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구름은 모이고
114화 구름은 모이고
낙양 전체에 용봉지회 본선 참가자들의 명단이 기재된 방이 붙기 시작했다. 다 세어보니 예순셋이었다. 쓰러뜨린 녀석들 중 본선 확정자가 꽤 많았던 모양이다.
“와. 되게 아는 사람 많다.”
금수린이 말했다. 주변은 웅성거려서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우리는 죽립을 깊게 눌러 써서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양 소협하고, 월상 오라버니하고, 유림이랑 차월이도 있네. 너까지 합하면 아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야.”
금수린이 말한 대로 익숙한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익숙한 범위라면 무림맹의 갈유월, 해남파의 양초원, 금월상, 나, 한유림, 팽차월, 초유열 정도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알고는 있는 범위까지 넓히면 더 많다. 저번 해남파에서 갈유월에게 짓밟혔던 무당의 청진도 있었고 남궁 남매도 있었으며, 형산파의 무인도 있었다.
제일 뜻밖인 건 용봉지회 예선 마지막을 망친 선우진도 있다는 거다.
하긴 명분 하나만큼은 확실했으며, 사람도 없으니 끼워 넣을 수밖에 없었다. 또 천주성이라는 조직의 단면을 보기 위한 이유도 있을 거다. 꽉 막힌 구파일방은 그냥 자신을 모욕했다며 내칠 줄 알았는데, 그만큼 천주성이라는 곳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본선은 언제부터 시작이래?”
“열흘 후입니다.”
“그건 숭산에서 하는 거지?”
“네.”
“와, 소림사 구경은 처음인데.”
금수린이 신난다는 듯 웃었다. 소림사도 신경 쓸 게 많을 거였다.
당장 대진표도 신경 써야 하고, 사람을 통제하는 방법 같은 것들, 준비해야 될 게 천지에 있다.
“근데 황금세가는 뭔데 네 명이나 있는 건가?”
“그러게 말이야. 보통 저렇게까지 내보내지도 않지.”
“오히려 불명예스러운 행동이 아닌가.”
“한 백 명 내보내서 네 명 된 거 아니야?”
금수린은 그 말에 발끈해서 뭐라 하려 했지만, 내가 그녀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은 게 먼저였다.
“괜찮습니다.”
“읍, 읍!”
난 금수린이 진정되자 손을 떼어줬다. 금수린은 억울하단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왜? 저딴 헛소리를 하는데.”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습니다.”
슬슬 낙양의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옷차림들이 다 달랐다. 그냥 중원에 여기저기 있는 문파가 아니라, 뿌리 깊은 문파들이 오는 거다. 당연히 그들은 다른 중원인보다 자존심이 세다. 중소문파 사람들도 황금세가에 고수들이 많다는 걸 끝내 부정했는데, 명가들은 더 하면 더 했지 덜할 리가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마지막 비무를 본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말하지 못할 것이었다.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금목환은 진짜 강했어. 그 초유열하고 상대가 될 정도였다니까?”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개잡소리인가?”
“아주 정신이 나가버렸군. 그게 말이 되는가?”
당분간은 이런 상황이 계속 될 거다. 우리가 보여줘도 그걸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 부정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 말이다. 추락하는 건 쉽지만 올라가는 건 어렵다고 했나. 명성도 전혀 예외는 아니었다.
“보지도 못한 사람을 제멋대로 판단하고 있다니, 아주 꼴불견들입니다 그려.”
황금세가로 왈가왈부하던 무인들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무인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어느 놈이 감히 황보세가의 말에 끼어···”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사람은 황보세가의 사람들이었다. 현재 오대세가의 말석에 위치한 세가. 물론 말석이라도 중원에서 다섯 번째 세가라는 거다. 그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황보세가 따위의 말 좀 끼어들면 어떠한가?”
허나 무게라는 것도 결국은 상대적인 거였다. 황보세가 사람들의 말이 멈춘 것도 그 이유였다. 그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북팽가의 삼형제였기 때문이다.
“···팽가의 자제들이시군.”
“용봉지회에 참가하지도 않는 방계들이 본선 명단은 왜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군.”
팽상문이 비웃었다.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어쩐지 나이들이 좀 있어 보인다했더니, 참가자를 호위하러 온 무사였다.
그렇다면 무사들끼리 나왔을 리 없을 터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커다란 거한이 팽가의 사람들 앞에 섰다.
“팽상문. 말 좀 조심하지.”
“오. 황보웅. 오랜만이군.”
