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이다
101화 황금세가의 가주다
“씨잉, 이게 뭐야.”
어제 맹주실에서 남궁세가 사람들이 나갔을 때 그녀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황금세가의 회계원이라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려고 할 때, 종리운이 둘이 나눌 얘기가 있다며 축객령을 내린 거다. 스승님이 원망스러운 적은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간 갈유월은 회계원이 금목환일까를 계속 생각했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금목환과 얼굴은 다르고, 행동은 같고,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서인가 애매했다.
직감은 금목환이 맞다고 하고 있지만, 맞으면 숨길 이유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머리를 굴려도 얼굴 때문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아.”
문득 갈유월은 어릴 때 금목환에게 했던 행동이 생각났다.
- 꺼지라고. 내 말 이해 못해?
물론 마지막에 손수건을 주면서 나름 미안하다는 표시를 했지만, 그거야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다. 받자마자 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금목환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니까.
설마 아는 척을 하기 싫은 걸까. 갈유월은 가능성 높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과거 본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아주 합당했다.
“으으음···”
갈유월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크게 침상에 머리를 박았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괜히 서글퍼졌다. 그렇다면 누굴 탓할 것도 없이 본인의 잘못이라는 얘기였으니까.
갈유월은 울적해졌다가, 기분이 나아졌다가를 반복하다가 다음 날을 맞이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무를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
갈유월이 연무장에 도착하니 심판을 맡은 무림맹 무인 한 명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보였다.
“아, 갈 소저. 오셨군요.”
“다시 한 번 비무에 승낙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남궁홍학과 남궁홍예라고 했나. 남매는 갈유월에게 인사했다.
“네.”
“참관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원래 스승님이 참관하는데, 그쪽 어른하고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이번 비무는 남궁세가의 요청대로 비공개 비무였다. 비무의 관련자들만 참관할 수 있었다. 남궁세가에는 남궁세가의 호위무사 다섯이 붙어있었지만, 갈유월에게는 없었다.
딱히 서운하지는 않았다. 스승님도 할 일이 있는 거고, 합격진 하나만 봐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비무는 이 각 정도 뒤에 하겠습니다.”
무림맹 무인이 말했다. 남궁세가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편 외곽으로 갔다. 갈유월도 계단을 내려왔다.
무림맹 연무장도 많이 바뀌었다. 공터 같았던 옛날과는 달랐다. 지금은 나름 계단을 올려 깔끔하게 단으로 만든 것이다. 좌우 벽에는 의자와 차양도 있었다. 쉬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었다.
외곽으로 온 갈유월은 의자에 털썩 앉고 남궁세가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멀어서 손가락 마디보다 작게 보였다.
“짜증나네.”
갈유월은 갑자기 화가 났다. 명가의 후기지수라는 것들은 늘 이랬다. 자신에게 비무부터 신청하고 봤다.
그리고 비무가 끝나면 사람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자신이 진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인정하되 질시하는 사람들 등.
남궁 세가 사람들은 어떤 부류일까. 그들은 좋은 반응을 보여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남궁 남매의 눈빛에 적의가 담겨있는 걸 느꼈으니까. 그건 감출 수 있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었다. 저들은 분명히 자신을 꺾어야 할 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호승심이든, 뭐든 받는 입장에서는 불쾌하기 마련이었다.
“뭐가 짜증나?”
“뭐긴 뭐야, 쟤들···”
갈유월은 무심코 대답하다가 소름이 돋았다. 기척도 없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 거다. 갈유월은 앞으로 튕겨져 나가며 뒤를 홱 돌아봤다.
“안녕.”
덤덤한 인사였다. 허나 갈유월은 덤덤하게 반응할 수 없었다. 그토록 얘기를 하고 싶었던 황금세가의 회계원이 앞에 있었으니 말이다.
잠이 확 깼다. 갈유월은 말을 하지 못했다. 머리가 새하얀 백지로 변한 거다.
“아, 맞다. 잠깐만.”
회계원은 자신의 목 쪽으로 손을 넣더니, 찌이익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가죽이 뒤집어져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 너···”
갈유월은 그제야 입을 뗐다. 벗은 가죽 뒤에 있는 얼굴은 금목환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얼굴의 형태보다는 갸름하게 깎여있었다.
“···정말, 너야?”
“응.”
얼굴을 보니 그제야 목소리와 맞춰졌다. 왜 몰라봤는지 이해 안 될 정도로, 금목환 그 자체였다.
갈유월은 울컥했다. 오 년 동안 금목환을 걱정해왔는데, 정작 걱정을 받은 금목환은 너무나 멀쩡하고 덤덤했다. 그렇다고 걱정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궁색하기 때문이었다.
“여, 여기는 왜 왔어?”
갈유월이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새침함이었다.
“네가 걱정돼서.”
허나 그 새침함은 금목환의 대답에 바로 무너졌다.
