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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세가 절대무신-90화 (91/225)

90화 보타암(普陀巖)

90화 보타암(普陀巖)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그래도 보타산까지 가는 데는 조금의 무리도 없었다.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것이다. 배가 뒤집힐 것 같으면 곽진도가 바다에 손을 넣어 파도를 반대로 밀어냈다.

“고요하네.”

“네.”

우리는 보타산에 내렸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는데, 추억 하나 없는 공간이 없는 것 같았다.

금월상도 곽진도도 한유림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한유림은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가시죠.”

그 침묵의 상황에서 먼저 침묵을 깬 건 한유림이었다. 금월상이 물었다.

“아직 아프지? 업어줄까?”

“괜찮습니다. 대공자님. 여기는 제 발로 걷고 싶어서요.”

한유림의 공손한 대답에 금월상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우리는 잃어버린 곳, 세가를 되찾았지만, 한유림은 잃어버린 보타암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건 우뚝 솟은 불정산(佛頂山)이나, 반타석(磐陀石), 천보사(千步沙)가 남아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우리는 한유림을 따라 걸었다. 그녀 역시 부상이 완치된 상황이 아니라 좀 느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마교의 간자인 장소열도 잡았겠다, 혈랑파는 불이 타버렸겠다. 적어도 절경이라는 보타산의 풍경을 볼 시간은 충분하고 넘쳤다.

“···훌륭한 경치구나. 밤인데도.”

“맞아요. 불정산 꼭대기에서 보면 더 예쁠 거예요.”

곽진도는 억센 해안선과 고운 백사장을 보며 감탄을 토했다. 한유림이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파도는 보타산에서 모래를 쓸어가고, 물과 바람을 주고 갔다.

이런 감상을 깨는 건 곽진도의 뒤편이었다.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계속 자갈에 부딪치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났다. 당연히 장소열이 끌려오는 소리였다.

“좀 닥쳐라.”

곽진도가 험악하게 말했다. 장소열은 바로 억울하다는 듯 눈을 굴렸다.

우리는 더 깊게 보타암으로 들어갔다. 나무의 그림자가 어둡게 우리를 가렸다. 신기하게도 자연 산세는 아무 것도 망가지지 않았지만,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보타암에서 살았을 문도들의 흔적조차.

“여기가 보타암의 연무장이에요.”

한유림이 말했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네요. 그리고 저 위에 관음보살(觀音菩薩)님의 상(像)이 있고, 거기가 우리가 생활하던 곳이었죠.”

“아무 것도 안 보이는구나.”

“사람들이 모든 걸 불태우고, 흔적을 지웠어요. 전 그게 사파 무뢰배들인 줄 알았어요. 마교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한유림이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투에서 하나를 알아냈다. 내가 물었다.

“봤구나.”

“네. 어머니가 미치기 전에 저를 범음동(梵音洞)에 숨겨놓으셨거든요. 범음동 안에 어머니와 저만 알고 있는 비밀 장소가 있었어요. 전 거기서 보고 있었죠.”

마교의 목적성은 더 확실해졌다. 보타암을 무너뜨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타암이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게 목적이었던 거다.

“그래! 관음상은 바다까지 나가서 빠뜨리고, 모든 건물들을 무너뜨려 불태웠지. 네 언니들의 시체에 화골산을 붓기도 했어. 이제 여기는 정파의 상징도 뭣도 아니야. 그냥 사람이 안사는 하찮은 무인도가 된 거야.”

느닷없이 장소열이 외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공포심이 어려 있었지만, 반쯤 정신을 놓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네놈들이 믿고 다니는 보살이나 천제는 다 가짜야! 오로지 믿어야할 건 천마님, 하나뿐! 이 불신자들아! 모두 천마님의 정화(淨火)에 고통스럽게 죽겠지!”

금월상이 장소열의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깨지고 뽑힌 이빨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어차피 죽일 거 빨리 죽여라!”

장소열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외쳤다. 결국 그게 목적이었다. 끌려오면서, 배에 타면서 장소열은 죽음을 각오한 거다. 당연히 그도 알 터였다. 이미 본인은 죽은 목숨이란 걸 말이다.

“슬슬 때가 됐네요.”

난 장소열의 봇짐을 뺏어들었다. 역겨운 냄새가 나서 계속 안 만지고 있었다. 난 그것들을 열었다.

봇짐 안에는 자작나무로 촘촘하게 엮은 바구니, 죽간과 종이들이 있었다.

삐익, 삐이익. 작은 소리가 울렸다. 바구니 안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안에 뭔 귀뚜라미 새끼 소리가 나는구나.”

금월상과 곽진도가 봇짐 안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고독입니다. 칠색고라고 불리는 종이죠.”

난 그들 앞에서 손사래를 저어줬다.

“와아악!”

“억!”

곽진도와 금월상은 내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열 보는 뒤로 물러났다. 나는 갸웃했다.

