 독수리의 먹이가 될 거다.”
“아직 주화입마에서 못 벗어났나보군. 무인으로서의 생은 끝난 건가.”
“한 수는 남겨놨지. 보여줄까?”
“사양하겠네.”
옹진수의 주화입마에 대한 이야기는 강호에 이미 널리, 심지어 상세하게 퍼져 있었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옹진수가 왜 주화입마에 걸렸는지 모두 이해했다. 무인들은 당장 형산파가 황금세가를 침략했다는 책임으로 삼 년의 봉문을 당한 것마저도 과한 처사라고 봤다. 분명 옹진수는 더할 것이었다. 근데 거기서 옹진수는 자신의 아들, 옹소후의 수급을 직접 보고 도발까지 당한 거다.
전신에 각인된 모욕감과 마음 속 깊은 곳에 난 상처, 게다가 가뜩이나 다혈질이었던 옹진수는 필연적으로 주화입마를 걸릴 수밖에 없던 거다.
싸늘한 그들 사이로 찻잔이 하나씩 올려졌다. 수장들끼리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면 모를까, 비밀리에 만나는 자리라면 비난과 욕은 흔한 일이었다.
“용건이나 말해라. 빌어먹을 놈.”
옹진수가 차를 한 번에 들이키고 찻잔을 뒤로 던져버렸다. 찻잔이 깨지고 예리한 파편이 비산했다. 그러나 남궁선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본선 용봉지회에 참여하는 형산파 한 명 있지?”
“그래.”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없어. 십 년 뒤면 모를까, 이번 때의 후기지수는 씨가 말랐지. 다 아는 걸 물어보는 건 뭐하자는 말이지?”
옹진수가 으르렁거렸다. 남궁선우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옹진수는 어째 주화입마가 왔지만 성질은 더 더러워진 것 같았다.
“혹시나 가능성 있는 녀석이 나오나 했지. 난 이번에 우리 자식들이 나오니까 꽤 중요하고.”
“아, 기억나는군. 무림맹에서 암수를 쓰다 걸린 버러지들 얘기하는 건가?”
“내 동생의 실책이었지. 자식들은 몰랐다네.”
남궁선우의 대답에 옹진수는 크게 웃었다. 어찌나 크게 웃던지 방의 창틀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가문의 명예에 심각한 타격이 갈 수도 있는 추잡한 짓거리를 가주한테 보고도 안 하고 했다고? 적당히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남궁세가에서 정식으로 돌린 격문을 보게. 거기 다 나와 있으니.”
“공식적인 발표 외에는 할 말 없다, 이거구만”
옹진수가 콧방귀를 꼈다. 공식적인 발표 외에는 할 말이 없다. 모든 장문인과 가주들이 애용하는 말들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번 용봉지회에서 보여줄 거 별로 없어. 여기까지 안 나오면 형산파의 위세가 꺾일게 뻔하니까 억지로 나온 거지.”
“그렇군.”
남궁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형산파 봉문이 풀린 다음 처음 열리는 중원의 축제다. 여기서 안 나오면 자신감이 없다고 알리는 꼴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럼 내 하나 제안을 할 게 있네.”
“뭐가 말인가?”
“이번에 황금세가 가주가 나오는 건 알고 있지?”
옹진수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당연하지만 그는 황금세가에 대해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나. 그 씹어 먹을 놈.”
옹진수의 목소리가 금목환의 이름을 듣자마자 거칠어졌다. 남궁선우의 예상대로였다.
형산파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황금세가. 그 여파로 모욕적인 봉문을 당한 건 물론이고, 후기지수의 핵심인 친자, 양자까지 다 죽었다. 황금세가의 가주 금목환은 옹진수에게 충분히 증오할 대상이었다.
“그 새끼, 초유열하고 대등한 비무를 펼쳤다는 소문도 돌던데.”
“고수와 하수의 싸움도 대등하게 보일 수는 있어. 결과가 안 난 지금은 진실은 당사자들끼리만 알겠지. 뭐,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당신이 금목환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만 알면 됐으니까.”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지. 혹시 그새끼 때문에 여기 부른 건가?”
