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맹주실로 불러와
98화 맹주실로 불러와
나는 짐 하나 없이 황금세가 정문에 섰다. 좌우 소매를 들어 새 옷을 확인했다. 감색 심의(深衣)와 금색 테두리. 내가 알던 황금세가의 옷과 같았지만, 전에 입었던 건 테두리가 닳아 없어져서 바꾼 거다. 새옷은 풀도 아직 덜 죽어있을만큼 뻣뻣했다.
“오자마자 떠나보내네. 이 누나는 슬프다. 오라버니들은 안 슬프세요?”
정문 앞에서 금수린은 짐짓 우는 척을 했다. 무안하리만치 금월상과 금화청은 대응을 안했다. 옛날에 일방적으로 놀림을 받던 금월상도 이제 조금은 바뀐 것 같았다.
“잘 갔다와라. 나갔다 들어오면 옥묘각에 한 번 다시 들러라. 애들한테 보여줄 기회도 줘야지.”
“그래야죠.”
나는 한유림을 먼저 떠올렸다. 내게 신옥주를 준 아이. 그것 때문에 폐관수련에서 많은 득을 봤다.
“강 장로님하고 목 장로님은 아직 안 가셨죠?”
“요즘은 오면 그냥 눌러붙어. 놀러오는 거지.”
“그렇군요.”
어디에 있든 별 상관은 없다. 그들에게 기대했던 건 독문무공의 전수가 아니라 기본기를 잡는 거니까. 애초에 아이들 기본기를 잡는 데 두 초고수를 쓰는 건 어떤 문파도 안 할 사치였다.
“아. 등령당도 한 번 들러야지.”
이제는 금화청의 차례였다.
“등령당이요? 뭐 바뀐 거 있습니까?”
“오 년 동안 안 갔으니 한 번은 가야될 거 아니냐.”
“아, 그렇네요.”
당연히 등령당도 가려고는 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그건 조금 미뤄도 괜찮으리라.
“어쨌든 무림맹은 잘 구경하고 와라. 내가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보다는 자연스러운 걸 보여달라고 주문했으니까.”
“그런 게 주문한다고 되나요.”
현재 중명각을 관리하는 게 금화청이니, 곽진도가 금화청에게 그제 일을 말한 모양이었다.
난 마지막으로 금수린과 포옹을 한 번 하고 등에 멘 죽립을 머리 위로 올려썼다. 감색에다가 중앙 오른편에 작게 금룡이 자수 된 죽립이었다. 세가의 복장이나 이런 건 금수린이 전담한다고 하니, 그녀가 생각한 모양일 터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멋있네요.”
“아니야. 월상 오라버니가 입으면 안 멋있었어.”
금월상은 눈의 초점을 흐렸다. 이제 금수린의 도발에 넘어가는 건, 저렇게 무시하는 수밖에 없나보다.
“그럼, 갔다오겠습니다.”
“그래. 안녕.”
그렇게 나는 황금세가를 떠나서 무한으로 출발했다. 정문을 나서서 숨을 깊게 들이마셔봤다. 맑은 공기가 폐 끝까지 충만해졌다.
그렇다고 내가 폐관을 하면서 안 좋은 공기를 마신 건 아니었다. 신옥주와 태을헌원신공은 그 암굴에서도 깨끗한 공기를 걸러서 내게 줬으니까. 허나 걸러서 준 공기는 결국 자연 상태의 공기를 못 이기는 법이다.
난 남창에서 안의로 통하는 관도를 걸었다. 북서쪽으로 가는 가장 흔한 길이었다. 그 중간에는 커다란 언덕이 있었다.
언덕 위에서 계속 앞길로 뻗쳐있는 관도와 주변이 잘 정리된 샛길이 보였다. 여기서 샛길로 나가면 멀리서나마 포양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발을 틀어 포양호를 향했다.
“와, 진짜 예쁘다.”
“네가 더 예뻐.”
“아이. 고마워.”
이미 샛길 주변에서는 연인들의 지저귐이 들렸다. 딱히 나만 알고 있는 길도 아니고, 나름 명소였다. 난 천천히 샛길로 올랐다. 무성한 수풀과 나무들 틈사이로 점점 맑은 물이 보였다. 이미 많은 언덕을 올라와서 더 올라올 필요는 없었다. 난 언덕 끝 첨예한 곳까지 올라갔다.
지금까지 답답하게 감춰왔던 포양호가 드디어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었다.
“소저. 혹시 여기 혼자 오신 걸 보면 짝이 없으신가보오.”
“실연이라도 하신 게요?”
“같이 남창가서 한 잔 하시는 거 어떻습니까?”
