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너무 오랜만이라
94화 너무 오랜만이라
당과 열 개라. 나는 텅 빈 품을 한 번 힐끗 보고 말했다. 오 년 동안 수련만 했으니 뭐가 있을리 없었다.
“지금은 없는데.”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예란은 내게 눈을 부라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앉아있는 내게 그녀가 불량스럽게 쭈그려 앉았다.
“아저씨. 용소화한테 뭐 줬어, 안 줬어?”
“안 줬는데.”
내 말에 예란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용소화는 뒤에서 조마조마하게 나와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황금세가가 미쳐돌아가네. 내당에 처음 온 사람 같은데, 가규를 어기고 나서도 뻔뻔하게 그냥 넘어가려고 해? 안 되겠어. 내가 내당주님에게 직접 찌를 거야.”
“어, 언니. 됐어. 사실 내가 당과 받았는데 먹고 왔어.”
“안 믿어. 입에서 단내가 안 나는데 어떻게 믿겠니?”
용소화는 나가려고 하는 예란을 붙잡으려 했지만, 예란은 그걸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 날 바라봤다.
“설마해서 물어볼게. 혹시, 나중에라도 줄 생각 있어?”
“아니. 그렇게 많이 먹으면 이가 상하니까.”
내 대답에 예란의 얼굴이 표정이 붉어졌다. 마치 내게 모욕감이라도 받은 듯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아저씨, 왜 그랬어요! 예란 언니는 진짜 한단 말이에요.”
용소화가 내 몸을 잡고 흔들었지만, 난 흔들리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건 알겠다.
*
구조흠은 잠에서 깼다. 이 새벽에 누가 계속 창문을 두드리고 긁어 대는 것이다. 그게 누구인지는 또 뻔했다. 구조흠은 창문의 빗장을 풀고 밀었다. 창문 바깥에는 역시 예상한 아이가 서있었다.
“조예란. 또 왜.”
“당주님. 진짜, 이번에는 악질인 내당 무인이 숭화당에 있어요. 정말 그 뻔뻔한 낯짝을 보면 바로 자르실 거예요.”
구조흠은 한숨을 쉬었다. 당주실을 일 층에 둔 건 유사시에 빨리 대응하기 위함이지, 이런 민원을 들으려던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냥 귀엽고 기특한 아이인 줄 알았다. 규칙을 어기는 내당 무인들을 고발해서 관리에 더 만전을 기하게 되는 순기능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렇게 시달리는 건 짜증만 날뿐이었다.
물론 짜증은 조예란에게도 나지만, 그보다 내당 무인들에게 더 화가 났다. 그렇게 경계를 설 때 잠을 자지 말아라, 투입로를 올바르게 지켜라, 교대 시간을 준수해라, 해도 못 지켜지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렇다고 여기서 조예란을 타박하면, 저 발칙한 아이는 내당을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도리어 겁박했다고 말할 것이었다. 모든 아이는 순수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선한 건 아니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지만 어쩌랴. 결국 내당 무인이 잘못한 것을.
“이번에는 또 어떤 놈이냐?”
구조흠이 이를 갈았다. 조예란에게 난 짜증도 내당 무인에게 풀 생각이었다. 어차피 곧 일어날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잘 모르겠어요. 키가 당주님보다 조금 작고, 피부가 되게 하얬어요. 그리고 되게 잘생긴 얼굴이었어요.”
조예란의 말에 구조흠은 잠시 머리를 굴려봤다. 아무리 내당 무인이 많아졌다지만, 그런 사람을 받았던 기억은 없었다.
“잘못 본 거 아니냐?”
“맞아요. 그 감색 천에다가 금색 테두리가 입혀진 옷을 입고 있었다니까요. 많이 닳아있기는 했지만. 아, 그리고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닳았다고?”
얼마 전에 다시 배급한 무복이 닳을 정도로 열심히 하는 녀석이 있던가. 그것도 잘 모를 일이었다.
뭐, 어떠랴. 모든 사람들의 보는 눈이 같지 않으니, 조예란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 가자.”
구조흠은 옷을 대충 챙겨 입고 조예란을 따라갔다. 앞서 나가는 조예란은 히쭉히쭉 웃고 있었다. 이것도 보나마나 뻔했다. 내당 무인들이 세가의 기강을 헤치는 걸 발견하면 당과를 하나씩 주기로 했으니까. 그걸 받을 생각에 좋아라 하는 것이다.