“봇짐 안에서 칠색고 냄새가 난다 분명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한유림을 바라보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렇게 알고 있던 거다.

“그게 진짜였다는 말이냐?”

“네가 당최 고독의 냄새를 어찌 안다는 말이냐?”

허나 금월상과 곽진도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한유림은 내 한 말을 전부 믿어, 바구니 안에 고독이 있다고 확신했지만, 금월상과 곽진도는 아니었던 거다.

“믿음이 부족하셨군요.”

“아니, 그 상황에서는 당연히 허장성세라고 생각하지···”

곽진도가 허탈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유림은 왜 안 믿었지, 라는 표정이었다. 그들과 한유림의 순수함 차이였다.

나는 여전히 당혹스러워하는 금월상과 곽진도를 놔두고 종이들을 펼쳤다. 그곳에는 올해와 작년의 업무일지였다.

“재작년부터는 없네.”

“흐흐. 다 본교로 보냈지. 당연한 것 아니더냐?”

“이것만으로도 괜찮긴 하지만.”

내 말에 장소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작년과 올해의 업무일지라도 정말 쓸 건 많았다. 특히 형산의 유동해와 접촉했다는 내용을 비롯한 다른 구파일방, 문파들의 사람들과 접촉한 내용이 좋았다.

이들은 다 마교의 간자들이라는 얘기다. 이것만으로도 여기 온 이유는 다한 셈이었다.

“굳이 자백을 받을 필요도 없겠다. 신빙성도 없을 거고.”

난 그러면서 한유림을 바라봤다. 한유림이 비장한 눈빛을 해보였다. 곽진도와 금월상도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장소열도 그것의 의미를 알았다.

한유림은 내가 들고 있는 봇짐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바구니 쪽에 처음부터 쏠려있었다.

“고독은 피부를 못 뚫어. 오로지 혀를 통해서 넣어야 돼. 그게 제일 점막이 약한 곳이라, 고독이 올라가서 뇌에 자리 잡는 거야.”

“···이 고독이 저희 어머니를 죽인 걸까요?”

한유림이 바구니를 천천히 열었다. 고독들은 날개가 없고, 다리도 느린데다가 약하기 때문에 자생하지 못한다. 그러니 열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등이 굽어져 있는 작은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난 그럴 거라고 생각해. 아마 검후께서는 왼쪽 머리를 긁으셨을 거야. 맞지?”

내 말에 한유림은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네. 맞아요. 대체 어떻게···”

“고독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 그 중 칠색고는 왼쪽 뇌에 자리 잡아.”

“말도 안 돼!”

갑작스레 외친 건 장소열이었다. 그의 눈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칠색고는 오직 본교 사람들만이 알고 있다! 중원에 알려진 적도 없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냐!”

내 고독 설명을 들으며 입을 벌리고 있던 곽진도와 금월상도 나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도 혼란이 있었다. 내가 고독을 어째서 이렇게 잘 아는지 궁금할 것이다.

간단하다. 나도 이 고독을 당했기 때문에 아는 거였다.

난 대답하지 않고 칠색고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손가락 반 마디도 안 될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잡아도 돼. 자.”

난 한유림에게 그걸 건넸다. 나머지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고독을 직접 만지는 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인 것 같았다.

대신 한유림은 주저 없이 잡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걸 바로 장소열의 입으로 운반했다.

“으아악!”

장소열이 대경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마혈이 깊게 눌려있어 자세히 봐야 떨리는 수준이었다.

굳게 닫힌 장소열의 입술을 한유림이 손가락을 벌려 열었다. 그 이후에 장소열은 이빨이라도 깨물어 막으려는 것 같았지만, 아까 금월상이 발로 차서 부셔놓은 곳에 넣을 수 있었다.

“···우웨엑! 웨엑!”

장소열은 어떻게든 토해보려고 했지만, 토해서 고독이 나올 것 같으면 고독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미 고독은 혀뿌리에 다리를 고정시켜 놓았을 거고, 어린아이가 나무를 오르듯 뇌로 천천히 올라갈 거다.

일부러 구역질을 한 장소열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난 그게 끝인 줄 알았지만, 한유림은 고독을 한 뭉텅이를 쥐었다. 그 주먹은 장소열의 입으로 직진했다. 내공이 실린 주먹이라 입술이나 이빨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이빨이 다 떨어졌다.

“음으으! 으윽! 흐으윽!”

장소열은 눈물까지 흘려댔다. 한유림의 주먹이 장소열의 목젖까지 닿은 듯했다. 곧 주먹을 뺀 한유림의 손에 고독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많이 넣으면 어떻게 되나요?”

한유림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해봤다.

“모르겠는데.”

“···가주님이 모르는 건 처음 보네요.”

“고독이 비싸서 한 사람한테 저렇게 쑤셔 넣을 일이 없거든.”

내가 말을 하는 사이에 장소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카으으으으으윽!”