옹진수의 눈이 흥미로 물들었다. 황금세가의 가주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이 어린 녀석이 싸가지 없이 말을 해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래. 금목환을 죽여. 어떤 방법이든 좋아.”
남궁선우가 말했다. 옹진수는 등을 뒤에 대고 팔짱을 꼈다. 옹진수 본인이 증오를 가지고 있는 것과 남궁세가에 사주를 받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음독 건이 걸려서 남궁세가가 많이 모욕감을 느꼈나보지?”
“그런 것까지 굳이 알려줄 의무는 없네.”
“뭘 아니라고 그러나. 뻔하지. 명가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나도 그런 게 걸렸다면 최소 황금세가 직계 중 하나는 목을 부러뜨렸을 건데.”
옹진수는 낄낄 웃었고, 남궁선우는 속으로 웃었다. 노욕으로 물든 불쌍한 너구리.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본인 같은지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착각해주면 남궁선우만 좋았다.
“그렇다고 해두지.”
“남궁세가가 생각보다 과격한 걸. 하긴 남궁세가를 이렇게 대놓고 물 먹인 곳이 없긴 했지.”
옹진수는 자기 멋대로 납득해버렸다. 하긴 명가는 받은 모욕을 배로 돌려줘야만 했다.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는 방법 중 그것만큼 확실한 건 없었다.
“우리한테 줄 것은?”
노골적인 질문이 들어왔다. 이미 음모라는 한 배를 탔으니, 서로 본 얼굴을 드러내도 괜찮았다. 남궁선우가 말했다.
“원할 때 신단회(新旦會)를 열어주지.”
남궁선우의 말에 옹진수의 표정이 일변했다.
신단회. 그것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모임이었다. 무림의 거대한 두 세력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바뀔 때 열리는 행사였다.
신단회가 열리기 위해서는 열다섯 개의 문파, 세가에서 다섯 개 조직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만큼 열리기 어려운 행사인데, 남궁세가가 열어주겠다고 하는 거다.
“세가를 걸고 진실 된 얘기인가?”
“남궁세가를 걸고 진실 된 얘기지.”
옹진수의 목소리가 신중해졌다. 남궁선우는 일부러 옹진수에게 애가 타라고 시간을 끌은 다음 말을 이었다.
“요즘 해남파가 무림맹에 협조하면서 구파일방에서도 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어. 조금만 설득하면 신단회를 여는 건 일도 아니지. 아무리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독립적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간섭력은 있는 거 알지 않나.”
당연히 알고 있다. 옹진수만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생태계에 대해서 많이 연구한 사람도 없을 거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상생관계였다. 두 집단 모두 중원의 꼭대기에 있지만, 서로 직접적인 경쟁 상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데 오대세가의 수장인 남궁세가가 신단회를 약속한다면, 그건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했다.
굉장히 흥분되는 이야기였지만, 옹진수는 자기 딴에는 최대한 침착하게 반응하려고 했다. 그는 목소리를 짐짓 차갑게 깔았다.
“근데 어떻게 죽이라는 건가?”
“용봉지회에서 죽이는 게 제일 좋지. 그때만한 기회도 없지 않나. 평상시 근처에는 천류유성검이 있을 텐데, 암살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그러기엔 이번에 출전하는 우리 애가 별로인데. 초유열하고 박빙이라는 소문도 돌고, 하북팽가를 길거리에서 눕혔다는 소문도 돌았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은 없으니 한가락은 하는 놈이야. 소문에 반의 반이라도 맞는다면 우리 애는 그놈을 못 이겨.”
그런 것 정도는 남궁선우도 알고 있었다. 사실 남궁선우는 금목환이 초유열과 비등한 것도 사실에 가깝다고 봤다.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남궁세가 무인 다섯이 덤벼도 제압하지 못했지 않은가. 애초에 형산파의 무인이 단독으로 죽이는 건 생각도 안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방법은 우리가 준비할 테니. 대진도 말이야.”
“우리에게 안 알려주겠다는 건가?”
“어차피 상관없지 않은가. 버릴 녀석인데.”