“···뭔 소리···”
당황한 갈유월이 작게 목소리를 낼 때, 연무장 중앙에서 큰 소리가 울려왔다.
“갈 소저님, 이제 올라오실 시간입니다!”
금목환과 갈유월의 눈이 동시에 연무장으로 돌려졌다. 이미 남궁 남매는 중앙에 서있었다. 그들은 뭔가 상의를 하고 있었다.
그때 금목환이 갈유월에게 성큼 다가왔다. 갈유월이 깜짝 놀랐다.
“갈유월.”
“어?”
“잠깐만 가만히 있어. 좀 이상한 느낌이 날 수도 있어.”
무슨 이상한 느낌? 묻기도 전에 금목환은 손을 올렸다. 갈유월이 움찔했다. 바로 금목환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읍.”
갈유월은 몸에 닿는 촉감에 깜짝 놀랐다. 금목환이 한 건 점혈이었다. 갈유월은 소리가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들어본 적도 없는 점혈 방법이었고, 무슨 작용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금목환은 곧 손을 거두더니 말했다.
“다 했어.”
“···뭐한 거야?”
“끝나고 설명해줄게.”
갈유월은 뒤늦게 얼굴이 붉게 물들였다. 몸에 손을 대는 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허나 금목환은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괜히 분해진 갈유월은 그 분노를 남궁세가 사람들에게로 돌렸다. 무슨 합격진이든, 최대한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
남궁홍학은 아까와는 상반된 얼굴로 올라오는 갈유월을 바라봤다. 아까는 피곤하고 귀찮다는 기색을 풀풀 풍겼는데, 이번에는 얼굴빛이 발갛게 물들인데다가 비장하기도 했다.
두 모습은 상반되어 있었지만 모두 만고절색(萬古絶色)이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부드러운 아미, 반듯한 코와 분홍색 빛이 도는 입술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황금세가놈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여기 왜 왔을까는 궁금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살초는 물론이고, 검기도 안 됩니다.”
갈유월이 다 올라오자 무림맹 무인이 말했다. 남궁세가의 명분은 합격진을 보여주는 것뿐이니, 그런 규칙이 설정된 건 당연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무림맹 무인은 그 말을 하고 바로 뒤로 빠졌다.
순간 풀피리 소리가 삐익,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남궁홍학은 크게 놀랐다. 어느새 갈유월이 나란히 서있던 남궁홍학과 남궁홍예 사이를 파고든 것이다.
“엇?”
이건 예상 밖이었다. 이렇게 빠를 줄도 몰랐지만, 이대일인데 공격적으로 오는 건 너무 예상 밖이었다.
가운데로 파고든 갈유월의 검로가 동시에 좌우를 그어나갔다.
채챙!
대장간에서 울릴 법한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남궁홍학은 이를 악물었다. 검기가 발현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묵직함이라니.
“이렇게나 오만할 줄이야!”
남궁홍예가 외쳤다. 갈유월이 코웃음을 쳤다.
“뭐가요?”
“두 명인데도 들어오다니,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요!”
그 소리가 신호탄이 됐다. 남궁 남매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들의 검을 쥔 자세가 달라졌다. 보여준다던 합격진이었다.
그들의 검에서 남궁세가의 절기, 창궁무애검법이 펼쳐졌다. 패도적인 검격이 양방향에서 시작됐다.
갈유월은 발로 원형을 그리며 검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기울어진 원형의 궤적이었다. 신풍검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쾌검이었다.
허나 남궁 남매도 기재는 기재였다. 어릴 적 체계적인 훈련과 영약으로 만들어진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갈유월은 그들의 중앙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남궁 남매는 갈유월의 경로를 차단하면서 위치를 내주지 않았다.
“읏!”
남궁 남매의 검법이 모든 방위에서 날아왔다. 갈유월은 검을 휘둘러 막고는 있었지만 궤적은 점점 좁아졌다.
그렇게 압박을 당할 때, 갈유월은 남궁홍학의 자세에서 틈을 봤다. 겨드랑이쪽 급소가 완전히 열린 채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갈유월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남궁홍학 쪽으로 자세를 바꾼 다음에 검을 찔러 들어간 것이다. 조금만 찌르면 바로 움직이지 못할 급소.
남궁홍학의 검과 갈유월의 검이 엇갈렸다. 다만 갈유월은 남궁홍학의 급소를 노렸고, 남궁홍학은 갈유월의 팔뚝을 노리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교환이었다.
“뭔 기본기도 안 된···”
갈유월은 검을 질러 들어가면서 오싹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초보적인 실수를 한다는 건 수상했다. 하지만 이미 검은 회수할 수 없었다.
갈유월의 검은 남궁홍학의 급소에 닿았고, 남궁홍학의 검도 갈유월의 어깨를 스쳤다. 남궁홍학은 그것만으로도 팔이 마비되어 검을 떨어뜨렸다. 이제 몸을 틀어서 뒤에 있는 남궁홍예를 상대하면 됐다.