장소열의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했고, 목에 핏대가 선 다음 눈이 뒤집어졌다. 목뼈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머리가 부르르 움직였다. 뇌의 격통이 심해서 마혈에도 저항을 하는 것이다.

“아아아아아악!”

장소열은 보타산 전체에 울릴 정도의 비명을 길게 내뱉고는, 땅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장소열의 귀에서는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누가 봐도 죽은 모습이었다.

“이 시체는 회수해가야지. 마인의 구조를 살펴야 하니까.”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곽진도가 한 마디를 꺼냈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그러나 갑자기, 장소열의 시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난데없이 오르는 불길에 우린 잠시 그걸 지켜봤다. 그건 특이하게도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주변을 태우지도 않았다. 태우는 건 오로지 장소열의 시체였다. 곧 장소열이 있었던 자리에는 그가 흘려낸 피얼룩만 남게 됐다.

“···뭔가 또 사술을 걸어놓은 모양이군.”

곽진도가 말했다. 마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장소열의 시체는 부차적인 목적이었고, 봇짐이 주목적이었으니 결과는 달성한 셈이었다.

“이제야, 드릴 수 있게 됐네요.”

한유림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제야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따라가 보면 알 터였다.

*

범음동(梵音洞). 난 동굴의 입구를 보자마자 딱 알아챘다. 여기가 검후가 한유림을 숨겨놨다는 그곳이겠지.

아무도 몰랐던, 검후하산의 뒷배경인 거다.

“여기에 널 숨겨놨다는 건, 검후께서는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는 거겠네.”

“네. 맞아요.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내 질문에 한유림이 담담하게 답했다. 우리는 물방울이 바위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근데 검후님이 문파와 양민들을 위한 장치 하나 안 만드신 건가?”

곽진도가 캐묻듯 물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곽진도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뇨. 사실 검후님은 언니들에게 계속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었어요.”

한유림의 씁쓸한 말에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고독이 뇌에 침식하면 자살 같은 생각, 자살 시도조차 못하게 됩니다. 숙주가 살아야 고독도 사니까 뇌를 조종하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죽여 달라는 의지를 밝히신 것이 대단한 겁니다.”

고독이 왜 정파 금기 중 최우선에 있겠는가. 그만큼 비인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곽진도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검후님은 그런 분이셨지.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구나. 유림아.”

“아니에요. 언니들이 저희 어머니를 차마 죽일 수 없다고 하루하루 미뤄놓다 그렇게 된 것이니. 그 사건은 저희 보타암에 책임이 있는 건 맞죠.”

한유림은 계속 나아갔다. 나는 진법의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원시적인 시대에서부터 남겨진 것 같은, 고루하면서도 촘촘한 진법.

한유림은 구석으로 가서 자갈들 몇 개를 흩어놓았다. 진법이 해제되고 우리는 진법 안으로 들어갔다.

“···음.”

금월상이 침음을 흘렸다. 검후와의 비밀 공간이라고 했는데, 한 사람이 제대로 눕기 힘든 크기의 토굴이었다. 그 작은 공간에도 흙을 굳혀 만든 선반이 있었는데, 벽곡단을 담은 항아리가 있었다. 아직 벽곡단은 많았다.

눈을 왼쪽으로 돌리니 작은 숨구멍이 바깥쪽으로 나있었다. 한유림은 아마 그곳을 통해서 바깥을 본 거일 테다.

“여기서 얼마나 있었던 게냐?”

금월상이 물었다. 여기는 확실히 사람이 살 공간이 아니었다. 잠깐 숨는 공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다.

“백 일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검후하산이 그 정도 걸렸지.”

곽진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유림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한유림은 대신 항아리를 들어 거꾸로 뒤집었다. 벽곡단이 콸콸 흘러내렸다.

무슨 짓인가 봤더니, 작은 관음 보살상이 항아리 바닥에 붙어있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본인을 이렇게 만든 원흉을 죽이고 나서야 이걸 가지고 가라 하셨어요. 그 정도로 강해져야 의미 있다는 뜻이겠죠.”

한유림은 아무 말 없이 관음상을 바닥에서 뜯어내더니 그것의 등을 잡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죽었죠. 전 아직 강해지지 못했지만, 전 이걸 가주님께 맡길까 해요.”

등에는 아주 작게 손잡이가 있었다. 관음상 자체는 작지만, 상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 상자에는 옥색 구슬 하나가 있었다. 한유림의 손에 이끌려 구슬이 밖으로 나오자, 퀴퀴하던 토굴에 부드러운 향이 가득 찼다.

“···이게 뭐냐?”

곽진도가 물었다. 딱 봐도 범상치 않게 생긴 물건이었다. 나도 의아했다. 나도 웬만한 문파의 영약들은 알지만, 보타암에 이런 게 있다는 건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용히 한유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유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옥주(神玉珠)에요.”

곽진도와 금월상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나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대로라면, 저 작은 구슬이 중원칠종신기(中原七種神器) 중 하나라는 뜻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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