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맹세
87화 맹세
장소열은 한숨을 쉬었다. 환마가 마지막의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했던 환영탄(幻影彈)을 써버리고 말았다.
천마신교 내에서도 귀중한 물건 취급을 받는 환영탄. 장소열도 사실 처음 써보는 것이었다.
“···효과 하나는 확실하군.”
쓰자마자 천류유성검 같은 고수를 포함한 모두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경공을 쓰는데, 던진 장소열도 놀라울 정도였다.
일반 독처럼 몸으로 흡수되는 기전이 아니라, 시각적인 환상을 통해 환각을 유도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머리는 잠재우되 신체는 깨어있는 상태로 만든다나.
그렇게 들어도 무슨 원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서역으로 건너온 공부라며 원리는 몰라도 되니 그냥 쓰고 도망가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젠장.”
그러나 지금 장소열은 도망칠 수 없었다. 보타암의 생존자를 봤기 때문이었다. 여유 있는 척 말을 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보타암의 생존자를 볼 줄은 몰랐다.
보타암에 생존자가 있었다니. 그걸 몰랐다는 건 큰 실책이었다. 정파의 상징과 분열을 위해 보타암을 부숴놨는데, 생존자가 있으면 다시 뭉쳐서 상징이 될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산 거지?”
보타암의 핵심 전력은 검후를 막다가 죽었고, 나머지 잔당은 사파 무리에 입김을 불어 전멸시켰다. 보타암은 사면이 바다였고, 도망갈 곳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생존자가 있는 것일까. 그것도 검후의 딸. 한유림이 말이다.
천류유성검하고 검을 맞대기는 싫다. 하지만 한유림은 죽여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으려나.”
환영탄은 두 가지 단점이 있다고 했다. 첫째, 그들이 환영을 보고 난 직후 외부적 자극이 없어야 한다. 둘째, 환영에 걸려있어도 살기는 감지하기에 암살할 수는 없다는 것.
그러니 장소열은 그들이 환각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일 각 정도 지났다 싶을 때, 장소열은 한유림이 간 곳으로 경공을 펼쳤다.
쐐애액!
경공을 쓴지 반 각은 됐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유림이 보였다. 그 나이에 재빠르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그 나이대다. 장소열은 정파로 치면 초절정의 고수. 한유림과 속도가 비교될 수 없었다.
곧 장소열은 한유림의 뒤에서 살기를 쏘아보냈다. 한유림은 바로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홱 뒤를 돌아봤다. 환마의 말대로였다. 참 신기한 수법이었다.
“유림아. 뭐 힘든 일이라도 있는 게냐?”
장소열이 바로 말을 걸었다. 한유림은 멍하니 장소열을 바라봤다. 참 안타깝다. 분명 자라나면 미인으로 자랄 상인데, 여기서 이렇게 죽어야 된다니.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여기, 당과 하나 더 주랴?”
한유림은 그 말에 눈의 초점을 되찾았다. 그녀는 파르르 떨면서 장소열을 바라봤다.
아쉽게도 한유림은 말 한 마디 꺼내지 않고 검을 꺼내 돌격해왔다. 특이한 검법이었다. 검법 자체가 한기를 극대화하는 작용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유림은 구음절맥이었다.
“허허. 매섭구나.”
“닥쳐!”
한유림은 계속 검을 휘두르고, 장소열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계속 피했다. 검의 초식은 대충 파악했다. 무슨 검법인지는 모르지만, 꽤 좋은 검법이었다.
“유림아, 오랜만에 만나서 옛날얘기를 좀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구나.”
그 말과 함께 한유림의 가느다란 목이 장소열의 손에 잡혔다.
“컥!”
숨이 막혀 발버둥을 치는 한유림의 발은 장소열의 허리를 때렸지만 그에게는 간지럽기만 했다.
그때 문득 뭔가가 생각이 난 장소열은 잠깐 손의 힘을 풀었다.
“헉, 허억···”
발버둥을 치던 한유림은 온 몸에 힘이 풀린 듯 머리를 장소열의 손등에 처박았다. 헤쳐진 머리카락이 장소열의 손을 간지럽혔다.