언덕 끝에는 포양호를 즐기러 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구석에는 한 무리가 뭉쳐있었는데, 모두 남자였다. 아마 저 중심에는 여자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저 밀집에 없는 남자들도 주변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자네 봤나?”
“완전 상급이었네.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우니 절벽에 흐드러진 꽃과 같았지.”
“그럼 우리도 가볼까?”
“자네가 가게. 데려오면 내가 다 죽여놓을게. 내가 또 입심이 좋지 않나. 우리 중에서는 자네가 더 잘생겼고, 오늘 옷걸이도 훌륭하군.”
허름한 옷을 입은 두 명은 그런 대화를 나눴다. 저기 있는 게 아름다운 여자인 모양이었다.
“···아. 오늘은 자신 없는데. 자네가 가는 게 어떤가? 자네도 남자다운 얼굴 아닌가.”
“크흠,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자네가 가면 무조건 저 소저를 낚아채올 수 있다네.”
“무조건이긴 하지.”
난 흰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언덕의 끝의 끝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호방하게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호수 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촉촉하니 시원했다.
“어어? 소저, 어디 가시오!”
“소저, 소저!”
곧 시끄러운 소리가 내게 가까워짐과 함께, 내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잡혔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녹색 면사를 쓴 여자였다. 몸의 곡선은 아름다웠지만, 왠지 걸음걸이는 호방하게 보였다. 그리고 난 면사 따위는 바로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두 발을 착착 맞춰 서더니 나를 올려다봤다.
“오랜만이야.”
그녀의 입이 오물거렸지만 다시 멈췄다. 내가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명재희.”
“···금목환.”
명재희는 허탈한 한숨을 내뱉고 면사를 등 뒤로 걷었다. 주변에 있던 남자들에게서 숨을 안으로 삼키는 소리가 났다.
남자들은 나와 명재희를 번갈아보고 서로 수군댔다. 아무리 귓속말을 해도 내 귀는 다 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가야겠는데?”
“남자가 너무 잘생겼다.”
“쯧, 백면서생 같은 놈이 뭐가 잘생겼다고.”
물론 그 말은 명재희는 못 들었고, 그녀는 내게 말을 했다.
“넌 돌아왔는데도 나 한 번 안 보러오고.”
“여기는 왜 있어?”
“여전하네. 용건부터 하는 거.”
명재희는 목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확실히 그녀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명재희는 깔끔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내겐 그냥 남자에 더 가까웠던 아이였다. 행동거지나 어깨까지 오는 짧은 머리나.
지금도 어깨까지 드리우는 머리는 맞았지만, 명재희의 모습은 유려한 곡선을 가진 여성의 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말투는 예전과 같았다.
“너라면 무한에 들르기 전에 여기 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
난 지금까지 남의 행동을 예상해본 적만 있지, 예상당해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네가 즐기는 게 뭐 많냐. 풍경 보는 거랑 먹는 거밖에 없잖아.”
“그런가?”
“그래.”
명재희는 딱 잘라서 말했다.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수긍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많이 바뀌었네.”
“그런가?”
명재희는 자신의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훑어봤다.
“모르겠다.”
주변 남자들은 저렇게 애타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바뀐 것 아닐까.
“너도 되게 키 컸다. 몸도 좀 단단해진 것 같고?”
“그렇겠지.”
“심심한 반응이네. 하긴 북경에 가서 사천 요리를 바라면 안 되지.”
명재희는 입을 살짝 가리고 하품을 했다.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살짝 깔려있었다.
“밤 샜나보네.”
“무림맹에 갈 사람한테 전해줄 게 있어서 밤을 좀 샜지.”
“미안하게 됐네.”
“해야할 일인데 뭘.”
명재희는 내게 짐 하나를 맡겼다. 난 그 짐을 봤다. 종이철들이 몇 개가 있었다.
“당연히 유출되면 안 돼. 꽤 민감한 정보거든.”
“그래. 고마워.”
난 명재희의 팔뚝을 툭툭 쳐줬다. 그때 뒤에서 탄식 소리가 났다. 우리를 계속 지켜보던 그 남자들이었다.
그 중에서 한 명이 용기있게 나왔다. 한 명이 우리 둘 앞에 서서, 얼굴이 붉어진 채로 외쳤다.
“호, 혹시 두 분은 무슨 사이십니까?”
그 질문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호기심있게 바라봤다. 나도 명재희에게 얼굴을 돌렸고, 명재희도 내게 얼굴을 돌렸다. 서로 눈을 보는데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대신 먼저 얼굴을 돌린 건 명재희였다.
“물주(物主)와 고용인이죠.”
“···네?”
“친구기도 하고.”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재희의 말에는 한 치의 오차는 있었지만, 나머지는 전부 맞았기에 수긍했다.
