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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92화 (93/225)

92화 잠시만 안녕

92화 잠시만 안녕

“절강에 있던 신자(信者)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독마 구양수(丘陽修)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보라색 주렴 뒤에는 검은 신형이 흔들리지 않고 앉아있었다.

“그래서 중원에 나가있던 신자들을 바로 철수시켰습니다. 일단은 박격달봉(博格达峰)의 안가에 대기시켜놓았습니다.”

구양수의 보고가 끝난 뒤에 한참 동안의 침묵이 있었다. 곧 낮은 목소리가 회랑에 퍼졌다.

“순교자는 누구지?”

“장소열 선무(宣務)입니다.”

“이제부터는 선사(宣伺)로 대우해주도록.”

주렴 안에서 퍼지는 목소리는 모든 방향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육합전성의 기예였다.

“그리고 중원에 나가있는 신자들은 모두 본산으로 돌려보내려무나. 지금은 포덕(布德)하기 이르다고 도전(都典)께서 말씀하시니.”

“네, 알겠습니다.”

구양수는 대답을 하면서도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를 보였다.

“절강 쪽을 좀 추적해볼까요.”

구양수가 물었다. 주렴 뒤에 있는 사람은 잠시 멈추더니 대답했다.

“찾으려다가 도리어 순교하는 이가 늘 수도 있지 않겠느냐.”

검은 신형이 말했다.

“두어라. 그들이 우리를 보게 되면, 우리도 그들을 볼 수 있게 되리니.”

주렴 뒤에 있던 사람은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사라졌다. 이제 주렴 뒤에는 어떤 신형도 남지 않았다.

*

···이때 즈음을 가장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소만(小滿)에서 망종(芒種)으로 넘어가는 시기. 왜가리가 떼 지어 날아다니고 보리가 익어가는 때.

딱 작년 이맘 때였다. 우리가 옥화산으로 갔던 시기가. 그때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의식의 날이었지만, 지금은 의식이 주 목적이 아니었다. 주 목적은 바로 휴식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좋은 곳이지.”

“사람도 없고,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고.”

우리는 별다른 곳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지 않고,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할만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세가의 중책을 나눠 맡고 있는 몸들이어서 멀리 떠날 수도 없었다.

옥화산으로 결정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제례를 할 날짜가 겹치기도 했고, 우리가 원하는 공간에 딱 들어맞기도 했다.

“조상님들도 우리가 이렇게 쉬는 걸 더 보기 좋아하실 거야. 당장 작년에도 우리는 끌려가는 모양새였잖아.”

같은 옥화산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작년과는 많이 달랐다. 금수린이 계속 조잘대는 걸 들어주고 있다보니 어느새 우린 옥화산에 도착했다.

마차가 서고, 금수린은 내리자마자 마차 밑에서 짐들을 꺼냈다. 작년에 왔을 때는 저기 내가 무기를 숨겨놨었는데, 지금 나오는 건 나들이용 물건들이었다. 꽃돗자리, 반합, 차를 담은 것 같은 병들이 우수수 나왔다.

“많이도 챙겨왔다.”

금화청은 질린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짐을 들어줬다. 금월상과 나도 짐을 나눠서 지었다.

“나도 하나 들 수 있는데?”

“괜찮아요. 새벽부터 준비하신 거잖아요.”

“그렇긴 그래.”

금수린은 배시시 웃었다. 금월상은 금수린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금월상이 금수린을 귀여워할 때는 저런 웃음을 짓고는 했다.

등령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작년과 똑같았다. 작년의 풀과 꽃들이 겨울을 안 거치고 그대로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령당에 도착했다. 건물 역시 그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성가장 사람들과 싸웠을 때 많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모두 복구를 한 상황이었다.

“작년이랑 똑같네. 여기서 싸움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안 믿겠는걸.”

“그러게.”

형제들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 등령당 건물을 바라봤다.

우리는 곧 돗자리를 펴고, 금수린이 싸온 음식들을 먹었다. 냄새가 나지 않게 주먹밥으로 준비했다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화려했다.

절강의 특산물인 금화화퇴(金華火腿)를 사천의 두반장과 기름에 볶은 것, 강소의 훈제 오리를 다진 것, 복건의 백숙간(白筍干)과 호남의 거위 고기를 함께 볶은 것, 광서의 심강어(深江魚)를 소금에 절여 삭힌 것 등. 온갖 중원의 특산물이 다 들어가 있었다.

금수린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들을 먹으며 산의 경치를 바라봤다.

