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만남
85화 만남
한 문파의 문주가 아무리 즉흥적으로 나갔다고 해도, 문주의 방을 지키고 있는 무인은 상시 있는 법이다. 문주의 방은 그야말로 문파의 핵심적인 비밀을 담고 있는 곳이니 말이다.
엄조후는 특히 문주의 방은 다섯 명씩 지키게 했다. 원래는 한 명만 뒀지만, 들어오는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람을 추가하기 시작해 다섯 명까지 늘린 것이다.
“문주님이 많이 바뀌기는 했군. 예전에는 나름 선량했다고. 생일도 챙겨주고, 아이를 낳으면 돈까지 더 주고.”
“어이없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돈벌레가 뭘 어쩌고 저째?”
“옛날에는 돈벌레가 아니었다니까. 돈을 많이 버니까 돈벌레가 된 거야.”
“그럼 돈벌레가 본성인거지.”
예전부터 엄조후를 모신 혈랑파의 무인과 다른 사파였는데 통합된 무인은 설전을 벌였다. 허나 오래된 혈랑파의 무인의 의견은 크게 지지받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문주는 지금의 문주와 너무 괴리감이 있었다.
“내가 볼 때는 지킬 게 생기니까 탐욕스러워진 게야. 옛날에는 몇몇 상인들이 돈이 없어 보호세를 못 내겠다고 해도 한두 달은 면해줬다고.”
그 말에 나머지 네 명이 크게 웃었다. 은자 한 냥, 동전 한 푼에도 눈이 돌아가는 양반이 한두 달은 면해줬다니. 지금 항주에서 상인이 그랬다면, 당장 그 가게는 박살이 날 터였다.
다른 네 명이 조롱을 하려 할 때, 그들은 흠칫했다. 복도 끝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 복도는 외진 곳인데다가, 다른 방이 따로 없었다. 이 복도로 들어섰다는 건 문주실에 볼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흠칫한 건 단순히 기척뿐만이 아니었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역한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웬 놈이냐?”
코를 막은 무인 한 명이 소리쳤다. 어두운 복도에서는 그저 사람의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그 사람은 대답 없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누구인지는 모르고 좀 씻고 다녀라. 대체 며칠을 안 씻으면 이런 냄새가 나는 거냐?”
한 무인의 조롱에도 그 사람은 어떤 반응 없이 다가왔다. 땅바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세히 보니 소매 끝에서부터 한 방울씩 맺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누구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다섯 명이 동시에 발검했다. 문주실을 지키는 무인은 모두 일류. 일류 다섯 명이 기파를 풍겨 냄새를 걷어냈다.
무인들은 시력을 기로 돋워 봤지만, 이상하게도 그 복도의 어둠이 꿰뚫어지지 않았다.
“날세. 장소열.”
그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무인들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뭐야. 왜 온 거지?”
여전히 무인들은 경계하며 어둠을 향해 검극을 세웠다.
“문주가 시킨 일이 있었는데 까먹었지 뭔가.”
어두운 부분은 걷어지지 않고 목소리만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복도가 어두운 게 아니라, 장소열 근처가 어두운 것이었다.
“난 얘기 못 들었어. 지금은 못 들여보내주니 그냥 가.”
“안 돼.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네.”
“이놈이 미쳤나?”
성난 무인 중 하나가 어둠 속으로 칼을 잡고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 소리가 들렸고, 강시처럼 쪼그라든 시체 하나가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시체는 피가 전부 빨린 듯 홀쭉해져 있었고, 피부는 투명해 안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어?”
잠깐 무인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장소열인데, 어찌 일류에 가까운 무인을 죽일 수 있으며, 이 이상한 무공은 무엇인가. 마치, 말로만 들었던 마교의 무공같지 않은가.
그때 어둠을 찢고 장소열이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마교?”
멍하니 읊조리는 무인의 머리를 장소열이 한 손으로 붙잡았다.
“아니, 천마신교다. 불신자야.”
그러면서 악력으로 무인의 머리가 수박이 깨지듯 우그러졌다. 대경한 무인들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그것도 이미 늦었다.
“컥!”
장소열의 손은 어느새 한 무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등을 뚫고 나온 심장은 곧바로 붉은색을 잃고, 잿빛 덩어리로 바뀌고 말았다.
“···허억.”