“그럼,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회포를 풀 테니 좀 멀리 떨어져 주시겠어요?”
명재희의 맑은 목소리를 냈다. 늘 툴툴대던 그녀의 말투와는 전혀 다른, 상큼한 느낌이었다. 남자들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을 본 야생동물처럼 흩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포양호를 구경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고, 내가 명재희에게 말했다.
“슬슬 가야겠다.”
“그래. 나도 일하러 가야지.”
“각주 일은 네가 원하던 일이 맞아?”
내 말에 명재희는 민망한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너무 바빠서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좀 여유있어지면 생각해려고.”
“아쉽네.”
“아쉽지는 않아. 여전히 재미는 있어.”
명재희는 내 등을 손바닥으로 툭 밀었다. 내가 아래로 내려오고, 그녀가 위에 서있었다. 명재희의 얼굴 뒤로 옅은 태양이 비춰져서 그녀의 전체가 빛나는 듯했다.
“안녕. 나는 조금 더 보고 갈게. 나한테도 이제 이런 시간이 별로 없거든.”
“그래.”
나는 그렇게 명재희와 헤어졌다. 언덕을 아예 내려가기 전에 뒤를 돌아 명재희를 봤지만, 여전히 그녀는 넋을 놓고 포양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이 역시 여전히 촉촉하니 시원했다.
*
종리운과 제갈헌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서로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들의 사이에 있는 책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금색 테두리의 서한이 있었다.
“실망스러운 판단이네요.”
“그러게.”
- 옛날에 내원에서 일을 했던 친구를 보내겠습니다. 요즘 많이 쉬어서 감을 좀 찾아야 할 겁니다. 그래도 실력은 보장하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지요. 금화청.
황금세가와 무림맹이 이 정도 관계밖에 안 되던가. 종리운이 머리를 위로 꺾고 탄식했다.
“섭섭하게 행동해놓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건 무슨 의미인건가?”
“평소 우리한테 섭섭한 게 있었나 본데요?”
“진짜?”
종리운의 말에 제갈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섭섭하게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황금세가에서 손님이 오면 시종이라도 극진하게 대접해서 보냈는데 말이다.
“저도 금화청 공자가 왜 이런 사람을 보내는지 모르겠네요.”
“그렇지? 그냥 요즘 일손이 너무 바빠서 못 보내는 거겠지?”
“아뇨. 그렇다기에는 편지 내용이 악의적이지 않습니까. 실력이 괜찮은 친구면 일을 오래 쉰 걸 우리한테 굳이 밝힐 필요가 있습니까? 다 눈치가 있는데 짬짬이 하는 거지.”
“그것도 그렇네.”
종리운은 침음을 흘렸다. 금화청 공자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냉정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실제 무림맹과 연락을 할 때 초반 몇 번의 충돌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많이 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심사가 꼬인 걸까.
“오늘 언제쯤 온다고 했지?”
“오시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벌써 신시군요. 두 시진을 늦는데요.”
“허허.”
종리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금화청 공자의 머리에 칠색고라도 들어간 건 아닐 테고.
“그 친구, 비연각주실로 보내지 말고 나한테 보내게.”
제갈헌이 종리운을 바라봤다. 원래는 황금세가에서 직계, 원주, 각주급이나 맹주와 만날 수 있었는데, 일개 회계원을 보겠다고 한 것이다.
속보인다면 속보인다지만 잠깐 압박하기에는 괜찮은 수였다.
“그러죠.”
제갈헌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세가가 은인인 건 맞고, 같이 가야할 동반자인 건 맞지만 서로 동등해야 했다. 물론 현재 무림맹이 빚만 지고 있어 동등하지는 않지만, 이렇게라도 한 번 내세우는 게 또 중요했다.
종리운과 제갈헌이 눈빛으로 결의를 합친 순간 문이 똑똑 울렸다.
“누구냐.”
“황금세가의 사람이 왔습니다. 비연각주실로 올려보내겠습니다.”
관행대로 인사하고 나가려던 정문 호위병은 종리운의 우레와 같은 소리에 뒷덜미를 잡혔다.
“아니!”
“억.”
호위병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고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맹주실로 불러와. 직접 대면하고 싶으니까.”
“···아, 네.”
호위병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지만 명령은 명령. 그는 밑으로 그것을 전달하러 갔다.
“저도 같이 있어야겠군요.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습니다.”
제갈헌도 눈을 활활 불태웠다. 종리운은 바로 제갈헌에게 같이 잡을 자세를 논의했다. 그들의 머리에는 이미 황금세가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늦었냐, 무림맹을 홀대하는 거냐, 황금세가가 동맹을 너무 가볍게 보는 거 아니냐, 하는 오만가지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올라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