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가주만이 할 수 있는 일
89화 가주만이 할 수 있는 일
한유림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있는 금목환을 바라봤다. 강한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어지럽혀졌지만, 그 모습마저도 빛나고 있었다.
무인으로서의 경지도, 어린 나이에 가주 자리를 해내는 능력도 빛났지만, 솔직히 제일 빛나는 건 얼굴이었다. 긴 속눈썹에 하얀 피부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봉목(鳳目). 한유림은 금목환을 보고 나서야 남자한테도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까.’
얼굴도 잘 생기고, 능력도 좋고.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거나, 엄청나게 힘들게 살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한유림은 확신했다.
“왜?”
금목환은 어느새 한유림의 시선을 눈치 채고 위를 올려다봤다. 한유림은 화들짝 놀라서 얼굴을 돌렸다.
당연히 그런 능력이 없을 걸 아는데도, 금목환의 눈을 보면 속마음을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서있지 말고 앉아. 어차피 스승님이나 형님은 여기로 올 거니까. 이 정도 기파의 흔들림이면 진해에서도 보일 걸.”
“···그게···”
사실 한유림은 면목이 없었다. 이번에도 금목환에게 도움만 받았다. 처음에 금목환을 기습할 때가 계속 떠올랐다. 금목환에 대한 감사함과 죄책감이 비례해서 커지는 느낌이었다.
“앉아있을 자격이 없는데···”
“앉아.”
늘 느끼지만 금목환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어 가끔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몇 번 보니까 화는커녕 감정 표현 자체를 안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한유림은 군말 없이 금목환의 맞은편에 앉은 다음 무릎을 끌어안았다. 바람이 계속 세게 불었고, 저 멀리서 타는 혈랑파 본채의 열기가 여기까지 다가왔다. 바람이 불씨를 옮겨 주산이라는 섬 자체를 태우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을 게 분명한 금목환은 그저 평안해 보였다.
“내가 너희들을 데려온 건 당장 나를 지키라는 뜻이 아니야. 그럴 나이도 아니고, 그럴 준비도 안 됐잖아.”
“···네.”
막상 금목환은 한유림보다 한 살이 어렸지만, 한유림은 그걸 눈치 채지도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타이름이었다.
“가주님.”
“응.”
한유림은 막상 금목환을 불렀지만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말로는 보여주기 힘든 죄책감과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문득, 한유림은 금목환의 평소 행동 양식과 언행을 분석하여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낼 만한 답을 도출했다.
언제나 행동을 먼저 보여주고 말을 나중에 하던 금목환. 그는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한 거다.
“돌아가서 훈련 엄청 열심히 할게요!”
한유림은 말로 내뱉자마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작은 행동이 아닌가. 지금 자신은 보타암의 어리광쟁이가 아닌 것을.
무섭게도 금목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유림은 눈치를 보며 금목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매일 냉정한 얼굴을 보여주던 금목환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스친 거다. 의외로 금목환의 미소는 예상과 달리 부드러웠다.
“그래. 이제 스승님과 형님이 오시네.”
한유림이 멍하니 금목환의 미소를 보고 있을 때, 금목환의 말대로 멀리서 두 개의 기가 오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금목환의 얼굴은 다시 냉정하게 돌아가 있었다.
저 미소를 본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 많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저렇게 부드러운 미소가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기에.
“왜 웃어?”
금목환이 한유림을 보며 물었다. 한유림이 잠깐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자신이 웃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금목환의 갸웃한 목은 본인도 웃고 있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에요.”
“그래.”
금목환과 한유림이 동시에 나무 위를 바라봤다. 역광의 달빛에 검은 신형 두 개가 보였다. 커다란 그림자 두 개가 둘을 보호하듯 감쌌다.
*
“아이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저 미친 마교도 새끼의 짓이구나. 당장 머리를 으깨놔야겠다!”
나는 가만히 서있었다. 금월상과 곽진도의 모습이 번갈아서 보인다. 그 이유는 금월상과 곽진도가 날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변검 공연인 걸까. 내 앞의 얼굴이 다섯 번 바뀌었을 때 그제야 난 입을 열었다.
“그만하세요. 큰 내상 아닙니다.”