그때 갈유월의 어깨가 찌릿하게 반응했다. 상처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거다.
“윽!”
갈유월은 갑자기 눈이 흐릿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건 분명히 독이었다.
그때 뒤에서 검을 휘두르던 남궁홍예가 검의 경로를 바꿨다. 그 눈빛과 바뀐 검의 경로. 참관하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비무를 하는 사람은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고의성을 띄고 있는 검격이었다.
움직여야 되는데, 사지에 힘이 풀려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질러 들어오는 남궁홍예의 검이 느리게 보였고, 이상을 감지한 무림맹 무인이 달려오는 것도 느리게 보였다. 그렇게 맞닿기 직전, 갑자기 갈유월의 몸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쾅!
그 후 남궁홍예의 검이 갈유월의 명치를 찔렀지만, 갈유월은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몸을 감싼 기가 방어를 해준 것이다. 남궁홍예뿐 아니라 갈유월도 같이 놀랐다. 이 부드러운 기운은 금목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까 점혈을 할 때 심어둔 것 같았다. 점혈로 그런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흐아압!"
허나 남궁홍예는 멈추지 않았다. 남궁홍예의 검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직접 상대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었다. 검기를 일으키고 있는 거였다. 갈유월은 눈을 꼭 감았다. 극심한 고통이 예상됐다.
쾅!
그때 바로 앞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갈유월은 위를 올려다봤다. 남궁홍예와 갈유월 사이에, 사람 한 명이 껴있었다. 그건 당연히 금목환이었다.
“···뭐, 뭐하는 짓거리냐!”
남궁홍예가 당황해서 외쳤다.
“정당한 비무에 끼어들다니!”
급소를 찔려 엎드려있던 남궁홍학이 외쳤다.
갈유월은 부아가 치밀었다. 가뜩이나 오랜만에 만나서 바뀐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런 더러운 암수를 쓰고 정당한 비무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뻔뻔한 새끼들! 너희들이 그러고도 정파야?”
갈유월이 외쳤지만, 남궁홍예는 코웃음을 쳤다.
“갈 소저, 왜 그러시죠? 무리하게 들어온 건 당신인데.”
“···너 미친년이야?”
“단어가 험악하시네요.”
남궁홍예의 잡아떼는 반응에 갈유월은 눈에 불을 켰다. 사지에 힘이 풀리지만 않았으면 당장 검기를 휘둘렀을 터였다.
바로 남궁세가의 무인들 다섯 명도 연무장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금목환을 둘러싸고 검을 발검했다.
“상계의 잡종 따위가, 지금 비무를 망친 거냐?”
보니까 남궁세가 무인들도 검에 독이 발라져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 무림맹 무인도 금목환과 갈유월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저 년이 나한테 독을 썼다고!”
갈유월이 외쳤다. 남궁홍예는 손으로 입을 우아하게 가렸다. 갈유월이 볼 때, 남궁홍예의 눈에는 음독을 실패한 아쉬움이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성격이 천박하다더니, 깔끔하게 인정하질 못하네요.”
“갈 소저, 이건 무림맹에 직접 항의를 해야겠군요. 남궁세가의 명예를 이렇게 훼손하시다니요.”
남궁세가의 무인들과 갈유월의 눈빛이 서로 부딪쳤다. 그때 무림맹 무인이 나섰다.
“그만하시지요! 제게 피독주가 있으니 검사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심판을 맡은 무림맹 무인은 옥색 원반을 꺼냈다. 그 원반이 바로 독을 가려내는 피독주였다. 독을 감지하면 시퍼렇게 물들고, 아니면 아무 반응도 안 하는 물건이었다.
“갈 소저, 잠깐 확인하겠습니다.”
“그래.”
갈유월은 남궁홍예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무림맹 무인이 피독주를 갈유월의 상처에 댔다. 색깔의 변화는 없었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그러면 그렇다는 듯이 비웃었고, 갈유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건, 사기야!”
갈유월이 이를 갈았다.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암수였다니. 그러나 무림맹 무인마저 갈유월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만 가야겠군요. 억지 쓰는 걸 보기 힘듭니다.”
남궁홍학이 말을 덧붙였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무림맹 무인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듯했다.
“잠깐.”
그때 쭉 가만히 있던 금목환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금목환이 무림맹 무인을 바라봤다.
“가서 맹주님을 모셔와. 남궁선용도.”
금목환의 말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발끈했다. 나이도 어린 상계 녀석이 남궁세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어처구니 없는 것도 유분수였다.
“네놈이 뭔데 맹주님과 숙부님을 오라마라 하지? 상계 자식이 주제를 모르는구나.”
남궁홍학이 금목환을 노려보았다. 금목환은 남궁홍학을 보지도 않고, 무림맹 무인을 계속 바라봤다.
“황금세가 가주, 금목환이다. 빨리 불러와.”
그 말에 갈유월을 제외한 연무장에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혼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