꽤 여유 있는 시간이었다. 놀랍게도 휴식이라고 생각을 하니 내가 해야 할 일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금화청과 내가 별 다른 말이 없어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공백은 금수린이 훌륭하게 메웠다.

“난 여기서 월상 오라버니가 앞장서서 나갈 때 대장놀이하는 줄 알았다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약간 그런 기질이 있는 것 같아. 목환이가 가주를 맡겠다니까 표정이 살짝 뒤틀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언제 표정이 뒤틀렸다고 그러느냐!”

“얼굴 빨개졌다. 농담인데 진짜였나봐.”

“네가 너무 어이없는 말을 해서···”

내성이 없는 금월상은 금수린의 작은 놀림에도 발끈했다.

그들이 둘이서 놀고 있을 때, 나와 같이 앉아있던 금화청이 손을 뒤로 해 내 옷을 몇 번 잡아당겼다. 눈치를 챈 나는 일어났고, 금화청도 따라서 일어났다.

잠깐 금월상과 금수린은 우리를 바라봤지만, 이내 못 본 체를 해줬다.

우리는 등령당 안쪽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위패를 가운데 뒀다. 오늘은 어차피 제사를 드리는 날이었다.

“목환아.”

금화청이 나를 불렀다. 좀 낯선 음이었다. 금화청이 나를 이름으로 부른 이유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네.”

“지난 날의 나를 용서하려무나.”

대뜸 금화청이 말했다. 늘 들었던 가시 돋친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세가가 다른 이들의 놀잇감이 될 때 원망했던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게 부끄럽게도 말 못하고, 여린 성정을 가진 너였다.”

“어머니가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으니까요.”

“그건 허울만 좋은 변명이었지, 근간은 비겁한 화풀이였어. 나는 너를 싫어하기 위해서 내 어머니를 앞에 내세운 것뿐이야.”

금화청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같이 오고자 한 거다. 어머니에게 불효함과 네게 했던 못난 행동들을 사죄하려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에게는 십 년전의 얘기지만, 나한테는 장장 삼십 년 전의 얘기였다. 그러니 애초에 딱히 원한은 없었다.

“전 괜찮습니다.”

“···싱거운 반응이구나. 사실 방금 뱉은 말들은 두 달을 고민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괜한 짓을 하셨네요.”

“그러게 말이다.”

금화청은 픽 웃었다. 우리는 그 다음 어머니께 절을 올렸다. 별 다른 말은 없었지만, 난 그걸로 충분했다. 금화청 역시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등령당을 나왔다. 금월상과 금수린은 우리가 오는 것도 못 본 체를 해줬다.

그 이후로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갔다. 각자 맡은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시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음식에 대한 얘기를 하는 둥 주제는 자유롭게 유영했다.

주제들은 전혀 관련없어 보였지만 신기하게 대화의 맥이 이어졌다. 아니면 그냥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이어져 있어서 그런 걸까.

얼마나 지났을까. 형제들의 뺨 한 쪽이 붉게 물들었다. 해가 져가고 있었다.

그 말은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밝힐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형님들, 누님.”

내가 그들을 불렀다. 내려갈 준비를 하던 그들이 나를 뒤돌아보았다. 금월상, 금화청, 금수린. 난 그들과 모두 눈을 한 번씩 마주쳤다.

“전 잠시 폐관을 할까 합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석상이라도 된 양 멈췄다. 그들에겐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일 것이었다. 난 그들에게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시간을 줬다.

얼마간의 침묵 뒤로 금월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말이냐?”

“오 년 정도요.”

“···왜?”

이번에는 금수린이 물었다. 금수린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앞으로의 세가를 위해서 수련을 좀 하려 합니다.”

내 말에 금수린은 고개를 숙였다. 금월상과 금화청은 침묵을 지켰다.

“월상 형님은 아시겠지만, 마교들이 중원에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전 마교가 우리 세가를 노리고 있었다는 걸 확신합니다. 형산파와 절강에 마교의 간자가 있었거든요.”

나는 말을 이었다.

“마교는 당장 간자들이 걸려서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고, 구파일방이 우리를 건드리기도 어려울 겁니다. 무림맹과 내부적 결속을 단단히 했으니까요. 그래도 이건 교착상태에 불과할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중원에 어떻게 움직이고, 세가가 어떻게 휘말릴지 모릅니다. 전 그 미래를 위해 힘을 좀 길러두려고 합니다.”

난 세가를 최대한 안전한 굴레 안에 넣으려 했다. 그래서 금월상과 금화청, 금수린의 일을 배분한 것이고, 교착상태를 의도하기도 한 거다. 이 교착상태는 최소 오 년은 갈 것이었다. 내 폐관수련 시간도 그렇게 정한 것이다.