“이 녀석아! 딱 봐도 핏자국이 기혈이 심하게 뒤틀렸었는데···”
“장로님, 막내가 놀랄 수도 있으니 조용히···”
심지어 난 금월상이 곽진도에게 뭐라 하는 걸 처음 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곽진도가 수긍하는 것도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다.
한유림은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 장소열 옆에 있었다. 이미 깬 장소열은 여전히 엎어져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 강기의 흔적들은 뭐란 말이냐? 설마 저 놈이 쓴 거냐?”
“네.”
“아, 그렇겠지. 그럼 받은 건 너고?”
“네.”
내 말에 곽진도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네 아비가 내 속을 썩이더니, 이제는 네가 썩이는구나. 강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강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한테 덤비는 건 자살행위인 걸 모르느냐!”
“전 괜찮았는데요.”
나는 그 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엎어진 장소열을 가리켰다. 곽진도와 금월상은 장소열을 바라봤다. 그들도 장소열의 가랑이에 있는 소변 자국을 봤고, 눈빛이 벌레 보듯 바뀌었다.
“넌 괜찮겠지. 널 아끼는 사람들이 죽어나는 거지.”
다시 내게로 머리를 돌린 곽진도는 혀를 찼다. 바로 금월상이 곽진도와 나를 갈라놨다.
“어쨌든 막내가 큰 부상이 아닌 게 다행 아닙니까. 아픈 애한테 어찌 이리 노성을 내십니까.”
“아니, 너도 무인이니까 강기가 어떤 의미인 지 정도는 알지 않느냐.”
정말 안 싸울 것 같던 둘이었다. 근데 여기서 이렇게 뜬금없이 목소리를 높이다니. 난 그들을 저지하려고 입을 열었다.
“저기, 그만···”
그와 동시에 아직 치료되지 못한 내상 때문이 피가 울컥 내뱉어졌다.
“목환아!”
피를 토한 현기증으로 내가 잠깐 비틀거리자 금월상과 곽진도가 바로 나를 감쌌다. 괜찮은 건 맞았지만 생각보다 피는 좀 흘린 모양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늦게 온 것을 괜히 네 탓을 하고 있던 게지.”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곽진도와 금월상은 동시에 침울한 목소리를 냈다. 이랬다, 저랬다. 참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난 당연히 그들이 늦게 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옛날에 마교랑 마주쳤던 곽진도도 처음 겪었고, 마찬가지로 나도 처음 알았으니.
그냥 내가 남들보다 그 사술에서 일찍 벗어났고, 한유림이 있는 쪽으로 온 거다. 장소열의 목적은 한유림이었으니.
또 막상 장소열과 나와의 싸움은 채 일 각밖에 되지 않았다. 난 자신이 있으니 들어간 거고. 생각보다 버거웠던 거다. 강기는 곽진도가 말한 것처럼 위협적이었고, 나도 꽤 다쳤으니까.
그러니, 이것만큼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건 제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뭔가 반박을 하려하자 숨을 끊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림이가 위급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저한테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네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곽진도가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겠죠. 그렇지만 그런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책임져야 하는 게 가주입니다. 그건 가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내 말에 곽진도와 금월상이 조용해졌다. 이미 난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내가 지금 나이에서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세가의 내부 청소를 한 다음 자생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
중원에 세가가 휘말릴 만큼 거대한 사건이 언제 벌어질지, 때를 유추하는 것.
그 두 가지로 기본 틀은 잡아놓은 셈이다. 이제 남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을 내가 방지하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꽤 길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곽진도가 문득 물었다. 금월상과 눈빛을 주고받는 걸로 봐서 휴전을 협약한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깔고 있는 장소열을 향해 턱짓을 했다.
“어차피 보타암이 망한 것도, 주산파나 혈랑파가 생긴 것도 저 마교도의 계략입니다. 굳이 본채까지 찾아갈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저기 봇짐에 다 들어있겠군.”
곽진도는 장소열이 허리춤에 매고 있는 봇짐을 바라봤다. 곽진도의 말은 정답이었는지 장소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우리는 장소열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까는 그렇게 강한 척을 하던 장소열이 벌벌 떨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마자 금월상이 장소열의 가슴께를 찼다.
“어억!”
내공을 실어서 찼는지 장소열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내가 보기엔 늘 순박하고 부드러웠던 금월상이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흉신악살과 다름이 없었다. 표정이 굳으니 퍽 무서운 얼굴이었다.