그가 바로 황보세가에서 나온 출전자인 듯했다. 오히려 가장 후기지수같이 생기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본선에서 만나서 박살나면 어쩌려고 이리 경망스럽게 구는 건가.”
“경망스러운 건 네 가문 무사들의 입이었지. 가문을 대표하러 나왔으면 단속 좀 잘 시키게.”
“우리 황보세가가 장사치들의 가문도 마음껏 얘기하지 못한단 말인가?”
황보웅이 당당히 말했다. 그 말에는 오대세가의 권위의식이 팍팍 풍겨 나왔다. 팽상문은 껄껄 웃었다.
“넌 황금세가 가주분께 삼초지적도 안 되는 놈이야.”
“뭐?”
“황금세가 가주분과 화산파의 초 소협이 비등하게 싸운 걸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팽상문의 말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확실히 초유열과 나의 비무는 충분히 화제였다. 물론 예선 때 낙양에 있던 사람들에 한해서 말이다. 심지어 그 마지막 날은 선우진이 관심을 가져갔고, 다른 명가들도 오니 많이 확산이 안 된 감은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지. 중원의 풍문을 다 듣는 순수함이 아직도 자네에게 남아있는 겐가?”
“사실을 얘기할 뿐이네.”
팽상문은 그 말을 하면서 내 곁으로 왔다. 역시 팽가는 우리가 황금세가인 걸 알고 있던 모양이다.
“여기 황금세가의 가주 분이 있으시니, 직접 붙어보면 알겠지.”
“뭐?”
황보웅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황보웅의 눈이 내게로 왔고, 나도 황보웅을 바라보게 됐다. 어쩌다 보니 엮이게 된 셈이었지만, 어차피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면 언젠가는 엮였을 거다. 하북팽가가 그 시간을 좀 더 앞당겨준 것뿐이다. 나는 죽립을 살짝 위쪽으로 올렸다.
“자네가 황금세가의 가주인가?”
황보웅이 물었다. 여전히 오만한 말투였다. 난 대답했다.
“네게 반말을 들을 배분이 아니다.”
“뭐?”
“이런 무례한!”
황보웅은 황당해했고,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기세를 피어 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금월상, 한유림, 팽차월은 물론 하북팽가의 삼형제마저 기세를 올렸다.
“천하의 하북팽가도 이제 끝이군. 상인 가문의 사람을 지키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꼴을 보니 말이야. 가주님이라고? 어이가 없군.”
황보웅 역시 기세를 피어 올렸다. 주변의 무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싸움이 일어날 거라 생각한 거다. 그런데 그 와중에 더 가까이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꼭 이런 놈들 있더라. 쥐어 터져야만 자기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들.”
으르렁거리면서도 앙칼진 목소리. 난 뒤를 돌아보기 전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돌아보자, 많은 사람들이 내게 허리를 숙였다.
“황금세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내게 인사한 사람들은 무림맹 무인들이었다. 하긴 무림맹 무인들은 우리 세가 사람들에게 깍듯하니까.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건 당연히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갈유월이었다. 갈유월은 나와 눈으로 인사를 나누고 다시 황보웅을 바라봤다.
“···이건 또 뭔, 갈 소저 아니시오? 여전히 입이 거치시군. 정파의 법도를 좀 지켜주시길 바라오.”
황보웅은 살짝 당황한 느낌이었다. 여기서 무림맹의 사람, 특히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하나로 꼽히는 갈유월이 내 비호를 할 줄은 몰랐을 거다.
“이 팽가 사람의 말대로, 넌 만나면 한 방에 끝이야. 그리고 그렇게 한 세가의 가주를 부르는 건 정파의 법도에 맞나?”
“상계는 중원의 사람이 아니지 않소.”
“이번 용봉지회에 참여했으면 중원 사람인 거지. 중원이 뭐 그리 대단한 곳이야?”
사실 이건 늘 애매한 문제였다. 황금세가의 가주는 높은 배분인가. 중소문파의 가주와 다른 명가의 가주는 당연히 동배분이 아니다.
황금세가는 천하제일거부의 세가긴 하지만, 중원에서 무력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그들이 내 배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참나. 어이가 없군. 무림맹하고 황금세가하고 붙어먹는다더니. 그렇게 돈에 홀린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 건가 싶소. 무림맹이라는 이름이 아깝소이다.”
황보웅이 말을 이었다.