내당의 집무처와 숭화단은 거리상으로 가까웠다. 구조흠의 눈에 숭화단의 건물이 계속 커졌는데, 그에 비례해 분노도 커지는 느낌이었다. 또 어떤 멍청한 머저리이기에 이런 소악마한테 걸려서, 당주인 자신까지 나오게 하다니.
조예란과 구조흠은 숭화단 안으로 들어갔다. 조예란은 들어가자마자 건물 입구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기예요, 저기!”
구조흠은 어둠 속을 바라봤다. 신형이 두 개가 보이기는 하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하나는 어린 아이고, 하나는 내당 무인인 것 같았다.
“거기, 누구냐? 당주가 이렇게 왔는데 앉아있을 건가?”
구조흠이 짜증을 부렸다. 설마 겁을 먹어서 저렇게 굳은 건 아니겠지. 하긴 내당 무인들이 가칙을 어길 때 자신이 호되게 혼내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다 세가를 위한 일이었다. 구조흠은 그 점에 대해서 한 점 부끄럼도 없었다.
앉아있던 인영은 잠시 구조흠 쪽을 바라보더니 일어났다. 그는 빛이 비치는 쪽으로 서서히 나왔다.
“아, 오랜만이로군.”
당원이 당주한테 반말···이라는 생각이 스칠 때, 구조흠은 나오는 사람을 보고 완전히 얼어버렸다.
그곳에는 이제는 자신이 지켜야할 황금세가의 가주, 금목환이 있었으니까. 몸집은 청년답게 크고, 얼굴에 젖살도 빠졌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가, 가주님···”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소리에, 같이 나온 용소화와 조예란의 얼굴이 벙졌다. 같이 넋을 놓았던 구조흠은 재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금목환 뒤에 있는 용소화를 지목했다.
“거기, 가주님 뒤에 있는 너! 빨리 대전으로 가서 가주님이 돌아오셨다고 알려라! 숭화당에 있으시다고도 말하고! 빨리 뛰어!”
구조흠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에, 숭화당의 곳곳에 불이 켜졌다. 용소화는 영문도 모른 채 명령 하나에 의지하여 달렸다. 원래 가규에 의하면 세가 내에서는 걸어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구조흠이 그걸 깨버린 거다. 조예란은 아직 상황을 파악을 못한 채 넋을 놓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산에서 온 다른 친구들도 잘 있지?”
“네! 각자 내당에서 부당주 역할을 잘해주고 있습니다.”
낡은 옷을 입은 아저씨에게 그 칼같던 내당주가 조아리고 있었다. 심지어 제일 무서운 수석 장로님께도 저렇게 안 하던 사람인데,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게 참 낯설었다.
애초에 가주라니. 조예란은 그런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가주라는 칭호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으레 대전에서 일을 하는 금화청이 가주인 줄로만 알고 있었을뿐이다.
“가주님! 혹시 이 아이가 무슨 결례를 범했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조예란의 뒷덜미가 잡혀 쑥 들어올려졌다. 가까이서 본 구조흠의 눈은 굉장히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당과를 달라고 하더군.”
“당과요?”
금목환의 대답에 구조흠이 눈을 끔뻑였다. 구조흠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조예란과 숭화당의 아이들이 내당의 무인들과 어떤 거래를 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뜯긴 사람들은 작은 규모기도 하고, 자신도 잘못이 있기에 발설을 안 하고, 숭화당의 아이들은 당과를 가져가니 말할 사람이 없었던 거다.
구조흠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을 때, 뒤에서 문이 쿵 열렸다.
맨앞에는 강아지처럼 혀를 빼물고 있는 용소화가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황금세가의 기둥인 금월상, 금화청, 금수린, 곽진도까지 있었다. 단언컨대 조예란은 이 사람들을 한 군데서 본 적이 없었다. 이 거물들이 모이려면 세가에 큰일이 벌어져야 했으니까.
“오랜만이군요. 형님들, 누님. 스승님까지.”
금목환이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름 아닌 금수린의 눈에서 눈물이 가장 먼저 차올랐다.
*
후룩.
종리운이 차를 마셨다. 언제 마셔도 기가 막히는 맛이었다. 도화봉에서 채취한 황산모봉. 종리운은 몇 년을 마셔도 이 맛이 질리지 않았다.
차를 음미하던 때, 누군가 맹주실의 문을 두들겼다.
“누구?”
“접니다.”
목소리는 자신이 익히 아는 제갈헌이었다. 제갈헌은 별 다른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말을 꺼냈다.