나머지 두 무인은 움직이려고 했지만, 어쩐지 장소열의 보라색 안광을 보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굳어버린 두 개의 머리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띄워졌다.
장소열은 바로 발로 문주의 방을 찼다. 나무로 된 문짝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뜯어졌다.
문주실에는 휘황찬란한 보물들과 명화들이 잔뜩 걸려있었지만, 장소열은 신경 쓰지 않고 구석으로 갔다. 곧 쭈그려 앉은 그는 주먹을 망치처럼 말아 쥐고 바닥을 부쉈다.
그곳에는 나무로 만든 상자와 간자로서 업무일지들, 옷가지들이 들어있었다. 목제 상자에서는 끼긱, 거리는 곤충의 소리가 났다.
“이것도 오랜만에 입는군.”
장소열은 옷가지들을 풀어 옷을 갈아입었다. 곧 장소열은 봇짐을 메고 죽립을 쓰니, 완전한 상인이 됐다.
그때, 문 바깥 복도에서 악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다! 침입자다!”
장소열이 잠깐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초병들의 교대시간이 이쯤 됐었던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건물이 진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될 뿐. 중원에 삼십 년을 있었다. 이 정도 시간이 늦춰지는 건 늦춰지는 것도 아니었다.
*
우리는 해가 다 떨어지고 난 뒤에 진해로 도착했다. 절강의 동쪽 끝에 있는 곳. 이곳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주산과 가장 거리가 가까웠다.
“바다가 좀 거칠구나.”
금월상은 우려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확실히 파고가 높았다.
주산도 보타암도 똑같이 주산군도에 속해있다. 주산군도에는 주산과 보타암 뿐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섬들이 있다. 어쨌든 배를 이용해 들어가야 할 곳이라는 거다.
밤이 늦어서 그런 걸까. 나루에 나와 있는 뱃사공들이 없었다. 뱃사공뿐 아니다. 그냥 마을에 사람이 안 다녔다. 불이 켜져 있는 집도 많이 없었다.
“여기 진해에 역병이라도 돌았나?”
“이제 사람들이 주산군도를 찾을 일이 없지. 보타암이라는 성지 대신 사파 찌끄레기들이 들어섰으니.”
금월상의 말에 곽진도는 씁쓸하게 답했다. 그래도 나루에 매어있는 배들은 있었다. 나루 근처에는 선(船)이라는 글자가 적힌 집이 있었다.
나는 지체 없이 나루 그 집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곧바로 안에서 반응이 왔다.
“혹시 지금 주산군도로 갈 수 있습니까?”
“날씨가 이런데 어찌 가겠소? 내일 아침에 오시오.”
문 안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그럼 배라도 빌려주시죠.”
“배를 빌려주는 뱃사공이 어디 있소? 검을 빌려주는 무인이 있더이까?”
남자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아니면 배를 사겠습니다.”
“아니, 어린놈의 새끼가 진짜!”
분기에 찬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을 찡그린 중년의 사내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곽진도와 금월상이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금월상과 우락부락한 곽진도가 뱃사공을 내려다보았다. 중년 뱃사공은 눈을 두 번 깜빡하더니 헤벌쭉 웃었다.
“하하. 무가의 도련님이셨군요. 제가 못 배운 놈이라 말이 막 나옵니다. 이놈의 입을 고쳐야 됩니다. 입을.”
남자는 그 말을 끝내고 자신의 입술을 몇 번 후려쳤다. 찰싹, 찰싹거리는 소리가 꽤 크게 났다.
“도련님이 아니라 가주···”
한유림이 끼어들려고 했지만, 나는 그녀 앞에서 손사래를 쳐 막았다. 지금은 그런 논쟁을 할 시간이 아니었다.
당장 혈랑파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갔다고 해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아무튼 배를 사겠습니다. 얼마죠?”
“하이고. 도련, 아니, 가주님. 제가 아쉽게도 배는 팔지 않습니다. 옛날에 산 거라 가격을 정확히 매기기도 어렵습니다.”
“옛날에 얼마에 샀는데요?”
“은자 다섯 냥 주고 샀을 겁니다. 너무 옛날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공손하게 답하는 남자의 말에 난 바로 주머니를 열었다. 비상용으로 준비해온 은자들이었다.
난 그곳에서 바로 은자 열 냥을 꺼냈다.