“꼭 해야 하는 거냐?”

“네.”

내 단호한 금월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금화청은 침착하게 말했다.

“폐관은 세가 내부에서 하는 거겠지?”

“네. 연공부에 벽곡단도 있고, 영약도 있으니까요.”

“가는 건 당연히 안 되고?”

“연공부 페관실은 안쪽에서 잠그게 되어 있고, 바깥 소리나 기척이 아예 안 들립니다. 그러니 찾아오셔도 헛걸음이실 겁니다.”

내 말에 고개를 떨군 금수린의 신형이 얕게 떨렸다. 금수린은 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짚고,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네가 어디 가자고 할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는데.”

금수린의 눈은 붉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린다거나, 목소리가 망가지지도 않았다.

“난 목환이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잘 해낼 거라고 믿어.”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부터 하게?”

“짐은 다 싸놨습니다. 돌아가서 바로 할 예정입니다.”

짐은 준비할 게 많지도 않았다. 천혜침법, 해남파에서 보내 온 비급들 정도. 그 이외의 것들은 폐관실 안에 전부 구비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 우리는 조용히 옥화산을 내려와 남창으로 향했다.

그들이 서운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난 나의 할 일을 해야 했다. 세가를 위해서라도. 아니, 이제 말을 달리 해야 했다. 세가가 아닌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그저 내가 그런 걸 잘 모르기도 하고, 어색해하기도 해서 덮어두고 있었던 거다.

남창 안으로 들어가, 황금세가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작별의 순간이었다. 맨 처음 입을 연 건 금월상이었다.

“목환아. 다치지 말고 잘 하고오거라. 세가는 잘 지키고 있으마.”

“네, 믿을게요.”

나는 아예 잠적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폐관수련을 하러 가는 것뿐이다. 당연히 스승님한테도 말했고, 무림맹주에게도 연락을 넣어놨다.

고개를 끄덕인 금월상 다음은 금화청의 차례였다.

“네가 돌아올 때즈음에는 세가는 많이 바뀌어 있을 거다.”

“그럴 것 같아요.”

금화청과의 인사는 담백했다. 다음에는 금수린의 몫이었다. 금수린의 얼굴은 덤덤해보였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봐.”

금수린은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마주 끌어안아 줬다.

“잘 갔다와.”

금수린은 그 말을 하면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위로 살짝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 우리는 언제쯤 평범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한탄을 하듯 금수린의 목소리가 하늘에 흩어졌다. 그렇게 나는 본원에서 짐을 싸들고, 연공부 폐관실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오 년. 내가 견뎌내야 할 시간이었다.

*

소문이 돌았다. 바로 황금세가의 가주가 사라졌다는 소문이었다. 그 시작은 외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입이었다. 가끔 얼굴을 내비쳤던 가주가 전혀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중원은 황금세가의 가주의 실종을 두고 시끄러워졌다.

황금세가 가주 자리에 저주가 들었다는 둥, 감숙 옥사에서 황금세가의 가주를 봤다는 둥, 황금세가 가주의 봉분을 봤다는 둥 여러 가지 음모론들도 나왔다.

대다수의 양민들은 그저 흥밋거리로 이 정보들을 소비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쪽도 있었다.

“스승님, 진짜냐니까요. 왜 말을 안 해주세요.”

종리운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갈유월이 소매를 잡고 흔드는 것이었다.

“나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짜 소문대로 어디서 죽은 거예요?”

“아니라니까.”

“모른다면서 어떻게 아니라고 하시는 건데요?”

종리운은 난감했다. 금목환이 폐관 수련을 한다고 하자 놀라기는 했다. 보통 폐관 수련은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이 벽을 깨려고 하는 거지, 그런 어린 나이에 하지 않으니까.

물론 걱정은 되지 않았다. 금목환이면 다 생각을 하고 하는 걸 테니까.

문제는 황금세가 측에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치 않아 최대한 발설금지를 요청했다는 거다. 그래서 서한을 받은 종리운이 갈유월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였다.

“진짜로 죽은 거구나. 사부님이 그랬죠. 강호는 누가 언제 죽어도 모른다고.”

갑자기 자기 혼자 단정지어 버린 갈유월이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종리운은 당황해서 갈유월을 달랬다.

“아니, 뭔 소리냐.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 이후로 갈유월은 서럽게 울었다. 종리운은 어떻게 달래보려고 했지만 다 허사였다.

그렇게 그 소문은 누군가에게는 잊혀지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잊혀지면서 시간이 흘렀다.

장장 오 년이라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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