남궁선우의 말에 옹진수는 끄덕였다. 모르긴 몰라도,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 위해선 암수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 또한 용봉지회에서 사망이나 치명적인 중상이 나온다면, 아무리 의도한 게 아니더라도 책임을 져야 했다.
물론 그건 남궁세가가 그랬던 것처럼, 역대 모든 문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변명도 딱 좋았다. 오룡이라는 자리에 눈이 멀어 그런 것 같다고 하면 끝이다.
“좋아.”
옹진수에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원수인 금목환을 제거하면서, 일생의 소원이었던 구파일방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까지 생긴다니.
남궁선우와 옹진수는 그제야 서로 표정을 풀고 웃었다. 같은 웃음이었지만 의미는 달랐다.
*
팽상문의 목도가 갈유월의 허리로 강하게 휘둘러진다. 갈유월은 제자리에서 뛰어 도를 도리어 지지대로 쓴 뒤 팽상문에게 달려들어 발차기를 먹였다. 팽상문은 갈유월의 발차기를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갈유월은 바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마루에 앉아있는 날 바라봤다.
“후우, 후. 어땠어?”
“비무인 걸 이용하지 마. 비무니까 기도 안 넣고 나무 무기를 쓰는 거야. 저 도가 날이 서있고 강기가 담겨있다면 네가 밟을 수 있었겠어?”
갈유월은 내 말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술로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좋은 말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팽 공자는 오호단문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도법이 단순하다는 건 파괴적이기도 하지만, 무궁한 변화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무 형에 메여 있습니다.”
“···아, 네. 알았습니다.”
지금 나는 열흘 뒤에 있을 용봉지회를 위해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넓은 마당에 금월상, 갈유월, 팽씨 삼형제, 팽차월, 한유림이 서로 돌아가면서 비무를 하는 거였다. 나는 그걸 봐주고 있는 거다.
적유엽이나 종리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팽의석도 내 실력을 인정하고 내게 맡긴 거다. 또래에게 배우면 더 자극이 되고 이해도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실제로 그들은 내 지도 아래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무공의 흐름을 보는 눈은 상단전의 힘으로 타고 났으니까.
이제는 무공을 보는 눈 하나만큼은 웬만한 사람에게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곽진도, 적유엽을 포함한 초절정고수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다시.”
내가 말했다. 팽상문과 갈유월이 다시 마주섰다. 이걸로 서른한 번째 비무였다.
이건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었다. 낙양에 와서 꽤 좋은 무공들을 견식하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무공도 그렇고, 훨씬 실력이 늘어난 갈유월도 그렇고, 예선에서 확인한 금월상과 팽차월, 한유림도 그랬다.
‘···그래도.’
역시 인상적인 건 아직도 초유열의 검격이었다. 검환을 꽃피우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꺾이지 않는 절개가 엿보였다.
무공을 잠깐 봤을 뿐인데 초유열이라는 사람의 성격이 보이는 듯했다. 그건 물론이 무공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나에게만 한정 된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직 원숙하지는 않지만 갈유월도 무공에서 본인의 모습이 비어져 나왔다. 그 외는 아직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무공들은 없었다.
모두 비급을 따라하는 것이다. 그건 전부 이해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내 무공을 이해하고 있는가. 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멀리서부터 폭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폭포 소리는 곧 가까워져 칼들이 부딪치는 소리들을 삼켜버렸다. 폭포가 계속 쏟아져 내렸다.
얼마간 폭포를 느끼고 있었을까. 최소 한 시진은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폭포 소리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번엔? 이번엔 어땠어?”
내가 막 눈을 뜨자 갈유월의 목검이 팽상문의 목에 닿아있었다.
이제 막 비무가 끝난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러 사람들도 여전히 비무를 하고 있었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갈유월이 팽상문을 이기는 데는 삼 초식 이내면 충분했으니까.
“···좋았어.”
내가 말했다. 사실 이번 비무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갈유월은 뛸 듯이 좋아했다.
나는 그걸 보면서 몸의 내공을 돌려봤다.
난 느낄 수 있었다.
태을헌원신공의 경지가 팔 성으로 올랐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