“다음 차례는 남궁세가입니다.”
종리운은 그 말에 차를 뱉을 뻔했다. 안 되지, 안 돼. 종리운은 혼잣말로 읊조렸다. 편백으로 만든 고급 책상이었기 때문이다. 맹주실도 예전과는 달리 모두 세련되게 바뀌어져 있었다.
“남궁세가 저번에 왔잖아?”
“당문 차례인데, 바빠서 못한다고 넘겼답니다.”
“차 맛 확 떨어지는구먼.”
종리운은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인가 구파일방은 무림맹에게 주기적으로 명가의 사람들을 보냈다. 돈으로 압박할 수 없으니 다른 수단을 생각해낸 거다.
무림맹이 아무리 많은 돈으로 체질 개선을 해봤자 고작해야 오 년이었다. 몇 백년동안 아성을 쌓아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말에는 아직 따라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거 인원 편성할 시간에 녹림이나 좀 잡으라고 해. 자기들 상로만 길인가. 다른 관도에는 사파들이 득시글한데.”
“그거야 남궁세가만의 일은 아니죠.”
명목은 무림맹과 구파일방의 교류였다. 비무도 좀 하고, 무공도 좀 나누고, 정보도 나누자는 교류. 허나 사실상은 해코지였다.
오면 무림맹 무사들의 훈련을 훔쳐본다거나, 모욕을 준다거나, 체계를 점검하고 훈수를 두거나 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구파일방은 정파상생기금이라고 돈을 한 바가지로 뜯어간다.
“누구누구 온다고?”
“남궁선용, 남궁소학, 남궁소예를 비롯한 여덟 명이요.”
“아찔하군.”
거기다가 남궁세가라. 각 세가나 문파마다 점검하는 권역이 있다. 당문은 의, 약, 독에 관한 것을 보고, 무당과 화산은 무공에 대한 걸 보는 식이다. 그리고 남궁세가는 돈이었다.
“얘들 또 황금세가랑 뭐 연관된 거 없나 찾겠네.”
“그렇죠.”
종리운은 한숨을 쉬었다. 남궁세가는 저번에 뒤로 받은 황금세가의 돈을 캐내, 황금세가의 금화청과 제갈헌을 숭산에 소환시킨 적이 있었다.
결과는 무림맹과 황금세가에게 은자 천 냥씩의 벌금이 내려졌다. 금화청은 그냥 준다고 했는데 종리운이 따로 요구를 한 것이기 때문에 더 민망했다.
하지만 종리운 나름 할 말은 있었다. 공개적으로 주고 받으면 구파일방의 ‘기금’에 삼 푼 삼 리를 떼어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은 금화청에게 대신 벌금을 내겠다고 했지만, 금화청은 그냥 됐다고 했다.
그때 금화청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반면 남궁세가는 한 건 찾았다고 얼마나 신나하던지.
골치아팠다. 무림맹과 구파일방은 뒤로 견제를 하고 있고, 그 사이에 사파들의 득세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쯤 되면 또 구파일방이 나서서 정리할 테지만. 야비한 녀석들.
“그럼 일단 황금세가한테 연락을 넣지. 올해 우리 오고간 거 정리하게 사람 좀 불러달라고. 최대한 똘똘한 애로.”
“그러면 황금세가 직계를 부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쳤나? 바쁜 친구들인데.”
“농담입니다.”
종리운은 혀를 찼다. 농담도 농담처럼 해야 농담이지. 지금 중원에서 황금세가의 직계들만큼 바쁜 사람은 없을 거다.
“최소 대(隊)급에 속해있는 인물만 와도 고맙지. 황금세가에서 제일 높은 원(院)급이나 전(殿)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세 번째인 각(閣)에서 오면 대박이고.”
“당(堂)급에서 차출된 인원이면요?”
“···뭐, 나쁘지 않지.”
제갈헌의 날카로운 질문에 종리운은 입맛을 다셨다.
“부탁을 하는 건데 뭘 가리겠는가.”
종리운은 목이 마른 듯 차를 한 번 들이켰다.
아무리 그래도, 대급 이상에서 차출해 보내면 기분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제갈헌은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시는 종리운을 바라보며 다 안다는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제갈헌 자신도 대급 이상이 왔으면 했다. 오히려 제갈헌은 각급에서 차출해줄 것도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황금세가의 누가 오든 섭섭지 않게 대할 것이지만. 그건 그거고.
허나 지금 단계에서는 고민해봤자 의미 없는 일. 올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