“용봉지회 예선을 뚫었다고 다 중원인은 아니오. 알다시피 용봉지회 예선은 허수가 많고, 역대 용봉지회를 봐도 예선에서 올라온 사람이 오룡에 들어간 적은 손에 꼽소. 근데 이 오대세가의 사람인 내가 일개 상계놈한테 어찌···”
“일개 상인 가문의 사람이라니. 그건 본파 입장에서도 좀 불쾌한 말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황보웅의 목소리를 탁 잘랐다. 내가 돌아보니 그곳에는 푸른색 무복과 푸른색 매듭을 한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 중 제일 앞에 있는 건 양초원이었다.
“해남파다!”
“해남파도 왔었군. 이제 슬슬 다들 오나봐.”
주변의 사람들이 웅성댔다. 양초원은 누가 웅성대든 말든,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사숙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입니다. 사질.”
자연스러운 인사에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이건 해남파에서 직접 내 배분을 인정한 것이었으니. 여기 사람들 중 내가 해남파에 적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고작해야 속가제자로 봤을 거다.
당연하다. 본산이 아닌 중원에서 독자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난 적유엽의 배려로 중원에 파견 나온 해남파의 사람으로, 본산 제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런 사정까지는 그들을 몰랐을 거다.
“금목환 사숙께서는 해남의 본산 배분을 정확히 따르고 있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황보세가의 소가주라고 해도, 해남의 어른께 너무 무례한 것 같군요.”
양초원이 말했다. 황보웅은 당황한 눈치였다. 오대세가는 오대세가끼리 싸우지만, 구파일방과 싸울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은원을 만들면 안 좋은 쪽이었다.
“···거 참. 어이가 없군. 대관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저 녀석의 배분을 인정할 생각이 없소. 다른 세가나 문파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일 거고.”
“눈에 보이는 걸 인정하지 않다니, 소인배로군.”
황보웅은 팽상문의 이죽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사람들을 데리고 헐레벌떡 빠져나갔다. 날 비호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당장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꼴을 보며 갈유월이 말했다.
“아쉽네. 그냥 본선에서 찌꺼기 한 명 떨어뜨리는 건데.”
“어차피 본선 전에 사전 비무는 안 돼. 그럼 둘 다 실격이야.”
내가 말했다. 그제야 갈유월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얼마 안 됐잖아.”
“그렇다면 그런 거고.”
갈유월은 다시 나를 앞에 두자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제는 별 것도 아닌 일이라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난 갈유월과 인사를 마치고 양초원을 다시 바라봤다.
“사질도 오랜만입니다. 장문인께서는 오셨습니까?”
“네. 지금 거처에서 쉬고 계십니다.”
“용봉지회 본선 전에는 어른들이 안 돌아다니는 게 암묵적 규칙이니까.”
갈유월이 덧붙였다. 여기서 아이들끼리 기싸움을 마음껏 하라는 말이었다. 괜히 어른들이 끼면 더 큰 싸움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이 주인공이 아니게 되니 말이다. 아마 종리운도 낙양에 왔지만 거처에서 쉬고 있을 터였다.
그때 하늘에서 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매의 울음소리였다. 매는 내 머리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있었다. 내가 위로 팔뚝을 내어주자 매는 내 팔목을 꽉잡았다.
“···아프겠다.”
갈유월의 말을 뒤로하고 난 매의 다리에 묶여있는 종이를 펼쳤다.
- 남궁세가와 형산파가 정주(鄭州)에서 회동함. 중명각주 명재희.
그래. 이런 수작이 나올 때가 됐지. 이들 뿐일까. 이미 사람들은 이합집산하고 동상이몽하며 각자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분주하게 움직일 거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매를 날려 보냈다. 매는 고기가 없어서 아쉬운 눈치였지만 다시 남창 쪽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모여서 식사 정도는 괜찮겠지. 어른들이 연금상태는 아니니까.”
“뭐, 그렇긴 하지? 스승님 뵈러 갈까?”
갈유월이 작게 웃었다. 내가 무림맹주만 염두에 뒀다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해남 장문인하고, 도존님도 초대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양초원과 팽가 삼형제는 자신들의 말이 나올 줄 몰랐는지 눈이 번쩍 떠졌다.
“황금세가가 초대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저희는 당연히 가능합니다.”
양초원이 말했다. 그로서는 거부할 사항이 없었다. 어차피 장문인도 나를 보고 싶어 할 거였으니까. 대신 당황스러워 하는 건 팽씨 삼형제들이었다.
“조부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럼 여쭤봐주시고 저희 거처 쪽으로 사람 하나 보내주시죠.”
“그러겠습니다.”
팽가 삼형제는 자신의 거처 쪽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들이 움직이는만큼, 난 배로 더 움직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