“일단 죽이고 시작할까?”
금월상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보다는 유림이의 원이 더 깊을 겁니다.”
금월상과 곽진도는 내 말에 흠칫했다. 그들은 내가 다쳤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 것도 뵈는 게 없었던 거다.
“···크흠, 유림아. 미안하구나. 이놈 낯짝을 보면 네가 제일 속이 상할 것을.”
“아닙니다. 전 황금세가의 사람이고, 이건 가주님의 몫인 걸요.”
한유림이 말했다. 아까 훈련 선언을 하면서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았다.
“가주님. 혹시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드려도 될 런지요.”
“뭔데?”
내가 물었다. 한유림이 호흡을 크게 쉬었다.
“일단 살려두고, 보타암에 먼저 가면 안 될까요?”
나는 잠깐 생각해봤다. 안 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도 보타암에 가보려고 했다.
명재희가 보내준 정보에도, 무림맹이 준 정보에도 검후하산 때 절강이 망가진 것만 써있었지, 막상 보타암 내부의 얘기는 없었으니까.
그걸 알아보는 것도 의의가 있지만, 당연히 제일 큰 원인은 한유림이었다. 그녀는 보타암의 생존자고, 지척인 주산까지 왔는데 안 가면 가슴에 사무칠 터이다.
“그래.”
“감사합니다. 가주님.”
한유림도 내 심기를 헤아린 듯,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때 금월상이 장소열을 보며 우려를 표했다.
“보타암에 가는 건 당연히 찬성이지만, 굳이 살려둘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봇짐에 우리가 보고 싶었던 자료는 다 있을 텐데. 괜히 마혈이라도 풀리면···”
“아니, 그건 걱정하지 마라.”
곽진도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는 그리고 엎어져 있는 장소열의 거골혈을 다시 깊숙하게 눌렀다. 엄지로 누르고 문질렀다. 그나마 머리는 조금씩 움직였던 장소열의 몸이 돌처럼 굳어져버렸다.
“이 정도면 보름은 누워있을 거니까.”
“···그렇군요.”
초절정고수가 짚으면 점혈이 보름이나 가는 구나. 또 하나 배운 셈이다.
“그럼 움직이자. 배는 서쪽에 묶여있으니까.”
여기는 남쪽. 조금만 섬 둘레를 걸으면 우리가 배를 맨 곳이 나올 터다. 그런데 뜻밖에 문제가 생겼다. 오줌을 싸고 석상처럼 굳어있는 장소열을 누가 업고 갈 것이냐의 문제였다. 허나 그것에서도 곽진도의 노련함이 빛을 발했다.
근처의 나무들을 툭툭 차보더니, 탄력성 있어보이는 나뭇가지를 꺾어 고리 매듭을 만들었다. 그걸 장소열의 목에 걸고 끌고 다니면 모든 문제의 해결이었다.
“스승님. 별 걸 다 알고 계시네요.”
“내가 가르쳐줄 게 이런 것밖에 없구나.”
“잘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마지막 문제까지 해결했다.
곽진도는 손목에 장소열의 목과 연결된 고리를 묶었고, 나를 업었다. 혼자 걸어가겠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양보하지 못한다고 우겨서 나도 업히게 됐다. 바로 옆에는 한유림이 금월상에게 업혀 있었다.
“가주님.”
한유림이 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작게 말했다. 물론 작게 말해도 다른 사람들한테 다 들리지만, 작게 말하고 싶은 내용인 듯했다.
“응.”
“보타암에 가면, 가주님께 드릴 게 있어요.”
“나한테?”
한유림은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이 대 소녀의 모습이었다. 뭐인지는 몰라도, 보타암에 한유림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난 일 각쯤 업혀가면서 보타암에 뭐가 있을까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보타암에 나한테 줄 게 있다니,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얼굴을 돌려 한유림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살포시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대신 난 머리를 더 돌려 타고 있는 주산을 바라봤다.
명재희가 준 정보에서 주산군도의 내용을 떠올랐다. 보타암이 망한 이후로, 여기 살던 소수의 주민들은 내쫓아지고 사파 무뢰배들만 사는 곳이라고 되어있었다.
마교가 보타암을 망가뜨린 것처럼, 이것도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었다.
저 멀리 혈랑파 본채 전각이 우지끈 꺾이고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