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명성을 올릴 때
112화 명성을 올릴 때
용봉지회도 열흘 차가 됐다. 처음에 사람이 많았을 때는 하루에 한 번 비무를 했는데, 이제는 하루에 세 번씩 비무를 할 정도였다.
인산인해였던 낙양도 듬성듬성해진 건 당연했다. 탈락한 사람들과 문파들이 알아서 빠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를 보는 시선은 많아졌다. 그 말은, 우리가 거리에 나가면 거의 모든 이가 우리를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정말 살벌하게들 쳐다보는구나.”
“그러게요.”
금월상의 말대로 그들의 눈빛은 예전과 달랐다. 심지어 초반에는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약자와 강자가 싸우면 약자가 인정받기 마련이니까. 물론 그들의 머릿속에서만 그렇지만.
허나 우리가 계속 파죽지세로 올라오자, 불편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긴 거다. 유일하게 자존심이 있는 동물이 사람이라 그런 걸까. 처음에는 나돌지도 않았던 악의적인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황금세가가 저렇게 강한 후기지수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이 안 돼지.”
“아마 무림맹 무인들이겠지. 원래 황금세가가 무림맹 수족 아닌가.”
“그럼 소속을 바꿔서 나온 건가?”
“그렇다고 봐야지. 한 문파당 나올 수 있는 인원수가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으니까. 무림맹이 추악한 짓을 하는군.”
“독을 썼다는 얘기도 있다네. 상식 상 황금세가 사람이 모산파 사람을 이기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음해도 많았지만, 나는 세가 사람들에게 절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는 격이다.
“근데 이 정도까지 별의 별 소문이 나도는 거 보면, 뭔가 조직적인 것 같지 않느냐?”
“그런 걸까요.”
무색무취했던 눈빛들에 이제는 색깔들이 묻어있다. 경계심을 뛰어넘은 적개심. 금월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금월상도 그렇지만, 한유림과 팽차월은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그들은 잘못한 게 없으니까.
우리는 곧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상대적으로 한산해진 낙양만큼, 빽빽했던 연무장도 듬성듬성해졌다.
슬슬 다들 이름을 알 것 같다. 최대한 열 번 넘게 전투를 해서 올라온 사람들이다. 이제부터는 허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연무장에서도 예외는 없이, 적대적인 눈빛은 계속됐다. 정말 금월상의 말대로 뒷공작이 있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거라. 이번 용봉지회에는 화산파 최고 기재라고 불리는 초유열도 있고, 신비스러운 천주성의 사람도 있다. 우리만 주목받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
“남궁세가가 입김을 좀 불었을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남궁세가가 지어낸 풍문은 아닐 겁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받을 이유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상가입니다. 그냥 상가도 아니고 중원 전체를 대표하는 상가죠. 화산파의 초유열은 이미 강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고, 천주성도 고수들의 집단인 걸 이제 중원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닌 겁니다.”
“근데 처음에는 좀 우호적인 시선도 많지 않았느냐. 응원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아마 그들은 우리 황금세가가 지루한 예선의 감초 역할만 하기 바란 거겠죠. 이렇게까지 치고 올라오는 건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건 자신들의 자리니 말이죠.”
“어렵구나.”
“저도 처음엔 어려웠죠.”
집 바깥에서 산 것보다 집 안에서 살았던 게 많았던 우리는 잘 모르겠다. 무인들의 사고방식은 상인들의 사고방식과 틀리니 금월상은 더욱 헷갈리리라.
우리는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기다렸다. 난 일단 지금 상황에서 세가 사람들에게 혼자 다니는 걸 조심하라고 말했다. 최소 네 명씩은 붙어 다니는 걸 권장했다.
며칠 전 팽의석과의 만남에서 그가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난 정은 돌을 맞는다고. 늘 용봉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생문파는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온갖 음해를 당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토대로 주의사항들을 얘기하다 보니 오늘도 용봉지회 예선이 시작됐다.