“검후의 절예, 옥녀단마신공(玉女斷魔神功)의 비급을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더구나. 혹시 구전으로 된 것이냐? 아니면 따로 숨긴 곳이 있는 것이냐?”
장소열이 다급하게 물었다. 천마신교로 갈 때는 가더라도, 공로 하나는 더 챙겨가고 싶었다. 지금 가도 충분히 성공적인 간자 활동이었지만, 천마님에게 더 인정받고, 칭찬을 받고 싶었다.
“안 말해주면 네 어미처럼 고독을 먹일 테다.”
장소열이 채근을 했다. 한유림이 고개를 천천히 들고 입을 오물거렸다. 장소열의 모든 신경이 한유림의 입으로 향했다. 곧 한유림의 입이 작게나마 열렸다.
투!
하지만 한유림의 입에서 나온 건 말이 아니라 피가 섞인 침이었다. 침은 찰싹거리는 소리를 내고 장소열의 코에 붙어버렸다.
“그냥 죽여.”
장소열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한유림의 눈빛을 봤다. 그 단호한 눈빛을 보자마자, 장소열은 어떤 협박을 받더라도 한유림이 입을 열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 다음 생애에는 천마의 신도로 태어나려무나.”
장소열은 그 말과 동시에 한유림의 목을 부러뜨릴 예정이었다.
저 멀리서 검기가 빠르게 날아오지 않았으면 말이다. 언제 이렇게 빨리 날아온 건지, 장소열은 순식간에 손을 빼고 뒤로 빠졌다.
쿠구구궁!
검기는 땅을 가르며 정확히 장소열과 한유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장소열은 섬뜩했다. 천류유성검이 벌써 깨어난 것일까. 적어도 곽진도와 한유림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이 정도 검격을 뿜어낼 나이가 아니었으니, 장소열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음?”
잠깐 장소열은 자신도 환영탄의 영향을 받았나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 앞에 서 있는 건, 천류유성검도 아니고, 몸집이 큰 녀석도 아니고, 가장 유약해 보이는 꼬맹이였기 때문이다.
*
나는 주변을 바라봤다. 태을헌원진기가 비춰진 곳은 암흑이고, 길은 하얗게 보였다. 신법을 극성으로 발휘해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의아했다. 대체 어떤 환상이기에 곽진도 같은 고수도 있고, 나와 같은 비정상적인 교감을 가진 이들을 찢어 놓는단 말인가. 확실히 마교는 정파처럼 그냥 정직하게 검으로만 싸우는 곳은 아니었다.
곧 빛의 끝이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시야가 확 선명해지고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졌다.
허나 내가 나온 곳은 바다가 보이는 주산의 외곽이었다. 바다가 철썩였다.
나는 바로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난 일단 불타고 있는 혈랑파의 본채로 가기로 했다.
기감을 최대한 확장하고 신법을 극성으로 펼친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환상에서 깰 지도 몰랐다. 그들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바람이 귀에서 계속 삐, 울렸다. 마치 가을에 우는 곤충을 귀 안에 박아놓은 것 같았다. 앞에 바람은 너무 강해 내 눈꺼풀이 펄럭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때 내 기감에 작은 목소리가 걸렸다.
“컥!”
그건 비명소리였다. 고통을 담은 비명소리. 그리고 그 비명소리의 주인은 한유림이었다.
난 바로 몸을 틀어 소리가 난 쪽으로 경공을 펼쳤다.
내 신법은 나도 모르게 한계를 돌파하고 있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점점 속도를 올리다 보니,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멈춰있는 공기를 가르는 느낌이었다. 가을 곤충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만 있는 것 같던 공간을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장소열과 한유림으로 추정되는 작은 점들이 보였다. 난 발검해서 그 중심으로 검기를 쏘아냈다.
난 검기와 비슷한 속도로 날아갔고, 곧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한유림은 기절해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보라색 멍이 줄처럼 길게 나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졸린 모습이었다.
난 한유림의 상태를 다 살피고 그녀를 구석에 데려다 놓은 다음, 그녀의 근처에 진법까지 다 펼쳐주고 나서야 장소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장소열은 넋이 살짝 나간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쳐지자마자 장소열이 입을 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제일 먼저 환각에서 깨어난 게 너인 것도, 숨지 않고 내 앞으로 친히 온 것까지도. 혹시 광증에 걸린 건 아니더냐?”