“이 정도면 됩니까?”
“···어, 어···”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에게 나는 은자를 건넸다. 남자는 얼결에 그걸 두 손으로 받았다.
“계산된 겁니다. 나루에서 제일 멀리 매어있는 배를 가져가죠.”
우리는 바로 등을 돌려서 나루로 향했다. 나루에 곧 도착할 때쯤에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살펴 가십시오! 대협!”
그러나 우리는 묶여있는 끈을 풀기에 바빴다. 인사에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
진해에서 주산까지 가는 건 일 각이면 충분했다. 곽진도와 금월상이 노에다 기를 담아 팍팍 질러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기 때문에 파도가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배는 많이 흔들렸지만, 빨리 가는 걸로 족했다. 우리는 주산의 나루가 어디 있는지 몰랐기에, 대충 내린 다음 커다란 나무 둥치에 밧줄을 묶어 놨다.
그렇게 주산의 안쪽으로 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모두가 잠깐 멈칫했다.
“···피 냄새가 나요.”
한유림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느꼈다. 한유림의 말대로 혈향이 짙게 나고 있었다.
우리는 뭐라 할 것도 없이 혈향이 나고 있는 쪽으로 경공을 펼쳤다. 당연하지만, 명재희가 보내준 혈랑파 본채의 위치와도 일치하는 방향이었다. 주산에서 혈향이 날 곳은 혈랑파 건물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주산에 있는 나무 꼭대기들을 밟으며 나아갔다. 발에 실린 힘 때문에 나무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나무가 꺾이는 소리와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우리 뒤에서 스산하게 울렸다.
언덕 몇 개를 넘어가니 혈랑파의 본채가 보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채 전각 중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이제는 혈향에 나무가 타는 냄새까지 겹쳤다.
우리는 그렇게 열기를 담은 뜨거운 바람까지 뚫고 나서야 혈랑파의 본채에 도착했다.
혈랑파의 정문 바깥에는 검은 시체들이 많았다. 불에 탄 흔적이었다. 이미 불탄 지는 꽤 된 듯 몸이 다 검게 변색이 되어 있었고 잔불만 남아있었다. 장원 안쪽에도 검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나는 전각을 바라봤다. 전각은 아직 그렇게 큰 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건 저 불에 태워진 게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태웠군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우리는 동시에 건물 안쪽을 바라봤다. 건물 안쪽은 어둠만 도사릴 뿐 고요했다.
그때였다. 건물 안쪽에서 뭔가 인기척이 들렸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이 전부 발검했다. 그곳에서는 웬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봇다리장수가 나왔다. 딱 얼굴과 배, 몸뚱이가 푸짐한 행상인의 행색이었다. 물론 여기가 아닌 다른 길에서 봤으면 말이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얼굴을 확인했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지만, 그 침묵을 깬 건 의외의 사람이었다.
“···아, 아저씨가 여기 왜 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은 건 바로 한유림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물론이고 검극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한유림의 얼굴을 보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 유림아. 살아있었구나?”
한유림을 제외한 우리들은 한유림과 상인을 번갈아서 봤다. 상인은 여유 있게 웃었지만, 한유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누구야?”
내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한유림은 여전히 진정이 안 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보타암에 가끔 물건을 갖다 주는 상인 아저씨였어요.”
“그래, 그래. 그랬었지.”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예요?”
“팔 게 있어서 잠깐 들렀는데, 이 모양이더구나.”
남자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했다. 그는 정체를 숨기려는 모양이었지만, 난 그가 나오자마자 그의 정체를 알았다. 잊기 어려운 지독한 냄새가 그의 봇짐에서 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댁들은 누구시오?”
남자가 물었다. 나는 냉큼 대답했다.
“난 황금세가의 가주 금목환이다. 너는?”
“아하. 그렇군. 하지만 나는 그냥 일개 상인이라 딱히 소개할 말이 없는 걸.”
“일개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손가락으로 그가 멘 봇짐을 가리켰다.
“내가 상계라 잘 아는데, 중원에 칠색고(七色蠱)를 파는 상인은 없거든.”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입이 뻥끗댔지만, 말이 안 나오는 걸 보니 퍽 당황한 모양이었다. 난 다시 물었다.
“마교의 광신도야. 중원에는 어찌 왔느냐?”