“화산파의 초유열 소협. 태산파(太山派)의 유구찬 소협.”
이제부터는 이름을 어느 정도 아는 문파들만 나왔다. 화산파야 말할 것도 없고, 태산파도 과거 오악검파의 명성에 미치지는 못해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는 명문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 다들 무게감 있는 곳에서 나온 사람들이라서, 서로 인사하고 덕담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간도 넉넉하니 심판도 암묵적으로 봐주고 있었다.
“한 수 부탁드리오. 소협.”
“당신이 내게 한 수를 보여줬으면 좋겠군.”
물론 그렇다고 다 친절한 건 아니었다. 초유열은 자칫하면 도발로 들릴 수 있는 말을 아무렇게나 했다. 유구찬은 살짝 심기가 상한 듯 바로 기수식을 취했지만, 초유열의 얼굴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내가 볼 때는 초유열은 별 생각 없이 한 말 같았다.
“시작!”
유구찬이 바로 출수했다. 원래 고수들한테는 선수를 주면 안 됐다. 수비만 하다가 일방적으로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구찬도 초유열에게 이길 거라는 생각은 안 할 것이었다. 허나 이왕 떨어질 거라면 멋있게 떨어져서 중원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 시켜야 했다.
물론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유구찬의 움직임은 빨랐지만 느려보였고, 초유열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빨라보였다.
초유열이 나오면 으레 그랬듯 매화향이 짙게 퍼졌다. 검을 내지르는 방향마다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확실히 고절해 보이는 무공이었다.
“하아아앗!”
유구찬과 초유열의 검이 맞닿는다고 생각할 때였다. 초유열은 그때 검을 부딪치지 않도록 흘린 다음에 몸에 있는 마혈 여섯 개를 짚어버렸다.
쿵!
속절없이 유구찬의 몸이 무너졌다. 유구찬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 초유열은 여섯 번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차이였다.
“승자. 화산파의 초유열 소협.”
난 그때 초유열의 눈에서 아쉬움의 눈빛이 살짝 스치는 걸 봤다. 아무래도 초유열도 확실한 목적을 갖고 예선에 참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적이 안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고.
하지만 난 이미 목적을 거의 다 이뤘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황금세가가 이름을 알렸다는 게 그것이었다.
“다음, 황금세가 금월상 소협. 산동악가 악무진 소협.”
그때 금월상의 차례가 됐다. 상대는 창법의 명가인 산동악가(山東岳家). 창은 중원에서 흔하지 않은 무기였지만, 난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시작!”
쿠르릉!
창이 찌르기도 전에 바로 격차를 좁힌 금월상이 도병으로 악무진의 허리를 노렸다. 도신도 아닌 도병. 이제 금월상도 슬슬 무인의 수준이 보이는 듯했다. 악무진은 창을 세워서 어떻게 방어해보려 했지만 패도적인 뇌기에 창대가 부서지고 갈비뼈에 직격당하고 말았다.
“크악!”
옆으로 데굴데굴 구르면서 날아간 악무진은 연무장 바깥까지 떨어져버렸다.
산동악가라는 이름 치고는 아쉬운 실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산동악가의 약함보다는 금월상의 강함을 지적했다.
“상가가 산동악가까지 이긴다고. 아주 어이가 없군.”
“이 정도면 소림에서 부정행위를 확인해야 할 것 같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저런 무공을 가지고 있었으면 진작 나와서 강호를 주유했을걸.”
이제는 그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게 아마도 우리가 겪어야할 산 중에 하나였다. 금월상은 호쾌하게 이겼음에도 찝찝한 표정으로 내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다. 그나저나 무인들은 선입견이 강하구나. 이름으로 싸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말끝마다 상가, 상가. 이젠 좀 지겹구나.”
그 착한 금월상도 이제는 분노를 표출할 정도였다. 그들 상식에서는 상가가 명문 무가를 이기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다.