“가주가 어찌 세가의 사람을 못 본 체하고 숨겠나.”
“나야 고맙긴 하다만, 네가 여기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 거냐?”
장소열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나보다.
“세가의 사람을 구하고, 마교도를 죽이는 일이 있지.”
장소열은 내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날 죽일 거라고?”
“그래.”
나는 말을 이었다.
“너를 죽일 것을 맹세하지. 황금세가의 이름을 앞에 대고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장소열의 표정이 그제야 굳었다.
“정말 광증에 걸린 아이구나. 천마님께 귀의하면 깨끗이 나을 것을.”
말을 마친 장소열의 손에서 보라색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도 검에 기를 불어넣었다. 송로가 푸르게 빛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두 가지의 기운이 부딪치고 폭발했다. 그 찰나의 순간, 난 장소열의 놀라서 크게 떠진 눈빛을 보았다.
“한 수는 있는 모양이구나!”
보라색 기로 감싸진 붉은색 안광이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당연히 적으로 만났던 사람 중에는 제일 빠른 속도였다.
내 검이 장소열의 신형을 따라 사방팔방으로 그어졌다. 순식간에 남해십이검의 세 초식이 펼쳐졌다. 주먹질은 아슬아슬하게 계속 빗나가고 막혔다.
빠른 공방이 지속될 때, 장소열은 내 허리를 노리고 걷어차려 들어왔다. 아까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일부러 장소열은 힘을 숨기고 내게 들어왔던 거다. 갑자기 빨라진 속도로 당황시키는 게 목적이었으리라. 꽤 실전적인 기만술이었다.
“흡!”
하지만 나 역시 모든 걸 보여주지는 않았다. 이래서 강호에서 삼 할은 숨겨야 된다는 걸까. 장소열이 나보다 고수인 건 명백하기에, 언젠가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들어올 건 예상했다.
난 바로 남해십이검의 모든 초식을 관통시켰다. 내 남해십이검은 들어오면 잡아먹으려는 고래의 입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장소열은 내 검의 위험을 깨달은 듯 주먹을 되돌리고 뒤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깊이 들어온 만큼 내 검격을 전부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내 손에 살갗이 베어지는 감각이 났다. 뼈에 걸리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후두둑.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검풍으로 인해 흙먼지가 얕게 일었다.
“···넌 뭐냐? 반로환동이라도 한 게냐?”
뒤로 물러난 장소열이 입을 열었다. 아까와는 완전히 상반된 눈빛이었다. 이런 위협을 느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듯했다.
“아니.”
난 그의 말에 짧게 대답하고 아쉬움만 곱씹었다. 내 내공이 더 강했다면 분명히 장소열에게 큰 타격을 줬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어린 불신자야. 네 말이 맞다면, 넌 지금 소천마(少天魔)님을 위협할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거구나.”
장소열은 위로 올린 주먹을 허리 옆으로 내렸다. 이른바 자연체(自然體)라고 불리는 자세였다.
장소열은 다시 보라색 기를 뿜어냈다. 확실히 그 기는 아까 풍겼던 것과 달랐다. 더욱 농밀하고, 더욱 강건했다.
“내가 지금 잘못 생각했구나. 보타암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어.”
손에 감긴 보라색 마기가 훨씬 짙어지고, 자기들끼리 엉기기 시작했다. 기의 형체가 곧 뿌옇게 흩어지고, 대신 보라색 빛을 냈다.
옅긴 하지만, 그건 분명 강기(罡氣)였다. 정파로 따지면 초절정 고수만 쓸 수 있다는 그 강기.
“···천류유성검 때문에 아껴놓은 기를 여기서 쓸 줄은 몰랐구나.”
장소열이 말했다. 강기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당연하지만 난 아직 강기를 낼 수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송로를 납검했다. 장소열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갑자기 또 무슨 짓거리냐?”
“나도 권장법으로 할까 해서.”
내 말에 장소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주력은 검인데, 수공(手功)으로 한다고 하니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장소열은 착각하고 있었다. 내 주력이 검법인 건 맞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수법 중 가장 어려운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약선이 준 천혜침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