“저런 눈빛을 앞으로 얼마나 더 받으라는 건지.”
금월상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상인들도 앞에서 티를 못 내는 것뿐, 무인들이 상인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무인들을 싫어했다.
상인 입장에서는 모든 사건의 시작은 무림인에서 시작 되니 말이다. 나도 그렇지만, 금월상도 무인보단 상인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인이건, 무인이건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았다.
“곧 바뀌겠죠.”
“그래, 그러겠지.”
금월상은 그 말을 하고 피식 웃더니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형을 달랠 줄도 알고, 많이 컸구나.”
“다음, 황금세가 금목환 소협. 연가장 연문휘 소협.”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심판이 날 호명했다. 딱히 다를 것도 없었다. 여기서만 열 번이 넘는 비무를 했다. 상대도 그렇다. 서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시작."
쾅!
심판의 말과 함께 끝이 났다. 관객들이 보기에는 시작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벽에 박힌 걸로 보일 테다.
“방금 뭔 일이 있었던 거야?”
“···나도 못 봤네.”
내가 뻗은 장심을 못 본 걸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승자, 황금세가 금목환 소협.”
심판도 이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듯 바로 말했다.
“저 초식 하나만 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장법 하나는 조심해야겠어.”
난 이 용봉지회에서 아직 송로를 꺼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저들은 내가 권법가라고 마음대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러려니 했다.
아직 때를 기다려야 할 때였다. 하북팽가가 우리에게 주문한 건, 본선 전에 최소한의 발언권을 얻을 수 있는 명성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그건 굳이 하북팽가가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명성은 얻겠다고 달려들면 멀어지는 법.
내가 여기서 멍청하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루에 가서 시비를 걸고 다니고, 다 때려 부숴도 오히려 명분이 없으니 명예는 실추되기 마련이다.
보여주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한참 무르익었을 때. 그건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 정해주는 거였다.
전보다 사람은 많이 없었지만 무인들은 떠나지 못했다. 비무가 전처럼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슬슬 한유림과 팽차월, 금월상도 쉽게 이기지는 못했다.
“승자, 황금세가 팽차월 소협.”
당장 지금 이긴 팽차월도 땀에 범벅이 돼있었다. 금양검법을 극성으로 쓴 탓이었다.
상대방이 검의 명가인 황산파(黃山派)의 기재였던 것 같다. 난 잘 몰랐지만 꽤 유명한 사람인 듯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허, 황산의 조 소협도 깨지는군.”
“황금세가라는 것들은 대체 어떻게 된 놈들이지?”
그들로서는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이제 예선도 막바지. 남아있는 사람은 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예선에서 본선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딱 스무 명이라고 했다. 총 지원자 수가 이천 명을 넘었다고 하니, 백 명 중 한 명꼴로 본선으로 올라가는 셈이다.
우선권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구파일방, 오대세가, 무림맹을 포함한 몇몇 곳들을 포함해서 마흔 네 명.
본선의 인원은 합쳐 총 예순 네 명으로 펼쳐진다. 아마 우리가 명성을 얻게 될 곳은 거기일 터였다.
“다음, 황금세가 금목환 소협···”
난 말을 듣자마자 앞으로 걸어갔다. 이것만 마치면 오늘의 일은 끝이었다. 난 이미 두 번의 비무를 끝냈으니 말이다.
거처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았다. 예선이 끝나고 본선까지 남은 시간으로 할 일 정리를 해야 했다.
본선은 예선과 달리 미리 상대가 고지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전 정보를 취득하는 게 가능해진다. 금월상, 한유림, 팽차월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무공을 쓰는지 정도는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화산파의 초유열 소협.”
그러나 심판의 말 때문에, 내 저녁 계획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저 멀리서 오는 초유열의 입이 희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그를 바라보다가, 맞서 미소를 지어줬다.
역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때는 알아서 찾아왔다.
명성을 올릴 때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